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전적 에세이

소년 정치마니아 I

2010. 11. 7. by 현강

I.
어떤 이는 세 살, 네 살 때 일도 제법 많은 것을 기억한다고 한다. 그런데 내 뇌리에 각인된 최초의 기억은 다섯 살 때이다. 해방 다음날 군중이 환호하며 거리로 몰려 나가던 장면이 그것이다. 그 기억이 의외로 선명한 것을 보면, 그 역사적인 순간이 내게도 꽤 인상적이었던 게 틀림없다. 이렇듯, 내 인생의 첫 기억은 해방이라는 정치적 사건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정치에 대해 비상한 관심과 흥미를 가졌다. 그래서 어른 들이 정치 이야기를 하면 언제나 귀를 종긋 세웠고, 자주 끼어들어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끈질기게 묻곤 했다. 신문을 읽기 시작한 이후 내 눈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면은 정치면이었고, 특히 정치칼럼을 열독했다.

그런데 나는 정치를 관전(觀戰)하고, 분석, 평가하는 데 관심을 가졌으나, 커서 직접 정치를 하거나 정치권에 다가 갈 꿈은 전혀 꾸지 않았다. 말하자면 정치 구경은 즐겼으나, 스스로 ‘꾼’이 될 생각은 없었다는 얘기다.

아래 글은 내가 열 살 전후 소년시절, 정치에 흠뻑 빠졌던 얘기다.

II.
내가 아홉 살 때인 1949년 6월 28일 김구 선생이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백범일지>를 읽어 그 분의 애국충정에 크게 감동을 받았던 나에게 이 사건은 더 할 수 없이 큰 충격이었다. 사건 자체도 통분할 일인데, 하필 살해자가 나와 같은 안(安)씨라는 사실에 무척이나 화가 났던 기억이다.

나는 어머니께 조문을 가야겠다고 떼를 썼다. 내 성황에 못 이겨 어머님이 서대문 경교장으로 나를 데리고 가 주셨다. 길게 늘어선 조문객 들 틈에서 한참을 기다려 선생 영정에 넙죽 절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모자라 며칠 후 동대문 운동장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참석하겠다고 어른을 졸라 댔다. 장례식 당일 하도 사람들이 많이 몰려 식장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대신 아버지 친구 댁인 종로 6가 <동원당 약국> 2층 창문에서 장례행렬을 눈으로 따라갔다. 오열 속에 이어지는 장례 행렬을 보면서 나도 함께 울었다. 그날 약국 주인이신 고 선생께서 “너, 어린놈이 정치에 그렇게 관심이 많다며?” 하셔서 내가 부끄러워 아버지 뒤에 숨었던 기억이 난다.

III.
열 살 되던 1950년 해방 후 두 번째 선거인 <5.30 선거>가 있었다. 나는 성북 선거구인 돈암동에 살었는데, 당대의 거물 정치인 조소앙과 조병옥의 맞대결로 전국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조소앙은 한국독립당 대표로서 단정수립에 반대하고 김구 등과 남북협상에 참가했던 중도계열이었다. 이에 반해, 조병옥은 미군정청 경무부장 출신으로 해방 후 치안유지와 공산당 색출에 앞장섰던 한민당계 보수정치인이었다.

당시 나는 조소앙의 광팬이었다. 그의 이념에 공감하기 보다는 그가 풍기는 지사(志士)형 분위기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올곧은 선비의 인상이었고, 우리 민족의 꿈과 희망을 이야기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느꼈다. 조소앙 후보가 가난하고 관권에 핍박을 받는다는 항간의 소문도 그에게 연민을 느끼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유세장을 열심히 쫓아다녔다. 멀리 정릉, 성북동까지 원정을 갔었다. 사람이 운집해서 연사가 잘 보이지 않으면, 남의 자전거 뒷좌석에 올라가 무례하게 자전거 주인의 어깨를 짚고 어른들 머리 너머로 정견을 듣곤 했다. 조소앙의 연설은 지성적이고 격조가 있었다. 정견발표 첫 마디에 항상 함께 입후보한 일곱 명의 후보자를 ‘북두칠성’에 비유하며 그들 모두에게 존경과 사랑을 전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조병옥은 보다 직설적이고 공격적이었다. 그의 솔직하고 결의에 찬 모습이 사나이답다고 생각했으나 마음이 끌리지는 않았다. 두 사람의 소견발표가 끝나면 군중이 썰물처럼 빠져 나가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선거전이 한창 절정을 향해 달렸던 5월 20일 경, 내가 엄청난 사고를 쳤다. 옆집 아이와 장난을 치다가 드럼통에서 떨어져 관자노리를 뾰족한 돌 모서리에 찌었다. 동맥이 끊어져 피가 낭자했다. 당시 서울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종로 화신 옆 김하등 외과에서 큰 수술을 받고 열흘 가까이 입원했다. 어른들은 그 때 빨리 손을 쓰지 않았으면 내가 죽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수술 후 입원실 침대에 누어서도 모든 관심을 선거에 쏟았다. 라디오를 귀에서 떼지 않았고, 사람만 보면 선거 추세와 성북구 선거 전망을 묻곤 했다. 당시 전국의 선거 열기는 무척 높았다. 1948년 <5. 10 선거> 때 불참했던 남북협상파와 중립계가 대거 참여한 것도 선거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내가 입원했던 병원의 김하등 원장님은 ‘종로 갑’ 에 출마한 박순천 여사의 열렬한 지지자이셨다. 그래서 한글을 모르는 그 댁 가정부에게 박여사의 기호를 주입시키려고 애쓰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행이 선거 전날 퇴원해서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선거당일의 현지 분위기를 가까이서 체험할 수 있었다.

결과는 조소앙 선생의 압승으로 끝났다. 그가 3만 여 표로 전국 최고득표를 했고 조병옥 박사는 1만 여 표밖에 얻지 못했다. 나는 환호, 작약했고 며칠 동안 신이 나서 그 얘기만 화제에 올렸다.

IV.
그 후 한 달도 못되어 6,25 전쟁이 터졌다. 1950년 6월 27일 우리 집 지하실에서 온 식구가 밤을 지새웠다. 밤새 포화소리가 가까이서 들렸고, 공포와 불안감 때문에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새벽녘이 돼서야 주위가 잠잠해 졌다. 아침에 조심스레 대문을 열고 나가 보니 이미 인민군이 진주에 있었다. 까맣게 그을은 앳된 얼굴의 소년병을 보고 놀랐다. 열여섯이나 되었을까. 따발총이 꽤나 무거워 보였다.

북한 치하에서 약 보름을 지내고 우리 가족은 7월 중순 어느 날 새벽, 몰래 서울을 떠났다. 후에 안 일이지만 집안 성향으로 보아 공산치하에서 무사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에서 그랬던 것이다. 이후 평택 외가에서 9.28 서울 수복 때까지 석 달을 지냈다. 평택 읍에서 30리나 떨어진 외진 시골마을이어서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얼마간 벗어난 곳이었다. 그러나 한, 두 번 빨간 완장을 찬 군 인민위원회 요원이 동네를 다녀갔고, 로동신문이 한번, 당 선전물이 몇 번 배포되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 가족은 그곳에서 숨죽이며 석 달을 보냈다.

그곳에서도 나의 관심은 온통 정치에 있었다. 정보는 거의 차단되었고 부모님이나 외가 친지들도 정치 얘기는 금기시했기 때문에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면도도 안하시고 조용히 방에 들어 앉아계시던 아버지에게 계속 질문을 퍼 부었다. 물음의 요지는 남, 북한 중 어느 쪽이 더 정의로운 세력이냐 하는 것과 전쟁은 어느 편이 이길 것 같으냐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웃으시며 내 손만 잡으실 뿐, 아무 대답이 없으셨다. 나는 그럴수록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외갓집에 배포된 로동신문을 너덜너덜해 질 때까지 수없이 읽었다. 대전 함락을 알리는 대문짝만한 헤드라인과 탱크를 앞세우고 진격하는 인민군의 사진이 아직도 뇌리에 선명하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