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애 바이러스

삶의 단상 2010. 10. 3. 06:43 |

I
따져 보니 벌써 구년 전 일이다. 지난 2001년에 환갑을 기념하여 가까운 친구들 부부 열 쌍이 외국여행을 떠났다. 바삐 살다보니 부부가 함께 외국여행을 함께 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탓에 모두 들떠 있었다. 12일 일정으로 스페인, 그리스, 터키로 간 여행이었는데. 다른 이들이 끼지 않은 우리만의 여행이라 자유롭고 편안했다.

첫 기착지가 마드리드였던 것 같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공항 밖으로 나오는데, M 변호사 부부가 다정스레 손을 잡고 앞장을 서는 게 아닌가. 부부 사이가 좋다고 소문난 부부이기는 하나, 대 놓고 이렇게 돈독한 부부애를 과시하니 뒤에서 따라 오는 일행들은 심기가 조금 뒤틀렸다. 그래서 뒤에 친구들은 옆에 부인들이 극구 말리는 대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한마디씩 던졌다. “그림 좋다”, “그래, 잘해 봐라." “남부끄럽지도 않니”, "마누라가 무섭긴 무섭구나.,

가부장적인 가족문화에 익숙한 우리 세대에게는 초로의 부부가 손을 맞잡고 활보하는 일이 그리 흔치 않았기 때문에, M 변호사 부부의 사랑 표현에 대해 모두 얼마 간 충격을 받은 게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 커플을 향해 한 마디씩 빈정댔지만, 내심 그 용기가 부러웠고, 마치 일격을 당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II.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다음 날 관광차 거리로 나왔을 때, 우리 일행 중 두 쌍의 부부가 새롭게 손을 맞잡고 나서는 것이 아닌가. 그 중 한 친구는 전날 M 변호사 내외에게 가장 신랄하게 핀잔주었던 장본인이기에 우리 모두가 그의 표변한 모습에 아연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날은 나머지 부부들 누구도 그들 손잡은 부부들을 빈정대거나 비꼬는 이가 없었다. 다만 서로 보며 그냥 웃는데 그쳤다.

이후 한 쌍, 두 쌍 손잡는 부부가 늘어났다. 이제 누구도 이런 행동에 대해 왜 그러냐고 묻지도 않았고, 아무도 해명하지 않았다. 점차 그것이 마치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그러다 보니 며칠 후 부부 손잡기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관광 일정이 반쯤 접어들어, 우리 일행이 안달루시아의 그라나다에 이르렀다. 내가 알함브라 궁전의 환상적인 아름다음 취해 넋을 잃고 있을 때, 내 처가 느닷없이 내 손을 잡았고 나도 못이기는 채 맞잡았다.

그러다가 웬걸 우리가 마지막 코스인 이스탄불에 이르렀을 때는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10쌍 전원이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고 희희낙락 관광에 열중하고 있었다. 첫날 M 변호사 커플이 단초를 연 부부 손잡기가 이처럼 강력한 후폭풍을 몰고 올 줄은 실로 아무도 예감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첫 부부가 손잡은 모습이 좋아 보였고, 차츰 그래야 마땅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것이 마치 전염병처럼 급속한 속도로 번져 간 것이 아닌가 싶다

 

III.
그 때 함께 여행했던 부부들은 이후 동네 산책길에서도 빠짐없이 손을 꼭 잡는다는 후일담이다. 우리 부부도 이제 어디가나 스스럼없이 손을 잡고 다닌다. 처음에는 조금 멋쩍었지만 하다 보니 이제 손을 떼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됐다.

어제 속초 시내에 나갔다가 마주 오던 젊은 부부로부터 인사를 받았다. 그들은 손을 잡고 있지 않았다.

 

“어르신들, 두 분이 손을 꼭 잡고 가시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습니다.”

 

그들 부부도 머지않아 손을 맞잡을 것이 분명하다. 부디 부부 손잡기가 강력한 바이러스처럼 더 크게 번져 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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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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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강렬 2010.10.03 11:44 Address Modify/Delete Reply

    '부부의 손잡기'는 사랑의 대화입니다. 굳이 말로하지 않아도 손을 잡으면 묵언의 대화가 됩니다.저는 연애시절 손을 잡고 결혼이후 지금까지 산책을 할 때면 아내의 손을 잡습니다. 팔불출일까요? 누가 뭐라고 해도 편안합니다.
    선생님, 두분 건강한 모습으로 오래 오래 꼭 손을 잡고 다니십시오. 두 분께서 손잡고 다니시는 모습을 뵙지는 못했지만 참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 자주 블로그에 들리겠습니다.
    제 연구소 사이트가 www.teduplan.com입니다.

  2. 서남수 2010.10.04 21:41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저는 삼년 전 일입니다. 결혼 25주년, 즉 은혼 기념으로 여행사를 통해 동유럽 여행을 갔습니다. 서로 모르는 삼십 여명이 일행이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공항에서부터 '평소처럼' 손을 잡고 다녔습니다. 여행 중간 버스로 한참 동안이나 지루하게 가는 동안 각자 소개 시간이 있었습니다. 부부만으로는 첫 해외여행이고 은혼여행이라고 밝혔습니다. 다음 날 안식구가 웃는 얼굴로 알려주었습니다. 일행 중 한 분이 말해주길, 제가 자기소개를 하기 전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틀림없이 '불륜관계'라고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한국인 부부가 남들이 보는 앞에서 저렇게 손을 꼭잡고 다니는 경우는 없다는 것이지요.
    속초는 지방이라 아직은 부부가 유별한 곳이겠지요. 부총리님 내외분의 금슬은 아는 사람들은 다 너무 잘 알고 있지만, 그 동네 분들에게는 행여 저희처럼 '불륜관계'로 오인받으실 염려는 없을까요? 하기야 오인받는다고 해서 뭔 대수이겠습니까만...^^

  3. 태현엄마 2010.10.26 02:23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과 사모님은 참 좋아보이세요.
    저도 그라나다가 참 좋았는데, 그래도 제일 감명깊었던 곳은 세비야였답니다. 그라나다에서만 있는 맥주가 있었는데 너무 맛있었는데 십년전 일이라 이름이 생각이 안나네요. 언제나 다시 가보나 싶어요. 남편은 스페인 문화를 별로 안 좋아해서 손잡고 갈 일은 없지 싶어요.

  4. hogan 2013.05.06 16:14 Address Modify/Delete Reply

    향토 음식점 육성에 있어서의 문제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