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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조교와 코끼리

2010. 9. 20. by 현강

 I.

오랜만에 내 연구실 조교출신 제자 교수들과 자리를 같이 했다. 이들은 학자의 꿈을 안고 적게는 1년 여, 많게는 4년 이상 내 연구실에 머물면서 나와 함께 공부했던 이들이다. 개중에는 환갑이 다 된 원로 교수로부터 30대 교수 초년생까지 다양한 연령층이었다. 내가 정년을 하고 속초/고성으로 옮긴 후 자주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분위기는 더 정겹고 뜨거웠다. 화제도 대학과 학문 얘기로부터, 정치와 경제, 그리고 옛날 조교시절의 에피소드에 이르기 까지 무궁무진했다.

II.

대체로 학자를 지망하는 젊은이들은 대학원 과정을 공부하며, 일정기간 교수 연구실에서 조교로 일하면서 마치 중세의 도제처럼 학자수업을 받게 된다. 장기간, 좁은 공간에서 거의 하루 종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조교는 자기가 모시는 교수를 많이 닮게 된다. 관심 분야나 연구방법으로부터 공부 습관, 사고방식은 물론, 심지어는 걸음걸이에서 헛기침하는 것까지 교수를 꼭 빼 닮는 경우가 없지 않다. 교수의 입장에서도 자료수집, 정리 등 연구를 보조하는 일부터, 학사 및 연구실 정리에 이르기 까지, 크고 작은 일에 조교에 의지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에 그들은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다. 그래서 양자는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한다.

간혹 자신의 편의를 위해 조교를 혹사시키는 교수도 없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수들은 연구실 조교를 큰 학자로 키워야 할 의무와 책임을 안고 있기 때문에 그의 선발, 수련과정 뿐 아니라, 유학, 귀국 후 취업에까지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고 지원과 협력을 하게 된다. 그들의 결혼식 주례도 당연히 해당 교수의 몫이다.

III.

나는 신입 조교의 선정은 내 방을 떠나는 조교에게 맡겼다. 간혹 내가 선호하는 학생이 있어도 떠나는 조교가 다른 학생를 추천하면 그의 생각을 존중했다. 떠나는 조교가 자신의 경험과 내 성향 등을 두루 고려해서 나 보다 더 좋은 결정을 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결과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조교가 결정되면 새 조교에게 두 가지 당부를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조교가 연구실에 앉아 공부하는 시간이 내가 연구실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더 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대체로 여덟 시 전에 출근해서 저녁 늦은 시간까지 연구실에 있기 때문에, 그보다 오래 제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둘째는 내방은 가난한 연구실이라는 것이다. 내가 이른바 ‘프로젝트’라는 것을 하지 않기 때문에 학교에서 주는 조교 장학금 외에 별도의 수입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이 학업에 전념하는 데는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라는 얘기도 곁들인다.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신입 조교는 떠나는 선배 조교로부터 나와 생활하기 위해 유념해야 할 점을 교육 받는다고 했다. 그 중 하나는, 내가 밥을 빨리 먹는 다는 사실과 밥을 남기는 것을 아주 싫어 한다는 점을 일깨운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별도의 약속이 없으면, 조교와 식사를 많이 했다. 그런대 역대 조교들은 하나같이 내 식사 속도에 보조를 맞추려고 큰 고생을 했다는 후일담이다.

내 연구실 출신들은 대부분 학자의 길을 걸었다. 얼마 전 잘 아는 교수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대뜸, “안 교수, 내가 외국 학회에서 자네 제자를 만났지, 그런데 어떻게 자네 방 친구는 하나같이 안병영 ‘아비타'야."라고 말했다.

IV.

옛 조교들과의 모임이 끝날 무렵, 한 친구가 물었다.

“교수님, 목이 긴 기린을 냉장고에 처 넣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세요?”

내가 답했다.

“그거야. 조교 시키면 되지. 그런데 자네 그건 10년된 조크야. 옛날에는 기린이 아니고 덩치 큰 코끼리였는데.”

다음에는 내가 그들 모두에게 물었다.

“내가 시골에서 사는데 크게 불편한 게 없는데, 한가지 크게 아쉬운 게 있네. 그 게 무언지 아나.”

내 물음에 그들 모두가 합창하듯 답했다.

“조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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