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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비 오는 날의 수채화

2010. 9. 20. by 현강

나는 해방 직후인 여섯 살 무렵 유치원을 다녔다. 당시에는 유치원 다니는 어린이가 매우 드물었는데 아마 내가 3대 독자 외동아들이기에 그런 기회를 주었던 것 같다. 서울 혜화동 천주교회에 자리한 혜화유치원에 다녔는데, 우리 집이 돈암동이어서 그곳에 가려면 삼선 교를 거쳐 가파른 동소문 고개를 넘어 혜화동 쪽으로 한참을 내려가야 했다. 제법 먼 길이었다. 그래서 처음 얼마 동안은 어른 손을 잡고 다니다가, 익숙해지면서 혼자 오갔다.

유치원 기억은 그리 많지 않다. 다만, 유치원 생활이 그리 즐겁지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원래 수줍고 말 수가 적었던 나는 재잘재잘 쉬지 않고 떠드는 아이들 속에 잘 섞이지 못하여, 항상 혼자 주변을 맴돌았던 것 같다. 특히 여자 아이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못했다. 제일 싫었던 것이 유희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깡충깡충 뛰며 예쁜 시늉을 하는 것이 꽤 유치하고 우스꽝스럽게 느껴져서 도저히 따라 할 수가 없었다. 집에서 여든 넘으신 증조부의 훈도 아래 이미 천자문을 다 띤 애 어른에게 그건 무리한 요구였다. 그래서 첫 번째 유희 시간에 수녀님께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그것도 모자라 손까지 내 저으며 단호하게 유희 불참을 선언했다. 갖은 회유와 협박(?)에도 꿈쩍도 하지 않자 화가 나신 수녀님은 교실 뒤편에 혼자 서 있으라고 벌을 내리셨다. 이후 나는 유희가 시작될 즈음이면 수녀님의 따가운 눈총을 등 뒤에 느끼며 제 발로 걸어 교실 뒤편으로 나갔다.

그런데 유치원 시절을 생각하면 향수처럼 아련히 떠오르는 아름다운 기억이 있다. 어느 봄날이었다. 유치원 수업이 막 끝났는데 밖에는 보슬보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비를 맞을 작정을 하고 유치원 문을 막 나서고 있었다. 한 여자 아이가 급히 다가와 "얘, 내 우산 같이 쓰고 가자" 라며 말을 건넸다. 나는 무척 당황하고 부끄러워서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 애는 바쁘게 작고 앙증맞은 예쁜 꼬마 우산을 펼쳤다. 같이 동소문 고개 길로 오르면서 그 애는 계속 재갈거렸고 나는 불편한 심경으로 말없이 발걸음만 옮겼다. 고개 마루턱에 이르자 그 애는, "어쩌나, 우리 집은 바로 여긴데" 하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거기에 양쪽 계단을 사이로 마주 보는 일본식 양옥집이 있었는데 바로 그 오른쪽 집이 그 애 집이었다. 아이는 우산을 접었고 우리는 서로 "안녕“ 하고 인사를 나눴다. 그리곤 그 애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두어 계단을 오르던 그 애는 빠른 걸음으로 다시 내려오며, 급히 작은 손가방에서 예쁜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곤 내게 다가와, “아직 비가 오잖니, 이거라도 써야 겠다” 며 손수건을 내 머리 위에 사뿐히 올려놓았다.

내 기억은 거기까지다. 내가 그 손수건을 그대로 머리에 얹고 집까지 왔는지, 다음 날 그것을 그 애에게 제대로 돌려주었는지, 혹은 그 후 그 애와 정겨운 얘기라도 한마디 나눴는지 아무런 기억이 없다. 그 애가 예뻤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에 남은 것은 그날 그 애가 잠자리 날개같이 얇고 고은 옷을 입었었던 것과 그 애가 손수건을 내 머리 위에 얹었을 때 내 가슴에 진한 감동의 물결이 일렁였던 것이 전부다.

나는 성년이 될 때까지 돈암동에 살았기 때문에 그 후에도 동소문 고개를 수없이 넘나들었다. 그러면서 그 집 앞을 지나갈 때면 그 날의 기억이 오릇이 되살아나 혹 내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가 그 집에서 튀어나오지 않나 유심히 살펴보곤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고, 내 성격으로 볼 때 뜻밖에 조우가 있었다 해도 그녀에게 다가갔을 리 없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그 아름답고, 애틋한 기억은 아직도 마치 비 오는 날의 수채화처럼 내 가슴에 잔잔하게 스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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