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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190

데드라인과 더불어 I. 정년을 앞두고 내가 선배 교수 한 분에게 시골로 내려갈 작정이라고 말씀드렸더니, 대뜸 그 분이 “앞으로 글은 안 쓸 작정이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거야 평생의 업인데, 어떻게 그만 두겠습니까. 그런데 가능한 한 청탁받는 글은 피할 생각입니다. 내가 쓰고 싶을 때 쓰고, 쓰고 싶은 내용의 글만 쓰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그 분 말씀이, “버스는 차장 ‘오라잇’ 힘으로 가고, 글쟁이는 데드라인 협박에 밀려 글을 쓰는데, 데드라인 없이 어떻게 글이 나와요. 아마 어려울 거요.”라고 말했다. 그 선배의 말은 글 쓰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절감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나도 글을 원고마감에 앞서 일찌감치 넘겨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글 쓸 걱정을 항상 머리에 담고 살아도 마감 문턱이 되어 재촉 .. 2010. 9. 25.
TV는 사랑을 싣고 I. 얼마 전 나는 한때 인기 TV 프로그램이었던, ‘TV는 사람을 싣고’의 종영 방송을 시청하면서 무척 안타까웠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이 프로가 신선미가 떨어지고 감동의 농도도 예전 같지 않다고 느꼈지만, 막상 종영이라니 섭섭한 마음을 금하기 어려웠다. 다 알다시피 이 프로그램은 그 회의 주인공과, 지난 날 고마운 사람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내용이다. 처음에는 당사자 간의 가슴 저리는 일화가 소개되고, 다음 방송국에서 백방으로 수소문해 가며 상대편 사람을 찾아내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감격스런 상봉이 이루어진다. 주인공이 사회적으로 잘 알려진 명사나 연예인과 같은 유명인사인 경우가 많아 더욱 흥미롭고 극적 효과가 있었다. 많은 경우, 거기에는 사랑, 연민, 배려, 헌신과 희생이 있고 얼마 간의 가슴 저미.. 2010. 9. 20.
조교와 코끼리 I. 오랜만에 내 연구실 조교출신 제자 교수들과 자리를 같이 했다. 이들은 학자의 꿈을 안고 적게는 1년 여, 많게는 4년 이상 내 연구실에 머물면서 나와 함께 공부했던 이들이다. 개중에는 환갑이 다 된 원로 교수로부터 30대 교수 초년생까지 다양한 연령층이었다. 내가 정년을 하고 속초/고성으로 옮긴 후 자주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분위기는 더 정겹고 뜨거웠다. 화제도 대학과 학문 얘기로부터, 정치와 경제, 그리고 옛날 조교시절의 에피소드에 이르기 까지 무궁무진했다. II. 대체로 학자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은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며, 일정기간 교수 연구실에서 조교로 일하면서 마치 중세의 도제처럼 학자수업을 받게 된다. 장기간, 좁은 공간에서 거의 하루 종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조교는 자기가 모시는 교수를 많.. 2010. 9. 20.
비 오는 날의 수채화 나는 해방 직후인 여섯 살 무렵 유치원을 다녔다. 당시에는 유치원 다니는 어린이가 매우 드물었는데 아마 내가 3대 독자 외동아들이기에 그런 기회를 주었던 것 같다. 서울 혜화동 천주교회에 자리한 혜화유치원에 다녔는데, 우리 집이 돈암동이어서 그곳에 가려면 삼선 교를 거쳐 가파른 동소문 고개를 넘어 혜화동 쪽으로 한참을 내려가야 했다. 제법 먼 길이었다. 그래서 처음 얼마 동안은 어른 손을 잡고 다니다가, 익숙해지면서 혼자 오갔다. 유치원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다만, 유치원 생활이 그리 즐겁지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원래 수줍고 말 수가 적었던 나는 재잘재잘 쉬지 않고 떠드는 아이들 속에 잘 섞이지 못하여, 항상 혼자 주변을 맴돌았던 것 같다. 특히 여자 아이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못했다. 제일 싫었던 .. 2010. 9. 20.
세월을 되돌릴 수 있다면 <성숙한 불씨> / 2009.11 10년 전으로 기억한다. 60세로 넘어가는 초겨울에 내 처가 뜬금없이 “당신 10년 젊어질 수 있다면, 그때로 되돌아가겠어?”라고 내게 물었다. 나는 곧장 “싫어, 그 모진 세월을 왜 되풀이 해”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내 처가 “되풀이가 아니고, 10년이 그냥 열려 있는데도”라며 재차 물었다. 나는 “그래도 싫어”라고 한 마디로 답했다. 그랬더니 내 처도, “실은 나도 그래”라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서로 “왜냐”고 더 묻지 않았다. 그날 저녁 가까운 친구 몇 명과 만난 자리에서 그 얘기를 했더니, 웬걸 대부분의 친구들이 “무슨 얘기야, 10년이 젊어지는데, 당장 돌아가야지”라는 입장이었다. 어떤 친구는 “무슨 소리야. 50대가 황금기인데 다시 산다면 정말 멋지게 해낼 텐데…”라며 자신감을 피력하기도 했다.. 2010. 9. 18.
음치로 세상살기 I. 나는 부끄럽게도 음치, 몸치, 면치, 기계치 등 뒤에 치(癡)자가 드는 각종 ‘바보’ 반열에 빠짐없이 든다. 게다가 자동차 운전도 못 하고 골프도 못 친다. 아예 자동차 운전대나 골프채를 손에 잡아 본 적도 없다. 수영도 못하고 길눈도 어둡다. 다재다능과는 거리가 멀어도 아주 멀다. 그중에서도 제일 못하는 것이 노래다. 세계적인 음악 도시 빈에서 오년 간 살았는데, 노래는 정말 젬병이다. 다른 이들은 대체로 노래가 시원찮아도 동석한 이들의 강권에 의해, 혹은 주위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고 노래하는 시늉이라도 하는데, 나는 뭇 사람 앞에서 노래하기를 한사코 거부한다. 실제로 성인이 된 이후, 어떤 자리에서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 예의가 아닌 것을 뻔히 알지만,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으니 도리가 없다.. 2010. 9. 16.
한 이발사와의 추억 나는 1980년대 초, 중반에 몇 년간 서울 여의도에 살았다. 당시에도 머리는 동네 목욕탕에서 깎았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같은 이가 머리를 만졌는데, 내 나이 또래의 이발사는 매우 유식하고 세상물정에 밝은 이였다. 또 대단한 이야기꾼이어서 조발을 하면서 끊임없이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재미있게 엮어갔다. 특히 정치얘기를 많이 했는데, 언제나 정보가 풍성했고 관점도 날카로웠다. 나는 그의 열정적인 얘기에 자주 빨려 들어가곤 했다. 시간과 더불어 그는 점차 얘기하는 쪽이 되었고 나는 대체로 열심히 경청하는 쪽이 되었다. 그는 얘기 도중 가끔 “아시겠어요” 라고 되물어서,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면 나는 황급히 “아, 그럼요” 라고 맞장구를 쳤던 기억이다. 내 쪽에서 말수가 .. 2010. 9.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