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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학자로 산 지난 40년

2010. 9. 3. by 현강
* 이 글은 2009년 12월 5일 <사회정책연구회>에서 발표한 내용의 요약본이다. 
  학자로 산 내 생애 40년을 성찰적으로 되 돌아 보았다.


‘하고 싶은 일’, ‘잘하는 일’, 그리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하나로 겹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나는 어려서부터 ‘글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워낙 다른 재주가 없어 그 나마 공부 잘하는 것이 내 딴에는 장기였다. 또 학자로 산다는 것에 항상 의미를 부여했고 자부심을 느껴 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스스로 무척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학자, 특히 사회과학자는 자신의 생활철학이 어쩔 수 없이 공부 속에 녹아 들어간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내 기본적 생각이 무엇을,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난 40년간 격동의 생활 속에서 학자로 살면서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들을 성찰적으로 되새겨 볼 때, 아래에 몇 가지로 집약된다.

 

1.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

나는 스스로 이념적으로 <중도개혁자>를 자처했다. 자유나 평등에 극단적으로 몰입되기 보다는 양자가 변증법적으로 지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급진적 변혁보다는 점진적 개혁을 지지했고, 이념적 대결대신에 상생과 사회적 합의를 추구했다. 경제성장과 사회복지의 선순환을 지향하고, 그 길이 어렵지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교육영역에서도 정권의 수명을 뛰어 넘는 중. 장기적 교육비전을 마련하려고 애썼다. 영재교육과 대안교육이 다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자리나 현실적 이해 때문에 이러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내가 지향했던 우선적 가치는 <인간화>가 아니었던가 생각한다.

크게 보아 체제 안에 있었지만, 언제나 <핵심>이 아닌 <주변>에 터를 정하고 비판의 날을 세웠다. 대체로 <unattached within>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중도주의자의 <고독>을 반추하며, 시대의 도도한 흐름과는 얼마간 다른 소리를 해 왔다.

 

2. 자아준거성

사회과학은 그 사회의 토양과 문화를 반영하는 학문영역이다. 따라서 사회과학자들은 그 사회의 필요를 발굴하고 또 그에 슬기롭게 대응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한국 땅에서 <미국학문>을 하고, 자신들이 학문적으로 <첨단>에 있다고 자부한다. 교과과정도 미국사람들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마련한 것을 그대로 옮겨 놓고 그것을 가르치며 스스로 <선구적>이라고 자부한다. 나는 사회과학의 <자아준거성>(自我準據性>을 필요 있을 때 마다 주장했다. 나는 그 때 그 때 한국 사회가 목마르게 필요로 하는 분야가 무엇인지를 찾아 보려고 애썼고, 그 분야에 대한 개척적 연구를 많이 했다. 나의 학문적 접근은 대체로 <역사. 비교론적> 접근이었다. 주제를 역사적으로 탐구하고, 아울러 비교론적 입장에서 다른 나라(혹은 국가군)와 비교하는, 씨줄-날줄의 교직(交織)을 통한 입체적 연구방법이 그것이다.

 

3. 학문간 벽 허물기

실제 세상(사회현상)은 모든 게 한데 얽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움직이는데, 학문이 자기 필요에 의해 전공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나누고 칸막이까지 했다. 나는 비교적 전공이나 학과의 벽을 넘어 학자생활을 해 왔다. 정치학자이며, 행정학자이고, 정치사회학이나 정치경제학도 남의 영역이라고 느껴 보지 않았다. 그 때 그 때 몰입했던 분야도 다양하고, 손댔던 분야도 꽤나 넓었다. 그러다 보니 하고, 학문적으로는 한 우물만 깊게 파는 경우 보다 에너지 손실이 컸다. 그러나 나는 그런 식의 공부가 재밌고, 행복했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교수충원에서 흔히 대두되는 <순혈주의>(학사, 석사, 박사 모두를 같은 전공으로 해야 한다는 식의)를 탐탐치 않게 생각한다.

 

4. 이론과 실천의 접목

나는 정치학과 행정학, 정책학을 함께 공부 하면서, 이론과 실천을 엮어 보는데 많은 관심을 쏟았다. 원리추구적 순수학문인 정치학과 실천위주의 행정학을 접목하는 일은 내게 역동적이며, 살아있는 학문을 하고 있다는, 그리고 우리의 생활세계를 개선하는데 스스로 한 몫을 하고 있다는 의미를 부여했고, 여기서 오는 박동감, 몰입감, 자부심이 나를 항상 깨워있게 했다. 내가 주저하면서도 정부 일을 두 번 씩 맡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본다.

 

5. 권력, , 연고와 거리두기

나는 권력과 돈, 그리고 연고와 거리를 두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해 왔다. 두 번이나 장관을 지낸 사람이 권력과 거리를 두었다니 이해가 안 된다고 할지 모르나, 입각 전에 당시 대통령들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고, 정치권과는 어떤 인연도 없었다. 10 여년 동안 주요 일간지에 정치평론을 쓰면서 내 딴에는 언제나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위치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또 정부와 정책을 연구하는 학자이지만 정부 프로젝트는 극력 피했고, 특히 권위주의 시대에는 더욱 그랬다. 학연이나 지연, 혈연 등 연고주의적 네트워크가 우리 사회를 멍들게 하는 주범이라고 여겨 이런 사회관계의 늪에서 스스로를 멀리 하려고 노력했다. 검약을 생활의 모토로 했고, /글과 행위/삶의 양식 간에 괴리를 줄이려고 애 썼다.

 

6 處無爲之行學不言之敎

내 서제에 걸려 있는 액자에 그렇게 쓰여 있다. 靑南 吳濟峯 선생이 내게 내려 주신 글이다. 나는 그 내용을 무척 좋아 한다. 정년 후 설악산 기슭을 찾은 것도 무위자연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학자에게는 정년이 없다>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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