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전적 에세이

한 여름 제철공장의 추억 I

2010. 10. 9. by 현강

I.
나는 1967년 6월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 유학 간 후 두 번째 맞는 여름 방학을 앞두고 색다른 계획을 세웠다. 산업사회의 가장 역동적인 삶터인 노동현장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자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여러 가지를 고려해 보니 <린쯔>에 있는 세계적인 제철소 <Voest>가 가장 내가 찾는 이미지에 맞았다. 당시 Voest는 생산체계, 생산능력, 공법 등에 있어 유럽 최고수준의 제철소로서,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산업체였다. 제철공장은 노동강도가 높고 얼마간 위험이 따르는 작업장이나, 산업사회의 참 모습을 가장 잘 살필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알아보니 이미 여름 방학 학생 아르바이트 신청기간이 지났다는 얘기였다. 궁리 끝에 Voest의 회장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일자리를 부탁해 보자는 생각을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왜 그런 엉뚱한 발상을 했는지 의아스럽다. 나는 그에게 편지를 통하여 한국에서 유학 온 정치학 전공의 박사과정 학생인데, 방학 기간 중 귀 제철소 노동현장에서 일하면서 산업사회의 여러 단면을 직접 체험하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다. 놀랍게도 편지를 보낸 지 사흘 만에 회장의 친필 편지를 받았다. 일자리는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한번 만나고 싶으니 일하러 오면 꼭 한번 자기를 찾아 달라는 것이었다. 나의 두 달간의 한여름 철공장 체험은 이렇게 시작이 되었다.

  II.
인사부에서 내게 사무실 보조업무를 할 것인가 아니면 육체노동을 할 것인가를 물었다. 내가 노동을 하러 왔다고 대답을 하니, 담당자가 몇 군데를 추천했다. 나는 직접 발품을 팔아 몇 공장을 직접 돌아보았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이 용광로 작업장이었다. 1,000도가 훨씬 넘는 높은 온도로 철광석을 녹여 쇳물을 만드는 숨 가쁜 과정을 지켜보며 치열한 노동현장의 전형을 보는 듯했다. 그러나 너무 위험해 보여 발길을 돌렸다. 결국, 나는 냉연강판절단설비공장을 택했다. 기계화된 공정과 인간 노동이 적절히 배합되어 보였고, 노동 강도나 안전관리체계도 그만하면 됐다 싶어 그리 결정한 것이다.

작업장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고릴라처럼 우람한 체격의 반장이었다. 능글맞은 웃음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나를 보자 그 몸집으로 이 힘든 일을 어떻게 하겠느냐며, 고개를 모로 저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정말 그곳 노동자들 한명 한명이 근육질의 거한들이었고 힘이 넘쳐 보였다. 당시 나는 173cm, 73kg의 체구였으니 한국청년으로는 제법 건장한 축에 들었는데, 그들과 비교하니 왜소하기 그지없었다. 반장은 며칠 전에 아르바이트 대학생이 멋모르고 왔다가 사흘 만에 포기하고 되돌아갔다며 “내가 장담하지, 자네는 이틀 만에 기권할 거야”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작업장은 마치 대도시 기차역 터미널처럼 높은 천정의 통짜 공간이었는데, 그 크기가 운동장만큼이나 컸다. 그 대형 홀 안에 수십 대의 절단기가 있었고, 전단기들은 저마다 일정 시간 간격으로 냉연강판을 한 장 한 장 토해내고 있었다. 그러면 절단기 앞 쪽에 마주 서있던 노동자 두 사람이 기계가 토해낸 강판을 받아 함께 맞들고 몇 걸음 옮겨 차곡차곡 쌓는다. 강판이 일정 높이로 쌓이면 대형 크레인이 공중에서 내려와 큰 집게로 집어 나른다. 절단기마다 쏟아 내는 강판의 무게가 달라 가벼운 것은 20kg 정도이나 어떤 것은 그 배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반장은 60세 전후의 초로의 노동자 한 사람을 불러, 나를 데리고 가르쳐 가며 일하라고 명했다. 베버라는 이름의 자상한 눈빛의 그 아저씨(사실 그때는 그가 할아버지처럼 보였다)는 나에게 강판을 잡고, 옮기는 요령을 간략히 설명한 후, 기계는 사람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자동으로 작동하니 정신 차리지 않으면 사고가 난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는 곧장 “일하자”고 외쳤다.

20kg짜리 강판을 두 사람이 맞잡으니 처음에는 가볍게 느껴져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채 10 여분도 안 되어 팔이 떨어질 듯 아프고 땀이 비 오듯 했다. 그렇다고 기계는 쉴 새 없이 강판을 토해내니 마음대로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안간힘을 쓰며 겨우 겨우 버텼다. 그렇게 정신없이 8시간을 보내고, 노동자 숙소로 가는 셔틀버스에 올랐을 때 완전히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노동자 호텔이라고 불리는 숙소는 냉방시설, 화장실과 샤워시설을 다 갖춘 제법 준수한 원룸 형식의 공간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쓰러졌다. 다음날 눈을 뜨니 오전 10시, 인사불성으로 무려 17시간을 잔 것이다. 다행히 오후 4시 교대여서 일터로 나가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온몸이 아프고 쑤셔 운신이 어려웠다. 무엇보다 두 손이 퉁퉁 부어 아예 쥐고 펴고 할 수가 없었다. 그때 내 뇌리를 스치는 생각은 ‘도저히 안 되겠다. 살고 봐야지. 일을 그만두어야겠다’ 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능글맞은 우리 반장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분명, “그것 봐, 내가 얘기한 그대로지, 제 녀석이 여기가 어디라고”라며 크게 웃을 게 아닌가. 어디 그 뿐인가. 그 작업장에, “한국 유학생이 한명 왔었는데, 그래 그 녀석이 겨우 하루 일하고 그만두었잖아”라는 뒷말이 전설처럼 이어질 게 아닌가.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해 크게 실망하고, 자신감을 잃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부랴부랴 양손을 따듯한 물에 담그고 힘껏 비비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리곤 뜨거운 목욕으로 몸을 풀었다. 그러기를 몇 시간. 오후 3시가 돼서야 간단히 요기하고,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쓰러지더라도 일터에서 쓰러져야겠다고 단단히 작정했다.

  III.
공장의 노동강도는 생각보다 높았고, 작업조건도 녹록치 않았다. 자잘한 일상적 사고도 빈번했고, 무엇보다 대형 크레인이 강판 더미를 공중으로 올리다가 실수로 한, 두 장을 놓쳐 허공으로 날리는 경우 그 결과는 치명적일 수 있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언제나 중무장 상태로 일했다. 한여름인데도 철제 헬멧을 쓰고 가죽 보호대로 몸 여기저기를 감싸다 보니 일하는 내내 땀이 억수처럼 쏟아진다. 힘든 작업을 잊을 겸, 땀도 식힐 겸, 대부분 노동자들은 손에 맥주를 달고 일한다. 말하자면 얼마간 취한 상태에서 일하는 셈이다.

그들 노동자들 대부분은 청소년기 학교과정에서 실패를 맛보고 패자부활전에서도 낙오된 사람들이었다. 성정이 단순하고 거칠었으나, 하나같이 순수했다. 임금은 높은 편이었으나 많은 이가 낭비벽이 있고, 합리적인 생활관리 능력이 부족해서 일상이 무질서하고 돈을 모으지 못했다. 그런가 하면, 일 자체가 단순반복적이고, 성취나 자기쇄신의 기회가 전무하다보니 노동과정에서 소외를 느끼기 십상이다. 게다가 매주 8시간씩 시간대를 옮겨가는 3교대제여서 일상적 사회생활에 지장이 크고 불안정했다. 예전에 비해 크게 나아졌다고는 하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평균적 노동자 생활의 질은 그리 높지 않았고, 중산계급과의 사회문화적인 간격은 크게 좁혀지지 않았다.

내 파트너인 베버 씨는 여느 노동자들과 많이 달랐다. 2차 대전에 참전했던 구세대인데, 성실하고 사려깊은 분이었다. 휴식시간이면 조용한 말투로 자신의 미래계획을 말하곤 했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대목이 있다.

“헤르(Herr) 안, 나는 생사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사람이네. 그런데 살아오면서 이렇게 좋은 세상이 오리라고는 꿈꾸지 못했네. 내년에 퇴직하면 연금이 제법 되네. 그간 저축한 것도 얼마 되고... 그래서 내 처와 자주 해외여행을 떠날 생각이네. 혹시 아나, 한국에서 자네와 만나게 될지.”

제철공장의 막 노동자가 은퇴 후 부부 해외여행을 계획하다니. 당시 우리의 형편과 비교할 때, 정말 꿈같은 얘기였다. 1960년대 후반, 유럽은 산업사회의 절정에서 보편적 복지국가를 이미 구가하고 있었다.

  V.
당초 나는 일을 끝내고 회장님을 찾아뵈려고 생각했다. 일도 시작하기도 전에 그를 찾아갔다가 혹 그가 내가 원치 않는 호의를 베풀고 나서면 어쩔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런데 공장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다섯 주 째 되던 어느 날, 우리 작업장 너구리 반장이 심각한 얼굴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귓속말로 “웬일이야, 우리 최고 보스가 자네를 찾으니” 하는 게 아닌가.

반장은 자기 차로 나를 회장실로 안내하며, 흥분된 어조로 도대체 왜 그가 나를 찾는지 계속 캐물었다. 내가 모르겠다고 대답하니 그럴 리가 없다며 연상 다그쳤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혹 작업장 근로조건이 어떠냐고 물으시면 꼭 좋게 말씀드려야 한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내가 만난 회장님은 지적이면서도 인품이 있어 보이는 좋은 인상의 신사였다. 그는 반갑게 나를 맞으며, 당신을 일찍 만나고 싶었는데 연락이 없어 뒤늦게 수소문해서 불러들였노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얘기를 풀어 놓았다.

그에 따르면, 현재 남한과 북한이 각각 큰 규모의 제철공장의 건립을 모색하는데, 모두 Voest에게 협력 요청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Voest는 형편상 두 곳을 다 도울 수는 없고 그 중 한 곳을 택해야 하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고심하고 있던 중, 내가 제 발로 찾아오겠다고 편지를 해서 나 만나기를 학수고대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내게서 아무 연락이 없어 방학 중 아르바이트를 포기했거니 생각하고, 그 동안 서울과 평양을 급히 다녀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쪽도 썩 내키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고심 중인데, 혹시 당신이 이미 와서 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어제부터 당신을 찾아 나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당신은 공부하는 젊은이이니 신뢰가 간다며, 허심탄회하게 얘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와 한 시간 너머 대화를 나눴다. 그는 그때 그가 이미 평양에 대해서는 정나미가 떨어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가 말했던 일화 중 하나는, 평양의 큰 광장 옆에 한 호텔에 머물었는데 아침에 나팔소리가 한번 나니 순식간에 그 광장이 꽉 찰 정도의 많은 군중이 질서정연하게 도열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도 나치 시대를 경험했는데 나치의 동원능력은 김일성에 비하면 어린아이 수준이라고 말했다. 내가 느끼기에는, 대체로 북한은 그의 마음에서 이미 제외된 듯 했고, 이제 남한을 파트너로 삼을 것인가 여부로 저울질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는 한국의 정치정세가 불안해서 꺼려진다는 얘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박정희 정부가 권위주의 정권인 것은 사실이지만, 정부의 산업화 의지가 강렬하고 국민의 수준이 높아서 Voest가 기술과 재정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면 빠른 시간 내에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릴 것이라고 열심히 설명했다. 그는 시종 진지한 얼굴로 경청하며, 간혹 질문을 던졌다. 그 중 기억이 나는 것이, 한국의 젊은이는 대체로 정권에 저항하는 입장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당신이 정부가 추진하는 사업에 우호적인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나는 나 자신도 체제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크지만, 이 사업은 정권 차원보다는 국가적, 국민적 사업이고 이 일이 한국산업화의 동력을 마련하는데 필요불가결한 사업이라 그렇다고 답하면서, 간곡하게 도움을 청했다. 끝내 그는 결정적인 언급을 피했다. 다만 매우 유익한 만남이었다고 말하며 작별을 고했다. 회장실을 나오는데 긴장했던 탓인지, 내 손안에 땀이 흠뻑 고였 있었다.

그 이듬해인 1968년 포항제철은 고고의 성을 울렸고, 이후 포철이 제 궤도에 오르기까지, 또 그 이후 발전과정에서도 Voest의 큰 도움을 받았다. Voest가 한국을 파트너로 선택하는데 나와 회장님과의 대화가 얼마나 보탬이 되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20대 후반의 젊은이가, 매우 중요한 시기에, 세계적인 제철회사의 CEO와 만나 내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면서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는 것은 나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다.

 

 


'자전적 에세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년 정치마니아 I  (0) 2010.11.07
한 여름 제철공장의 추억 II  (1) 2010.10.12
나도 모르게 한 배를 탔던 많은 이들  (0) 2010.09.05
학자로 산 지난 40년  (0) 2010.09.03
학자로 가는 길목  (0) 2010.09.0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