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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나도 모르게 한 배를 탔던 많은 이들

2010. 9. 5. by 현강

I.

1995년 말 내가 교육부장관으로 발령이 났을 때, 무척 당황하고 아득한 심경이었다. 전혀 예상치도, 아니 꿈꾸지도 않았던 상황이었다. 개각 발표 1시간 10분 전 쯤, 김영삼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을 때, “제가 저를 잘 압니다. 전혀 그 직책에 합당한 사람이 아닙니다.”라고 누누이 말씀을 드렸다. 그냥 인사치레로 한 게 아니라, 진심을 토로한 말이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궁지에서 빠져 나오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수락하고 말았다.

그날 늦은 오후 시간에 얼마 전 까지 정부 고위직에 있었던 가까운 친구 한명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는 내일 임명장을 받으려면 검거나 짙은 곤색의 정장이 필요한 데 그런 양복이 있느냐고 내게 물었다. 내 옷은 모두가 밝은 계통의 옷뿐이라고 답하니, 그는 “그럴 줄 알았다”라며 빨리 하나 준비하라고 했다. 나는 급히 내 처와 함께 L 백화점으로 달려가, 문 닫기 직전에 가까스로 기성복 검은 정장을 갖출 수 있었다.

마음의 준비 없이 시작한 일이라 벅차고 힘겨웠다. 자신감도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던 얼마 후 한국행정학회 전임 회장단 모임이 있어 위로도 받을 겸 거기 참석했다. 많은 분들이 축하의 말씀을 건넸다. 그런데 두 분의 격려가 특히 마음에 와 닿았다. 한 분은 이한빈 교수님이셨다. 한 때 경제부총리를 역임하기고 학계, 관계에서 두루 큰 족적을 남기신 분이다. 이 교수님은, “안 교수, 잘 하실 거야. 안 교수는 철학이 있는 분이잖아. 장관은 철학이 있는 사람이 해야 돼, 그래서 나는 믿어”라고 격려하셨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주제넘게 “아, 나에게도 그런 자질이 있을지 모르지, 저 양반이 빈 말 하실 분은 아니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힘이 솟았다.

연구실 선배인 고려대 백완기 교수님도 내게 크게 힘을 보태 주셨다. “내가 안교수를 오죽 잘 알아, 사심이 없잖아. 누구에게 인사청탁이나 뇌물은 절대 받지 않을 테니까. 그것만으로도 장관 깜이야. 잘 하실거야”라는 말씀이었다. 그러자, 또 주제넘게 “아, 그 점은 내가 자신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 나는 학계의 선배와 동료들이 내게 보낸 신뢰와 격려에 크게 고무가 되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힘 내, 너도 할 수 있어”라고 다짐했다.

II.

1997년 8월 퇴임했다. 퇴임 직후, 교육부 출입기자들이 고맙게도 송별연을 마련하고 감사패까지 해 주었다. 그러면서, “장관님, 기자들이 제 돈 내서 퇴임하는 장관 밥 사주는 예는 유례없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돼요.” 라고 말했다. 분위기는 매우 화기애애했다. 그러던 중, 야당지의 한 기자가 말했다. “장관님, 제자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어 제가 얼마나 고전한지 아세요. 냉혈한으로 이름 난 우리 부장님도, 저만 만나면, ‘우리 교수님 도와 드리라’니 저는 뭐가 되지요”라고 볼 맨 소리를 했다. 그러자 다른 기자들도 비슷한 사연을 펼치면서 내 제자들 등살에 고생했다는 말로 한마디 씩 거들었다. 재임 중 언론이 비교적 내게 호의적이었던 데는 이처럼 나도 모르게 커튼 뒤에서 나를 도왔던 많은 이들의 성원이 있었음으로 뒤늦게 깨달았다.

장관직을 수행하는 동안에는 사생활은 없었다. 가족이나 친지를 만나 안락한 분위기에서 여유롭게 대화를 나눈 기억이 별로 없다. 그래서 많은 이들을 서운하게 했다. 그런데 장관직을 마치고 나와 가까운 분들과 자리를 같이 하면서, 새롭게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놀랐던 것은 장관으로 있으면서, 본의 아니게 많은 지인들을 크게 괴롭혔다는 것이다.

이들이 다투어 하는 말인 즉, “내가 당신과 가까운 걸 세상이 다 알잖아. 그러니 나를 통해 인사청탁이 꽤나 많이 들어왔어. 그거 뿌리치느냐 얼마나 고생한 줄 아나. 그 때 마다, 나는 ‘그 친구 성질이 더러워서 부탁하면 분명 불이익을 받을 게 뻔하니 아예 그런 생각일랑 하지 말라’ 고 한마디로 잘랐지, 당신 때문에 고생한 것, 말도 마”였다. 어떤 이는, 나를 한번 만나도록 주선해 달라고 간청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혼났다는 얘기도 했다. 이들의 곤궁한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실제로 재임 중 코빼기 한 번도 못 보면서 내 그림자 뒤에서 갖은 고생만 했다는 것이다. 나는 백배 사죄하며 이 분들의 속 깊은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같이 유학을 했던 여자 선배 한 분 말씀에 나는 잠시 숙연함을 느꼈다. 얘기인 즉, “안 교수가 장관을 그만 두시니 이제 제가 발을 뻗고 자겠어요. 마치 어린 아이 물가에 내 보낸 것처럼 어찌나 불안했던지. 정말 이제 사는 것 같아요” 였다.

대과(大過)없이 두 번 씩 장관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처럼 커튼 뒤에서 마음 졸이며 나를 응원해 주신, 많은 분들의 따듯한 격려와 깊은 배려 덕택이었음을 다시 느낀다. 나도 모르게 나와 한 배에 동승해서, 거친 풍랑 속에서 흔들리는 나를 굳게 지켜 주셨던 이들 많은 분들에게 진심으로 송구스러움과 고마움을 함께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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