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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데드라인과 더불어

2010. 9. 25. by 현강

I.
정년을 앞두고 내가 선배 교수 한 분에게 시골로 내려갈 작정이라고 말씀드렸더니, 대뜸 그 분이 “앞으로 글은 안 쓸 작정이요?”라고 물었다. 나는 “그거야 평생의 업인데, 어떻게 그만 두겠습니까. 그런데 가능한 한 청탁받는 글은 피할 생각입니다. 내가 쓰고 싶을 때 쓰고, 쓰고 싶은 내용의 글만 쓰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그 분 말씀이, “버스는 차장 ‘오라잇’ 힘으로 가고, 글쟁이는 데드라인 협박에 밀려 글을 쓰는데, 데드라인 없이 어떻게 글이 나와요. 아마 어려울 거요.”라고 말했다.

그 선배의 말은 글 쓰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절감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나도 글을 원고마감에 앞서 일찌감치 넘겨 본 기억이 별로 없다. 글 쓸 걱정을 항상 머리에 담고 살아도 마감 문턱이 되어 재촉 전화가 두어 차례 와야 글이 손에 잡히고, 막판에는 여지없이 하얗게 밤을 새웠다. 신기한 것은 좀처럼 가닥이 잡히지 않던 글도 데드라인이 코앞에 오면 마치 신들린 것처럼 풀린다는 것이다. 실로 데드라인은 이처럼 글을 만드는 위력이 있다.

II.
데드라인과 연관해서 나는 잊지 못할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그 첫째는 한 삼십여 년 전 일이니 이미 꽤 오래된 얘기다. 그때도 항상 글에 쫓기던 때인데 목욕을 하다가 아차 하는 순간에 크게 미끄러졌다. 옆구리 통증이 말이 아니었다. 그 때 이미 명목상 데드라인이 지난 때여서 병원가기를 포기하고 글 마무리를 위해 책상머리에 앉았다. 밀려오는 통증 때문에 한쪽 손으로 아픈 부위를 얼싸 안고 ‘아이구 아이구‘를 연발하며, 거의 이틀 밤을 새워 억지춘향으로 글을 끝냈다. 글을 마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갈비뼈 두 개가 부러졌다는 것이다. 왜 이리 늦게 병원을 찾았느냐는 담당 의사의 물음에 내가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 분 말씀인 즉, “글 빚이 사람 잡겠군요.”

두 번째 얘기도 1990년 경의 얘기다. 어떤 월간지에 원고지 50매 분량의 기명 칼럼을 연재하고 있을 때였는데, 겨울 방학 중 미국에 다녀 올 일이 생겼다. 일을 마치고 여유 있게 귀국 이틀 전 쯤 가까운 친구를 찾아 LA에 들렸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1박 2일로 라스베가스를 다녀오자고 제안했다. 나도 반기며 따라 나섰다. 저녁녘에 라스베가스에 도착해서 호텔을 잡고 서울 집에 전화를 했더니, 잡지사에서 원고마감이 지났는데 연락이 안 된다고 불난리가 났다는 것이다. ‘아차’ 싶어 잡지사에 급히 연락을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있어도 내일 새벽까지는 원고를 보내라는 것이다. 마감을 미뤄보려는 어떤 사정도 통하지가 않았다. 하는 수없이 호텔방 한 구석에서 글을 짜내기 시작했다. 정작 화가 난 것은 같이 온 친구였다. 바쁜 가운데 추억을 만들려고 초행인 나를 데리고 이곳까지 왔는데, 불야성을 이룬 라스베가스 한 가운데서 잭팟은 고사하고 함께 밤 구경도 나서지 못하게 되었으니 화가 날게 당연했다. 꼬박 밤을 새워 글을 마치고 새벽에 부랴부랴 팩스로 글을 보냈다. 그런 사연 때문에 내 뇌리에 새겨진 라스베가스의 첫 인상은 휘황찬란한 밤무대나 스릴있는 도박장이 아니라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는 환락가의 새벽거리 모습이다.

III.
데드라인을 코앞에 두고 글을 마무리 하자면, 침이 마르고 오금이 저린다. 그러나 머리는 깨끗이 정돈되고 글은 무섭게 속도를 낸다. 거듭 말하거니와 데드라인은 끝내 제 시간에 글을 만들어 내는 신통력이 있다. 그래서 글 쓰는 이들은 데드라인의 마력을 신봉하고, 그에 의지하며, 얼마간 그 아스라한 느낌을 즐긴다.

이곳 속초/고성으로 내려 온 후, 나는 데드라인 없이 글을 쓴다. 쓰고 싶을 때, 쓰고 싶은 글만 쓰는 편이다. 추동력이 미약하니 그 선배의 말씀대로 생산성은 크게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하루하루 데드라인이라는 마녀에 쫓기던 지난 40여년에 비하면, 매우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아직도 인간적인 삶이냐 생산적인 삶이냐의 갈등은 나를 괴롭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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