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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190

국민배우 안성기 Ⅰ. 나는 요즈음 평소에 존경했던 경륜 있는 배우가 암이나 실버보험, 상조나 장례보험 광고에 나와 과장스러운 내용의 멘트를 하는 것을 볼 때면 마음이 불편하다. 어느 채널을 돌리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가 나올 때는 부아가 나서 아예 TV 를 꺼 버릴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안성기가 생각난다. Ⅱ. 국민배우 안성기를 처음 만난 것은 1959년 내가 대학 1학년 때이다. 그때 안성기는 장난기가 얼굴에 가득한 초등학교 1, 2학년짜리 어린아이였다. 하지만, 그는 이미 1957년 로 영화계에 데뷔한 지 2년이 됐고, 으로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아역 상)까지 받은 후라서 유명 스타였다. 그런데 우연히 그가 내가 다니던 돈암동 성당에 다닌다는 것을 알고, 그를 찾아 어렵게.. 2011. 2. 21.
부끄럼에 대해 I. 나는 어려서부터 부끄럼을 꽤 많이 탔다. 그래서 남들 앞에 나서기를 망설일 때가 많았고 별스럽지 않은 일에도 자주 얼굴을 붉혔다. 나이가 들면 나아지려니 했는데, 아직도 별로 나아질 기미가 없는 것을 보면 이것이 천성인 듯하다. 신문에 글은 자주 썼지만 1995년 처음 정부에 들어갈 때까지 한번도 TV나 라디오에 나간 적이 없었다. 여러 번 출연 요청이 있었으나 언제나 한 마디로 거절했다. TV 출연한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렸고 얼굴이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TV에 자주 출연하는 다른 ‘스타 교수’들에 대해 비난하거나 질시하는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거니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천만다행인 것은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할 때는 그 부끄럼.. 2011. 2. 13.
시골에서 '세상 보기' I.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으레 ‘시골에 사니 오죽 외롭겠느냐’라고 내게 말을 건넨다. 얼마간 연민의 정이 서린 인사법이다. 그러면 나는 ‘그렇지요.’라고 일단 수긍하면서, ‘그런데 대신 여긴 마음의 여유가 있지요.’ 라고 답한다. 그렇다. 이곳에서 살면서 좋은 것이 세상에 덜 부대끼며 살 수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얼마간 편한 마음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곳 생활 4년 여 동안 세상 보는 눈도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여기서 조금씩 터득해 가는 세상 관상법觀想法)은 ‘두루 보기’, ‘얼마간 떨어져 보기’, ‘멀리 보기’, 그리고 ‘깊이 보기’다. II. 우선 ‘두루 보기’다. 오랜 교수생활을 하면서 내 관심은 대체로 내 전문영역에 한정되었고, 내 눈도 얼마간 그것에 고정되었다... 2011. 2. 6.
한국인의 의식구조 I. 약 20년 전, 그러니까 1990년 전후에 나는 모 일간신문이 실시하는 전국규모의 여론조사에 두 해 거푸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 조사 설계 단계와 조사결과를 평가하는 데 관여했는데 그 과정을 통해서 한국인 특유의 의식구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두 번의 조사에서 무척 인상적이었던 내용이 있었다. 구체적인 자구(字句)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대부분 한국인이 ‘오늘 한국의 경제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매우 나쁘다.’라는 부정적 평가를 하는 반면에, ‘3년 후 한국 경제를 어떻게 전망하느냐?’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꽤 잘 될 걸’이라는 낙관론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를 매우 어둡게 평가하면서, 불과 몇 년 후의 내일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낙관적 확신을 한다.. 2011. 1. 29.
기억 속의 보좌 신부님 * 이 글은 1985년 3월 31자 에 게재되었던 글을 다시 실린 것이다. 원문 뒤에 실은 후기는 이 블로그에 처음 소개한다. 실로 오랜만에 대구를 찾았다. 1.4 후퇴가 있던 해인 1951년 이곳으로 피난 와 열한 살 소년시절을 보낸 후 몇 번 스쳐는 갔지만 정작 이번처럼 하루를 묵으며 여유있게 옛 추억을 더듬기는 처음이었다. 교우인 제자와 함께 계산동 성당도 찾았고 성모당에도 올랐다. 퇴색한 기억 속에 바로 성당 뒤에 붙어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성모당은 훨씬 떨어진 주교관내에 있었다. 그러나 고풍스런 성당의 붉은 벽돌이나 쌍을 지어 우뚝 솟은 뾰족 십자가는 기억 그대로 정겨웠고 그윽하게 가라앉은 성모당의 경건한 분위기는 그때나 다름없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바로 이 두 곳이 전쟁에 찢긴 어린 소년의 영.. 2011. 1. 23.
은퇴후 '시골살이'에 대하여 I. 정년퇴직한 후 이곳 속초/고성으로 내려 와 산지 4년이 되었다. 그 동안 많은 지인들이 ‘시골살이’에 대해 내게 이것저것 물어왔고, 또 더러는 직접 이곳을 찾아 살펴보고 가기도 했다. 대부분 적지 않은 관심을 피력했는데, 막상 내 주변에는 ‘탈(脫)서울’을 감행한 사람은 아직 없다. 내가 서울을 떠나려 할 때 몇몇 지인들은 “아마 2년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 올 걸세” 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들도 이젠 내가 ‘그곳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나 스스로도 이곳 생활에 연착륙(軟着陸)했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내 경험을 토대로 은퇴 후 시골살이에 대해 얘기해 보려 한다. 이 글은 서울에 가까운 수도권에 별장이나 전원주택을 마련하고 서울을 오가며 생활하려는 분들에게 해당되는 글은 아니다. 이 글은 .. 2011. 1. 16.
연구실 연가(戀歌)  I. 2006년 12월 정년퇴임을 앞두고 마지막 학기 대학원 수업이 끝났다. 학생들과 섭섭한 정을 나누는데 한 원생이 내게 물었다. “30여 년 교단에 스셨는데, 정년을 앞두시니 정말 안타깝고 발걸음이 안 떨어지시죠.” 그런데 내 대답은 좀 엉뚱했다. “얼마간 섭섭한 건 사실이지. 하지만, 기쁜 마음이 더 크네. 정년 후 생활을 생각하면 막 가슴이 뛰어. 다 접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 수 있다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네.“ 그러자 다른 학생이 질문했다. “저희 떠나시는 일이 그렇게 즐거우시다니 섭섭하네요. 그래도 제일 아쉽고 놓치고 싶지 않은 게 무엇이세요.?” 내 대답은 짧고 명확했다. “연구실을 떠나는 것이네. 그게 정말 못 견디게 힘드네.” II. 연희관 317호, 그곳에서 나는 약 17년을 보.. 2011. 1.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