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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아우토스톱>(Autostopp)의 추억

2012. 12. 1. by 현강

                               I.

   <아우토스톱>은 독일어로 ‘차’(Auto)와 ‘멈춰!’(Stopp)의 합성어다. 말하자면 남의 차를 세워 편승하는 것을 말한다. 영어 'hitchhiking'과 같은 말이다. 흔히 젊은이들이 여름 철 여행할 때 돈을 아끼려고 많이 쓰는 방법인데, 1960년대 후반 내가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할 때도 그곳 대학생 사이에 크게 유행했다. 나도 1966-1968년간 여러 차례 <아우토스톱>을 통해 이웃 나라 여행을 했는데, 그와 얽힌 얘기가 적지 않다.

 

                            II.

   1966년 초, 베르린에서 언론학을 공부하던 친구 L군이 빈(Wien)으로 나를 찾아 왔다. 외국생활 석 달 만에 가까운 친구를 만나니 무척 반가웠다. 사흘째 되는 날, L군이 내게 잘쯔부르크를 함께 놀러 가자고 청했다. 그러면서 함께 <아우토스톱>을 시도해 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L군은 전부터 그래 보고 싶었으나 혼자는 엄두가 나지 않아 망설여 왔는데, 둘이면 한번 해볼 만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선뜻 그러자고 응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고속도로 진입로로 나갔다. 한 겨울이었는데도 이미 대, 여섯 명의 젊은이들이 도로 연변에 줄지어 서서 연상 지나가는 차에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리도 그 사이에 끼어 다가오는 차들에게 손을 내저으며 편승을 청했다. 그러나 모든 차들이 우리를 전혀 개의치 않고 그냥 지나쳐 달려갔다. 추운 가운데 한 시간 가량 버티며 고생을 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또 별로 성공할 것 같지도 않아, 마음을 접고 시내로 되돌아 왔다. 그날 오후 잘쯔부르크 행 기차를 탔는데 기차 값이 한국에 비해 엄청나게 비쌌다. 가난한 유학생에게는 기차여행이 무리하다는 생각을 다시 확인했다.

 

   그런데 유럽 체제 1년 쯤 되어 그곳 생활에 얼마간 익숙해지고, 독일어도 조금 된다 싶으니, 그간 잊고 지냈던 <아우토스톱>의 유혹이 가끔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돈 적게 들이고 견문도 넓힐 겸 외국여행을 하자면 그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느꼈다. 내가 비교적 염치심이 있는 사람인데, 왜 그 때 그렇게 ‘공짜’ 생각이 났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몇몇 한국인 선배들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한결같이 “망신스럽게 어떻게 길가에서 차를 세워! 노랑퉁이가 그러면 더 눈에 뜨여. 아예 생각도 말게”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나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바로 이웃인 독일, 스위스 등지의 몇몇 대학도시들에 가보고 싶은 열망이 컸다. 그곳에 가서 그들 대학의 연구실, 도서관들도 찾아보고 학풍과 연구경향도 살펴보고, 지인들도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1966년 말 혼자 제2차 시도를 감행했다.

 

   초겨울 어느 날, 나는 첫 행선지를 빈에서 약 800Km 떨어진 독일 하이델베르크로 잡고, 아침 8시경 고속도로 진입로로 나갔다. 한참 기다릴 각오를 하고 옷도 두툼하게 입고 방한모도 썼다. 짐은 간단히 배낭에 꾸렸다. 그런데 웬걸 재수가 좋으려니 저 만치 첫 번째 다가오던 차가 미끄러지듯 스르르 내 앞에 서는 게 아닌가. 40대초의 인상 좋은 운전자가 차 창문을 내리고 내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내가 하이델베르크라고 답하니까, 그는 “아니 세상에 이런 일이!”하면서, 자기도 하이델베르크로 가는 길이라고 반겼다. 내가 태워줘 고맙다고 하니, 그는 먼 길의 무료를 달랠 대화 친구를 만났으니 오히려 자기가 운이 좋았다며 껄껄 웃었다. 무척이나 유쾌한 사람이었다. 긴 여행길에서 주로 그가 대화를 이끌었고, 나는 가끔 한마디 씩 거들었다. 그러다 보니 이른 저녁 시간에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했다. 이렇게 첫 번째 <아우토스톱>은 예상외로 쉽게 이루어졌다.

 

                                          III.

  이후 나는 얼마간 자신이 생겨 1967년, 68년 간 일곱 번이나 <아우토스톱>으로 긴 이웃 나라 여행을 했다. 숙박은 언제나 유스호스텔을 이용했다. 계절도 가리지 않고 시간이 나면 어깨에 배낭하나 걸머지고 길을 나섰다. 그렇게 경험을 쌓으면서 <아우토스톱>을 잘하려면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지, 어느 지점, 어느 시점에 차를 잡는 게 유리한지, 어떤 경우 더 기다려야 하고, 어떤 경우 일찍 포기해야 하는지 등 나름대로 <아우토스톱>의 기본적인 노하우를 터득했다.

 

    세 번째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늦은 봄, 그 날 봄빛이 유난히 따스했다. 이른 시간에 잘쯔부르크에서 빈으로 향하는 고속도로 연변에 나갔다. 거기서 역시 <아우토스톱>을 위해 연도에 서있던 내 나이 또래의 일본인 젊은이를 만났다. 모자, 배낭, 팔뚝에 온통 일장기를 수놓아 첫 눈에 일본인인 줄 알았다. 그는 내게 다가와 자신은 함부르크 대학에 유학중인 학생인데 <아우토스톱>으로 유럽 곳곳을 여행한다고 떠벌렸다. 그러면서 한몫에 두 명 태우기를 꺼리는 운전자가 많으니, 차가 멈춰서면 우선 나부터 타라며, 크게 선심 쓰는 시늉을 했다. 내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자, 그는 팔뚝에 일장기를 자랑스럽게 가리키면서 자기는 언제라도 차를 잡을 수 있으니 걱정 말고 나부터 먼저 타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 시절 전후 일본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으로 유럽의 일본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고, 특히 독일이 제2차 대전 중 일본과 손을 잡았었기에 독일어권 국민들의 일본에 대한 친화감이 남달랐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친구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속이 뒤틀리고 부화가 났다. 그래서, “천만에, 자네가 먼저 왔으니 당연히 자네가 먼저 타야지”하고는 그와 거리를 두고 저만치 가서 섰다. 그러면서 ‘국력’의 차이가 뼈저리게 느껴져 마음이 아렸다.

 

   바로 그 순간 내가 그동안 <아우토스톱>을 비교적 잘 해 온 것도, 나를 태워준 운전자들이 나를 일본인으로 착각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움이 크게 치솟으면서, 이제껏 그 사실에 둔감했던 나 자신이 꽤나 원망스러웠다. 돌이켜 보니, 그간 나를 태워준 운전자들 중 몇 사람의 첫 질문이, “당신 일본인이지오”였었다. 그럴 때면 나는 무심히 ‘아닙니다. 한국인입니다“라고 대답했는데, 그러면서 내가 일본인이기를 기대했던 그들의 속내를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것이다.

 

  그날 그 일본 청년을 미리 보내고, 요행이 얼마 안가 나도 차를 탈 수 있었다. 내가 옆 좌석에 앉아 마자, 그 운전자의 첫 질문도 “당신 일본인이지오”였다. 내 대답도 역시 예의 “아닙니다. 한국인입니다”였다. 그러면서 힐끗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그리고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나도 할 말을 잊었다. 그 때 나는 다시 치밀어 오르는 곤혹감과 수치심, 자책과 분노 때문에 그냥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러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제 <아우토스톱>을 그만 둘까, 아니면?”

 

                                           VI

   <아우토스톱>을 그만 두는 것은 실제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런 수모를 느끼면서 구태여 거기 집착해야 할 절박감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뭔가 내가 패배 내지 좌초하는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자문했다. 혹시 이 상황에서 한국인의 자긍심을 지키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방도는 없을까.

 

  잠시 후 나는 침묵을 깨고 먼저 운전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면서 대화를 유도했다. 그도 마지못해 응대했다. 이후 나는 계속 대화 속으로 그를 끌어당기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주도했다. 그러면서 내가 평균적 유럽인과 비교할 때, 언어능력은 떨어지지만 지적으로 훨씬 앞서고 있고,  비교론적 시각에서 유럽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들의 통상적 생각을 뛰어 넘는 자신만의 관점을 갖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에게 일깨웠다. 더욱이 나는 비교적 유럽 역사에 정통하고, 그들의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에 관심이 크기 때문에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지적 토론을 통해 그들의 인식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내 운전자는 튜빙겐 대학에서 생리학을 전공하는 젊은 조교수였다. 그가 한국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 시작하기에, 나는 간략이 대답하고 주제를 의도적으로 유럽으로 옮겼다. 우선 그가 근무한다는 튜빙겐 대학의 역사, 학풍, 그곳 출신의 큰 학자들에 면면을 얘기했더니 크게 놀라는 기색이었다. 이어 나는 당시 서독의 외무장관이던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Ostpolitik), 유럽공동체(EC)의 앞날 등으로 주제를 옮겨가며, 유럽차원의 주요 쟁점에 대해 대화에 불을 붙였다. 그도 점차 흥미를 갖고 논의에 참여했고, 함께 펼치는 지적 대화를 크게 즐겼다. 그는 특히 내가 주제마다 그 역사적 경과를 숙지하고 있는데 감탄했다. 그러다 보니 네 시간이 훌쩍 지났다. 작별에 앞서 그는 내게 매우 많이 배웠다고 치하하며, 튜빙겐으로 나를 정중히 초대했다.  나는 고마움을 표하며  초대에 응할 수 없는 내 사정을 얘기했던 기억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그날 내 접근 방식은 성공적이었다고 느껴졌다. 나는 이제껏 남의 차에 공짜로 편승하면서 언제나 소극적 참여자였다. 운전자의 말을 경청하고, 간혹 그가 물으면 간략히 대답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내가 주제를 설정하고,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두 사람간의 소통과 교감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면서 한국인의 자긍심을 지키면서 그 유능성도 한껏 펼쳐 보였다. 그리고 보니 내가 아무런 반대급부 없이 남의 차에 그냥 편승한 게 아니라, 무언가 내 몫을 톡톡히 한 느낌이었다. 또한  일본 청년처럼 나라 덕을 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내 나라에 누를 끼치지는 않고, 그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얼마간 우호적인 쪽으로 바꿔 놓았으리라는 생각을 하니 기뻤다.

 

                                       V

   이후 나는 <아우토스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여러 나라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만나며, 정보교류와  소통의 즐거움을 익혔고 견문도 넓혔다. 눈과 귀가 크게 트이는 느낌이었다. 또 그 바람에 독일어도 많이 숙달되었다. 대화도 운전자에 수준과 선호에 맞춰 다양하게 옮겨 갔고, 언제나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독일인들은 비교적 정치토론을 즐겼고, 오스트리아인들은 정치나 경제보다는 예술과 문화에 관한 대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 쪽으로 대화를 이끌기도 했다. 그들은 너나없이 자기 나라 스포츠 영웅들의 얘기가 나오면 신나서 떠들어 댔다. 당시 독일인들은 축구신예 베켄바우어(Franz Beckenbauer)에 홀딱 반해 있었고,  오스트리아인들은 스키 황제 슈란쯔(Karl Schranz)에 열광했다.  나도 그들을 좋아해  숱한 일화를 알고 있었기에 서로 맞장구를 치며 즐겁게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당연히 한국도 대화 주제로 자주 등장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들이 한국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전쟁의 참화를 겪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라는 어두운 기억이 전부였다. 나는 한국이 고유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나라이며 뛰어난 발전 잠재력을 가진 나라라는 것을 많이 강조했다. 길지 않은 대화 속에서 과장이나 거짓 없이 한국을 인상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어떤 얘기를 하는 게 좋을지 많이 고민하고, 그를 위해 나름대로 적지 않은 노력을 경주했다.

  재미있는 일은 대화 중 내가 유럽의 역사 속 연대(年代)와 연도(年度)를  잘 외우는 것을 그들은 무척 신기하게 여겼다. 그래서 내가 고등학교 때 열심히 익힌 탓이라고 답하면, 어떻게 지구 저편에 있는 나라에서 서양사를 그렇게 소상하게 가르치냐고 묻곤 했다. 그럴때면 나는 속으로 그게 한국 특유의 주입식 교육의 알량한 성과이려니  생각하고 혼자 웃었다.

 

  되돌아 보면 나는 순전히 내 현실적 필요에 의해 <아우토스톱>을 시작했으나, 그것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내 유럽 체험을 보다 다양하고 풍성하게 만들었고, 그것이 내 유럽 사회에 대한 심층적 이해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나를 태워주었던  몇몇 운전자와는 운전자와 편승자의 관계로 시작해서, 지적 대화의 상대로, 그리고 좋은 친구로 발전하기도 했다.  당시 가난한 한국 유학생들 중 많은 이가 유학한 나라 밖을 거의 나가보지도 못하고 공부가 끝나자 마자 귀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나는 <아우토스톱> 덕택에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유서깊은 많은 명문 대학도 두루 찾아 볼 수 있었다.

 

   근 반세기 전, 긴 세월 저 너머의 일이, 마치 어제 일인 듯 낭만적인 추억으로 다가온다. 그 옛날 석양녘 뮌헨의 고속도로 연변에서 손을 흔들며 차를 기다리던 그 홍안의 청년이 그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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