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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적 에세이

'초등영어' 출범의 뒷 얘기

2014. 8. 26. by 현강

                                   I.

   2004년 4월, 에이펙 교육부장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칠레 산디아고에 가는 길에 나는 일본에 들려 가와지마 일본 문부과학상과 만났다. 교과서 문제 등 한일 간에 여러 가지 난제가 얽혀있었기에 소통을 위해 내가 나종일 주일대사에게 부탁해서 마련된 자리였다. 그런데 가와지마 장관은 나를 보자, 대뜸 “당신이 1997년에 한국에 초등영어 교육을 도입한 장본인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정말 대단한 일을 했다. 일본에서도 같은 시기에 초등영어 시행이 치열한 사회적 쟁점이었는데, 좌고우면하다가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뒤로 미뤘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초등영어를 도입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화 경쟁에서 크게 실기(失期)했다. 천추의 한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얘기를 들으며, 초등영어 출범 전후를 되돌아보았다. 우리는 1995년 이후, 1997년 3월을 목표로 초등영어 실시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초등영어 도입을 위해 막판 스퍼트를 하고 있었다. 준비 정도만 가지고 따진다면, 일본이 우리보다 한발 앞섰다. 그러나 워낙 세심하고, 조심스러운 일본이지라, 이리 살피고 저리 재다가 끝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시행을 연기했다. 당시 한국의 상황도 무척 복잡했다. 사회적 논란이 격화되면서 우려의 분위기가 팽배해서, 청와대, 당, 정 어디에서도 내 등을 떠미는 아무도 없었다. 당시 내 머리에서는 두 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하나는 “지금 미루면 자칫 아주 늦어질 텐데, 그 역사적 책임은 누가 감당할 것인가”라는 보다 근본적 우려와 다른 하나는 “이게 실패하면 오로지 내 책임이 될 터인데, 일단 한발 늦춰볼까”라는 기회주의적 생각이 그것이었다. 오랜 고뇌 끝에 얼마간 무리수인 줄 말면서도, 예정대로 1997년 첫 학기에 초등영어 교육을 시행한다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결단을 내렸다. 마지막 결심의 순간에 나는 무척 외롭고 힘들었다. 당시의 상황을 복기(復棋)한다.

 

                                   II

  우리나라에서 영어교육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1982년부터 초등학교 특별활동시간에 희망자 중심으로 영어교육을 실시하여 왔다. 그러는 가운데 초등영어교사연구협의회가 조직, 운영되는 등 영어교육에 대한 상당한 경험이 축적되었고, 해마다 특별활동 시간에 영어교육을 실시하는 학교가 늘어났다. 1992년부터 각 시. 도 교육청에서 교사 영어연수를 실시하여, 1995년 말을 기준으로 9,461명의 특활 영어교사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등학교에서 특별활동이나 방과 후 교육활동시간에 학생의 희망에 따라 영어교육을 실시하였으므로, 대다수 학생에게 교육의 혜택을 주지 못하였고, 영어교육에 대한 학부모와 학생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추진위원회가 1995년 2월 24일 대통령에게 세계화 추진을 위하여 외국어 교육의 강화 필요성을 보고했다. 특히 이미 세계어로 자리 잡고 있는 영어 교육을 초등학교에서 실시할 것을 강력히 건의하였다. 그러면서 지금까지의 단어, 문법 중심 외국어 교육으로부터 의사소통 중심의 교육으로의 일대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같은 해 3월 15일, 교육부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점진적으로 영어교육 실시계획>을 확정하였다.

 

  그런 가운데 1995년 5월 31일, 대통령 자문기구인 교육개혁위원회가 제 1차 교육개혁과제로 초등학교 영어교육 실시에 역점을 두어 외국어 교육의 강화를 대통령께 보고하였다. 교육부는 이제 초등영어 시행은 지상명령이라고 생각하고, 발 빠르게 대응했다. 같은 해 6월 27일 초등학교 영어 교육과정 최종시안을 작성하고, 이후 심도 있는 교육과정 심의를 거쳐 그해 11월 1일, 초등학교 교육과정 부분개정 고시를 하기에 이른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무난한 흐름이었다.

 

  참고로 1995년 당시 여론조사를 보면, 영어를 정규교과로 찬성하는 시민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비율이 증가추세에 있었다.

-코리아 리서치(‘95,2) : 정규교과로 찬성 68%

-한국교육개발원(‘95,5): 정규교과로 찬성 80%

 

  바로 그 무렵인 1995년 12월에 필자가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에 임명된다. 당시 대체적 여론은 초등영어 도입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실제 정책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이해관계 집단 및 여론주도 집단들의 입장은 보다 다양하고. 복잡했다. 그 때 이후 1997년 3월 초등학교 영어 교육이 실시하기까지, 사안의 중요성 때문에 주요 이해당사자인 교육부, 국회, 교육청, 학원, 출판사, 학부모 및 교육전문가 간에 매우 복잡하고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치열한 갈등과 공방, 그리고 설득과 조정이 거듭된다.

그런 와중에서도 1996년에 들어서자, 특별활동 영어교육 실시학교는 5,370교(전체의 95.2%)로 늘었고, 방과 후 상설 영어반 운영은 3,960교(전체의 70.2%)에 이르렀다.

 

                                           III.

  필자는 초등영어교육은 세계화 추세에 비추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1997년 3월부터 예정대로 실시해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1996년 중반에 접어들면서 초등 영어교육 실시 여부를 둘러싸고 사회적 논쟁이 격화되었고, 그해 후반 특히 10월경에는 그 갈등이 절정에 이른다.

  크게 보아 초등학교 영어교육의 도입을 반대하거나, 그 실시를 늦추자는 쪽은 민족주의적(내지 국수주의적) 성향이 강한 일부 국회의원 및 정치인을 비롯하여, 일부 언론, 일부 국어학계와 일부 학원 및 일부 교육계인사, 그리고 일부 학부모들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반대파와 유보파로 나뉜다. 반대파는 대체로 어려서부터 영어를 가르치면, 작금의 과도한 서양화, 미국화의 격류 속에서 우리말과 글, 그리고 우리 고유의 문화를 지키기가 더 어려워 질 것이라는 점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거기에는 반미정서도 한 몫을 했고, 그러다 보니 반대파 중에는 진보진영 인사들이 많았다. 한편 유보파는 초등영어 교육은 필요하나, 아직 준비가 충분치 못하므로 2, 3년 더 연기해야 마땅하다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또한 초등영어 실시가 가시권에 들어오면서, 조기영어 열풍이 몰아쳐서 학원가를 비롯하여 심지어는 일부 유치원에 까지 영어과외를 하는 등 그  부작용이 크다는 점을 지적하며, 학부모들의 사교육비 부담이 크게 늘고 있다는 점을 심각한 현실적 문제로 제기하고 나섰다.

  한편, 초등영어교육을 찬성하는 측은, 그 시행을 앞장서서 추진하는 교육부를 비롯하여 교육개혁위원회, 교육청 및 일선 교육계, 그리고 다수의 학부모, 그리고 세계화의 추세에 민감한 시민들이었다. 찬성 측의 논지는 세계화, 정보화 시대에 이미 국제공용어, 세계어가 되어버린 영어의 조기교육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입장을 피력하면서, 세계의 대부분의 국가들, 특히 모국어 사랑에 가장 앞장서는 프랑스조차도 이미 오래 전부터 초등학교에서 영어교육을 시작했고, 중국, 태국 등도 초등영어 교육을 시작했다는 점을 내세웠다. 그러나 발을 동동 구르는 교육부를 제외하면 대체로 찬성하는 측은 침묵하는 편이었고, 기껏 입을 열어도 무척 소극적이었다. 그러니 교육부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우군의 숫자가 많은데 그 세력이 조직화되어 있지 못했고, 오히려 언론 등에서는 반대와 유보의 입장만 강하게 부각시키는 형국이어서 계속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감에 따라 초등영어교육을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세력 중 적지 않은 수가 유보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다 보니 점차 <찬성 대 유보> 간의 대결양상이 두드러졌다. 유보하자는 쪽에서는 보다 착실히 준비해서 신중하게 영어교육을 시행하자며, 이를 반대하는 것은 명분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또한 교육부의 강행 태세는 신자유주의의 이념적 공세 내지 무분별한 성과주의라고 공격하며, 심지어는 조기 영어교육기관의 로비에 포획되었기 때문이라는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국회 교육위원회의 김한길, 이수인, 정희경 등 몇몇 의원들의 반대는 매우 치열했다. 특히 초등영어 도입을 앞장서서 반대했던 김한길 의원은 당시 그의 교육위원회 질의의 대부분을 초등영어반대에 할애하면서, 유아영어교육의 실태, 교육일선의 준비부족, 교재의 졸속제작 우려 등의 문제점을 고발하는데 앞장을 섰고, 그것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곤 했다.

 

  장관인 필자는 교육부는 초등영어 교육 실시를 위한 준비가 충분치 않은 게 사실이나, 한, 두해 늦춘다고 그것이 완벽해 질 수 없을뿐더러, 마침 그것이 교육개혁위윈회의 교육개혁방안으로 크게 부각되어 한창 많은 이의 기대와 관심을 모으고 있는 현시점에서 초등영어를 출범시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자칫 이 모멘텀을 잃으면, 앞으로 몇 년이 늦춰질지 모른다는 걱정을  했다. 무엇보다 필자는 초등영어 교육을 더 늦추는 경우, 도시와 농촌 및 빈. 부 학생 간의 영어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라는 점을 크게 우려했다. 조기영어교육 열풍이 이미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크게 일고 있는 상황에서, 거의 모든 도시 중산층 자제들은 이미 사설 학원이나 개인 과외 등을 통해 어려서부터 영어를 익히고 있었다. 반면 농. 어촌 및 도시 빈곤층 자제들은 중학교에 입학할 때 까지 영어 공부를 할 기회가 거의 없는 것이 눈 앞에 펼쳐지는 차디찬 현실이었다. 그러다 보니 중학교 입학 후 두 그룹 간의 영어능력 격차가 지나치게 벌어지게 되고, 그 부정적 영향력이 이후의 학업 및 대입과정, 그리고 멀리는 사회생활에 까지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따라서 나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모든 학생들에게 영어의 학습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분명 이 격차를 줄이는데 크게 도움이 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초등영어 실시를 둘러싼 논쟁은 날이 갈수록 가열되었다. 개중에는 준비가 잘 된 대도시부터 초등영어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도 개진되었다. 교육부는, 그렇게 되는 경우, 이미 벌어진 도농 간의 조기영어교육 격차가 더 벌어진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를 분명히 했다. 그런 가운데, 새로 취임한 유인종 서울시 교육감이 초등영어교육 반대 의사를 피력하여 물의를 일으켰고, 몇몇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정치인, 교육계 인사들도 공공연히 초등영어 도입 반대 의견을 개진했다. 교육개발원 보고서에서도 유보 쪽을 지지하는 글이 발표되는 등, 자중지란이 일어나 혼선을 빚기도 했다.

 

  초등영어 도입 쟁점이 사회적으로 점화되면서, 교육부의 기대와 달리, 반대 내지 유보 의견이 갑자기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교육부와 일선 교육계는 초등영어 교육 준비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온 정성을 쏟았다. 하지만 상황은 오히려 더 불리해 졌다. 당초 초등학교 영어교육을 위해 전국 5천 9백여개 초등학교 중, 3학년 학급 수가 10개 이상인 2백 41개 학교에 한하여 영어 전담교사를 배치하려는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관계부처인 총무처, 재경원과의 협의과정에서 교원증원과 예산문제 등에 차질이 생겨 결국 담임교사담당제로 기존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그 충격은 컸다. 교육부의 체면 손상은 고사하고, 이는 프로그램의 실효성 차원에서 매우 우려되는 일이었다.

 

  이처럼 불리한 흐름에도 불구하고 교육부는 수시로 초등영어 준비상황을 점검하고, 무엇보다 초등학교 교사연수에 힘을 모았다. 그러면서 우리보다 한해 앞서, 즉  ‘96년부터 이미 시행 중인 태국의 초등영어교육의 진행과정과 그곳 여론에 추이를 촉각을 곤두세웠다. 당시 정태동 주태국대사가 수시로 상황변화를 알려 주며 유익한 조언을 했다. 태국의 경우, 초등영어 출범 준비가 우리보다 훨씬 허술했는데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국민적 반응은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 소식에 우리는 매우 고무되었다. 반면 그동안 초등영어 실시를 위해 우리 보다 더 장기간, 그리고 더 치밀하게 준비해 왔던 일본이 끝내 도입을 유보한다는 소식을 접할 때는 심경이 매우 착잡했다.

 

                                       III.

  1996년 10월로 접어면서 나는 시행시기에 대해 마지막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초등영어 출범 시기를 늦추자는 여론이 오히려 증폭되는 분위기였고, 청와대나 당. 정 모두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민감했다. 이수성 총리와 청와대 박세일 수석은 내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그 결정을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그런 가운데 이 총리는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게 어떻겠냐는 말도 덧붙였다. 우회적으로 유보 선호를 내 비친 것이었다. 이영탁 차관과도 의견을 나눴다. 그도 연기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주위가 이러니 나도 내심 흔들렸다. 여차직하면 1년 연장하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서서히 고개를 드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김정기 비서관이 흔들리는 내 마음을 읽었다. 그는 시행을 불과 5개월 앞두고 초등영어 실시를 미루는 경우, 그간 장관만을 믿고 오랜 기간 동안 열정과 헌신을 다해 각고의 노력을 해 온 일선 교육현장에 일대 패닉 현상이 일어날 것이고, 교육부에 대해 엄청난 불신을 불러올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며 펼쩍 뛰었다. 나는 부하의 직언에 움찔하면서도 “흔들리긴 누가 흔들린다는 말이냐”고 태연한 척했다. 그런데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만약 1년을 늦추면 그 사이 대통령 선거가 있는데, 차기 정권이 과연 초등영어를 도입할지, 그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내가 일신의 편안을 위해 ‘유보’를 선언하고, 이 수렁에서 빠져 나간다면, 나는 끝내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며칠 잠을 설쳤다. 결국 혼자 남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말 못할 외로움이 엄습했다. 깊은 고민 끝에 마지막으로 준비상활을 총점검 해보고, ‘쿨하게’ 결론을 내리자고 마음먹었다.

 

   총점검 결과 상황이 크게 우려할 정도는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흔들리던 마음이 다소 진정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결심은 유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예상치 못한 일이 터졌다. 10월 13일자 동아일보 저녁 가판에 일면 톱으로 <초등학생 영어교육 연기검토>가 일면 톱으로 대서특필된 것이었다. 그동안 흔들렸던 내 마음이 그들에게 전달되었던 모양이다. 나는 부랴부랴 담당 기자와 편집국장에게 전화해서, 명백한 <오보>라고 항의했다. 동아일보는 “확실한 소스에 근거한 것‘이라고 자신감을 피력하며, 쉽사리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옥신각신하면서, 나는 내심으로 이제 시행을 결심할 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관이 그렇게 말해도 구태여 오보를 내겠다면 당신들 마음대로 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장관의 결연한 태도에 동아일보는 결국 다음날 조간에 위의 톱기사를 거둬들였다. 돌이켜 보면, 이 날 동아일보와의 해프닝이 한국에서의 초등영어 실시 일정을 결정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다행이 이 결정적인 시간에 내 마음의 잦은 동요를 담당 실국장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일단 결론은 내린 후, 초등영어 교육의 성공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교육감회의 및 부교육감회의를 수시로 열러 철저한 당부를 당부하고, 교육부 담당부서를 총동원하여 수시점검했다. 원어민 교사를 통한 영어연수에 박차를 가하고, 장관이 수시로 현장을 방문하고 격려했다. 그리고 장관이 초등영어 교육 예정 교사들에게 특강을 통해서, 그들의 역할과 임무의 중요성을 재삼 강조했다. 그러면서 T.V에 자주 나가 초등영어교육의 준비상황을 국민들에게 알렸다. 아울러 효율적 영어교수방법에 대한 그 간의 논의와 사례를 정리하고, 검증된 결과를 확산시키는데 힘을 쏟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린이에게 영어교육의 도입이 그들의 국어 사랑과 국어교육에 부정적인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게 하기 위해 <영어교육발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에는 영어교육전문가 외에 국어 및 언어교육전문가, 그리고 어린이 신문 편집장 등이 두루 참여하여 영어교육이 나아갈 진로에 대해 심도있는 논의를 했다. 위원장은 저명한 영문학자이면서, 연세한국어사전 편집책임자였던 이상섭 교수(연세대)가 맡아 수고했다. 교육부 전문직들을 비롯해 온 교육부 직원들이 한마음이 돼서 열심히 준비했는데, 특히 구학봉 장학관의 노고가 컸다.

 

  역설적이지만, 초등영어의 성공적 시행에 김한길 의원도 한 몫을 했다고 본다. 그는 국회 본회의 및 교육위를 통해서, 그리고 잦은 방송출연, 신문기고 등을 통해 초등영어교육에 대해 줄기차게, 또 조직적으로 반대를 했다. 말하자면 결의에 찬 확신범이자 일급 저격수였다. 그 영향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반대에는 논리뿐만 아니라 그의 작가적 상상력까지 동원했다. 내가 국회 회랑에서 그에게 “김 의원님, 10년 후 역사가 이 문제를 어떻게 평가할지 생각해 보셨나요” 라고 물었던 것을 그가 아직도 기억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초등영어에 대한 그의 신랄한 비판, 특히 그 준비부족에 대한 그의 집요한 지적은 교육부를 계속 긴장시켰고, 스스로를 엄격히 챙기는데 크게 작용했다. 그래서 초등영어가 성공적으로 시행되자, 교육부 내에서 그에게 공로상을 주어야겠다는 얘기가 나왔던 게 사실이다.

 

  1996년 10월 과열과외 예방조치로서 ‘수, 우, 미, 양, 가’ 형식의 평가 대신에 <00 분야에 흥미가 있고 이해가 빠르다> 등의 방식으로 담임이 관찰 평가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어 1997년 1월, 출판사들의 문자교습을 포함한 부교재 발행을 억제하고 기존 영어교육제도의 모순을 답습하지 않게 하기 위해 초등학교 영어교육을 회화위주로 하기로 확정했다.

 

                                      IV

  초등영어를 시작하려면, 교과서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런데 검인정 교과서(2종)인 초등영어 교재선정과정 또한 순탄치 않았다. 그 1차 심사가 막 시작될 즈음, 평소에 잘 아는 유재현 경실련 사무총장이 급히 나를 찾아왔다. 그는 매우 심각한 얼굴로, 항간에 심사는 형식적일 것이고, 이미 최종 합격 출판사 및 교재는 결정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부디 각별이 조심하고 직접 전 심사과정을 철저히 감독하라고 조언을 했다. 나는 급히 과천에 있는 심사장소로 달려가서, 심사위원들에게 초등영어 도입의 의의와 그 중요성을 강조하며, 공정하고 투명한 심사를 간곡히 부탁했다. 그리고 엄정한 심사를 보장할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조처를 다 했다. 바로 그날 밤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몰래 심사장을 벗어나서 전화로 밖에 진행 정보를 전하다가 잠복하던 경찰에 적발, 연행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심사위원들은 크게 긴장했다. 1. 2차 심사를 통해 33개 출판사 45종의 교재 중 8개 출판사 12종의 교과서가 합격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당연히 합격하리라고 믿었던 국회 교육위원회의 영향력 있는 국회의원 소유의 출판사 교재, 막강한 권력기관의 강자가 관계한 교재, 거대 언론사가 정성들여 만든 교재 등이 줄줄이 낙방을 했다. 교육부 고위관료 중에는 이 선정결과가 몰고 올 후폭풍을 우려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결과가 만인에게 공정심사를 증거했기 때문이었다.

 

                                         V    

 

  1997년 3월, 드디어 초등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초등영어교육이 출범했다. 예상을 뒤엎고, 처음부터 매우 호의적인 반응이 나왔다. 반신반의했던 언론도 <성공> 쪽으로 돌아섰고, 그간 치열했던 반대여론도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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