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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1978년 겨울, 파리 (II)

2014. 1. 23. by 현강

                                         I.

   1978년 겨울, 파리에서의 세 번째 날, 나는 호텔에서 백영수 화백의 전시회 소식을 들었다. 백영수(白榮洙, 1922-) 화백은 한국 추상회화의 선구자 중의 한분으로, 이미 한국동란 직후인 1950년대에 김환기, 이중섭, 유영국, 이규상, 장욱진 등과 함께 ‘신사실파’ 동인으로 활동했던 분이다. 나는 신사실파 화가들, 한분 한분을 한결같이 좋아했다. 백영수 화백은 단순하고 절제된 화면, 중간색의 깊이 있는 색조를 바탕으로 고개 갸우뚱한 모자상(母子像)을 즐겨 그렸다. 그는 모자(母子)외에도 남자아이, 꽃잎, 새, 나무, 개, 창문 등 향토적이고, 서정적인 소재들을 바탕으로 티 없이 맑은 순수 동심의 세계를 화폭에 담백하게 담았다. 백영수의 그림에는 늘 애잔한 그리움과 향수가 잔잔히 흘러. 평소에 나는 그를 장욱진과 더불어 한국 화단의 대표 ‘서정시인’이라고 여겼다. 특히 백영수 화백은 어린이 잡지에 삽화를 자주 그려, 내겐 어려서부터 꽤나 친근한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와 그의 작품을 이 겨울 파리에서 만날 수 있다니. 우선 반가웠다.

 

                                         II.

   그날 나는 백영수 개인전을 찾았다. 그가 1977년 파리에 온 후 처음 여는 전시회였는데 반향이 무척 좋았다. 전시된 작품 중 많은 것에 이미 팔렸다는 쪽지가 붙어 있었다. 나는 원래 그림을 무척 좋아하지만, 주머니 사정 때문에 그 때까지 유명작가의 그림을 산다는 것은 엄감생심 꿈도 꾸지 못해왔다. 그런데 그 날 얼마간 촌놈 파리 여행의 객기도 작용해서 남아 있는 서너 작품 중에서 큰맘 먹고 마음에 드는 소품 한 점을 골랐다.

   같은 날 저녁 호텔 지하 바에서 백영수 화백님을 만났다. 첫눈에 백 화백의 모습이 그의 작품의 두드러진 특징, 즉 우려낸 순수성과 깊이 삭힌 중간색을 그대로 닮았다고 생각했다. 흰 얼굴, 단정하고 맑은 인상, 유현한 분위기, 인간미 넘치는 잔잔한 미소가 청솔위에 좌정하고 있는 한 마리의 학을 연상시켰다. 한마디로 선비풍의 초로의 어른이셨다. 처음 뵈면서 이처럼 세속의 때묻지 않은 분이 이국만리 남의 나라에서 어떻게 견뎌 내실까 하는 괜한 노파심이 일었다. 그러나 말씀을 나누면서, 이 분의 내공과 경륜이 감지되었고, 그의 명상적 내면세계가 백 화백의 독창적인 예술세계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III.

   그날 밤, 백 화백은 호텔 지하 바에서 조각가 문신(文信, 1923-1995)씨를 내게 소개했다. 문신은 내게 생소한 이름이었는데, 첫인상이 무척 강렬했다. 갈색 얼굴에 짙은 눈섭, 움푹 파인 눈, 서양인을 닮은 크고 오뚝한 코, 꽉 다문 입이 결연한 의지를 지닌 투사를 연상시키는 분이었다. 일견해서 투신형, 몰입형의 예술가임을 직감했다. 이미 1961년부터 파리에 머문다는 문신은 그의 역동적인 인상에도 불구하고, 오랜 외국생활에서 얼마간 지친 모습이었다.

 

   얼마 후, 백 화백은 자리를 떴고 나와 문신만 남았다. 나는 늦은 시간까지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한발, 한발 그의 오묘한 예술세계에 빠져 들어갔다. 그러면서 그가 놀라운 열정과 비범한 재능을 지닌 걸출한 예술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정이 가까워 질 무렵, 문신은 불현듯 내게 “안 교수, 제 아트리에로 갑시다. 제 작품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라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두말없이 그를 따라 나섰다.

   자정 무렵, 불빛이 점멸하는 파리의 겨울거리는 무척 아름다웠다. 시내를 빠져나와 교외로 한참을 가서야 그의 아트리에가 있었다. 문신이 아트리에 불을 켜자, 한쪽 구석 소파에 누어자고 있던 웬 사람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문신은 “하형, 미안합니다. 제가 계신 걸 깜박 했습니다”라며 어리둥절하는 그에게 나를 소개했다. 그는 화가 하인두 (河麟斗, 1930-1989)였다. 나는 독창적 추상표현주의 화가 하인두를 이미 작품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기에 반갑게 인사했다. 하인두는 당시 파리에 머물면서 문신의 아트리에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던 듯 했다.

 

   비교적 넓은 공간의 아트리에에는 그의 조각작품 외에도 드로잉, 회화, 도자기, 석고원형 등이 여기 저기 널려 있었다. 나는 비상한 관심을 갖고 그의 작품을 한점 한점 감상했다. 브론즈, 금속 등도 있었지만 흑단(黑檀)과 주목을 깎아 만든 작품이 많다는 것이 특이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작품들이 하나같이 원형, 반원, 타원 등의 기하학적 형태와 좌우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기하학적 구성과 추상적 구조에도 불구하고, 그의 조각 작품 속에는 자연과 유기체의 고유의 속성인 조화와 균형, 그리고 생명감이 깃들어 있었다. 나는 그의 작품에 접하며, 예술의 대가들만이 표현할 수 있는 높은 예술적 경지에 이르렀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한 작품 앞에 이르러 자신도 모르게 가벼운 탄성을 발했다. 타원형의 대칭구조를 이룬 중간크기의 흑단 작품인데, 내 눈에는 조형적 미학과 예술적 깊이가 절정에 이른 명품이었다.

   그러자 문신 조각가는 “역시 안목이 있으시군요. 제가 이 작업공간에서 제일 아끼는 작품입니다”라며, 그 조각품을 어루만졌다. 그러면서 그 작품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를 공개했다. 그와 가까운 프랑스의 저명한 여성 미술평론가 한 분이 그 작품에 매료되어, 문신에게 그것을 한 주일만 빌려 달라고 간청을 해서 1주간 무료로 대여한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그녀가 작품을 돌려주면서, “정말 행복한 일주일이었다”고 고마워했다는 것이었다.

 

   문신은 내가 그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데 대해, 무척 좋아했다. 그러면서 “정 마음에 드시면, 가져가시지요. 제가 크게 부담되지 않는 가격으로 드리겠습니다”라고 의외의 제안을 했다. 내가 놀라서, “말씀은 백번 고맙지만, 제 형편에 이런 명품이 걸맞지 않습니다. 그냥 오늘 감상한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라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랬더니, 그는 “작품들도 저마다 주인이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저 작품의 주인은 그 진가를 바로 알아보는 안교수입니다” 라며, 내게 그 작품의 구입을 권했다. 그 때, 그가 내게 제시했던 가격은 40만원이었다. 내게는 큰 돈이지만, 작품의 질과 예술적 가치를 감안할 때 무척 싼 값이었다. 끝내 내가 고사하자, “여행 중에 돈이 있으실 리 없지요. 일단 그냥 가져 가세요. 그리고 나중에 돈이 생기실 때 나누어 갚으세요.”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그 순간 나는 강한 구매욕을 느꼈다. 그러나 끝내 나는 그의 고마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처럼 그림 좋아하는 사람이, 감상에 앞서 소유에 욕심이 생기면 앞날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므로 내 분수를 맞게 처신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신은 못내 아쉬워하며, 자신이 아끼는 도로잉 두 점을 내게 선사했다.

 

                                         IV.

   1980년, 문신은 오랜 프랑스 시절을 뒤로 하고 영구 귀국하여 고향 마산에 정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현대화랑에서 귀국 전시회를 열었다. 나는 첫날 일찍 전시장을 찾았다. 마침 문신씨는 자리에 없었다. 그러나 전시장 한 가운데에 1년 여 전, 파리에서 온통 내 혼을 빼앗은 그 문제의 흑단 작품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나는 관계자에게 작품 가격을 문의했더니, 500만원이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작가가 특히 아끼는 작품입니다”라고 덧붙였다.

   귀국 후 문신의 작품 활동은 예나 다름없이 열정적으로 이어졌다. 올림픽 공원에 있는 25m 높이의 <올림픽 1988>도 서울 올림픽을 위해 그가 제작한 작품이다. 그는 1994년 고향에 평생 숙원이었던 문신미술관을 직접 건립하였으나, 아깝게 이듬해 1995년 지병으로 타개했다. 그의 미술관은 마산시에 기증되어 ‘마산시립미술관(2004)’으로 다시 개관하였고, 같은 해에 숙명여대내에 ‘문신미술관’이 새로 개관됐다.

 

 

 

    1978년 겨울, 파리의 문신 아트리에에서 한 순간, 우연히 스치듯 만났던 하인두 화백의 기억도 새롭다. 그 또한 한국 화단의 대표적 전위적 추상화가로서 그의 모든 작품 속에서 섬광처럼 예술혼이 번쩍이는 천재 화가였다. 전통미술과 불교적 세계관, 그리고 우주에 대한 연상을 바탕으로 화려한 원색을 절규하듯, 불꽃처럼 내뿜었던 그의 심오한 예술세계는 그가 마지막 병마와 싸우며 그렸던 ‘혼불-빛의 회오리 연작’에서 절정에 이른다. 나는 그 파리의 겨울 밤, 눈을 비비며 자리를 피해 주었던 그와 제대로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쉽다.

 

   한편, 백영수 화백은 34년의 오랜 파리생활을 접고 2011년 영구 귀국했다. 구순을 훌쩍 넘은 연세에도 불구하고,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산 증인으로, 아직도 예의 그 정갈한 모습으로 열정적으로 작품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모자상 시리즈’에 이어 ‘여백’, ‘창문’, 그리고 최근에는 ‘연꽃’에 이르기 까지 그의 작품 속에 현현하는 그윽한 명상의 정신세계가 세속에 찌든 중생들의 집착과 미망을 덜어내고 있다. ‘신사실파’의 망내 백영수는 이제 한국 미술계의 전설이 되었다,

 

 

 

                                         V.

   파리에서의 셋째 날 하루 밤 사이, 정확히는 그 겨울날 저녁부터 이튿날 이른 새벽 까지 내가 한국을 대표하는 전위적 추상작가 세 명을 파리에서 차례로 만났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경이롭다. 이후 나는 그들 누구와도 다시 만날 기회가 없었다. 두 분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났고, 한 분만 남았다. 그러나 그들 한명 한명은 그들의 작품들이 추구하는 세계와 더불어 내 가슴속에 오롯이 남아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시대에 앞서가던 선구적, 진취적 화가, 조각가였고, 강한 개성과 독창성, 자신의 우주를 지닌 빼어난 예술인이었다. 또한 그들의 작품 속에는 한국적 정서와 세계적 보편성이 함께 녹아 있어, 서울과 파리 모두에서 사랑을 받았다. 내가 그들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 한분 한분이 자신들의 미적 활동을 통하여 자연과 인생, 그리고 우주를 노래하는 진정한 시인이자 철학자였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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