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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운명 앞에 서서

2010. 10. 16. by 현강

I.

1964년 늦가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마지막 학기 때 일이다. 그때 내가 총무처에서 인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자 친구와 중앙청 근처에서 만날 약속을 했다. 둘이 떨어진 은행잎을 밟으며 몇 걸음 걷다 보니 당시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들던 유명 역술인 김봉수의 점집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재미삼아 한번 들어가 보자고 했다. 여자 친구도 쉽게 동의해서, 난생 처음 점술가를 찾았다. 

엄청나게 큰 방에는 사람들이 꽉 차있었다. 겨우 비집고 들어가서 등록을 했다. 성명만 달라고 해서 내 이름만 적었다. 어렵사리 자리를 잡다 보니 여자 친구와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앉게 되었다. 김봉수씨는 한복차림으로 앉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고객의 운세를 구변 좋게 설파하고 있었다. 말투는 거의 반말지거리였는데, 그게 오히려 그의 카리스마를 고조시켰다. 그렇게 느껴서 그런지 안광이 번득이는 듯했고 하는 행동거지가 비범해 보였다. 내 바로 앞 순번인 40대 중년 여성에게는, “행동 좀 바르게 해. 벌써 몇 번째 사내야” 해가며, 거침없이 면박을 주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장난으로 시작한 일이었는데, 막상 순서가 닥치니 나도 자못 긴장했다. “안-병-영이라”라고 천천히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서 그 많은 사람 중에서 곧장 나를 찾아냈다.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공부하는 사람이군. 얼마 후 유학을 가겠어. 그런데 말이야”

그는 말을 더 잇지 않고 얼굴을 내 여자 친구 쪽으로 돌렸다.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나와 제법 떨어져 앉아 있었는데, 어떻게 그녀를 알아챘는지 신기했다. 그리고는 기절초풍할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아가씨. 여기서 나가면 곧장 저 친구와 헤어져. 그렇지 않으면, 30전에 과부가 돼. 내 말 명심해, 더 할 얘기가 없어.”

 그리고 그는 우리와는 더 이상 볼 일이 없다는 듯, 다음 고객의 이름을 천천히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뒷머리를 무거운 철퇴로 크게 맞은 느낌이었다. 정신이 아연하게 느꼈다. 그러나 일단 내색을 하지 않고, 그녀에게 나가자는 눈짓을 했다. 마루로 나와서 신발을 찾는데, 방금 내 앞 순번으로 톡톡히 망신을 당했던 그 예의 중년 여성이 같이 왔던 자기 친구에게 속사이듯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창피해 혼났다. 그렇지만 정말 놀랐다. 정말 족집게잖아, 족집게. ”

 그가 대단한 점술가라는 점을 다시 확증되는 순간이었다. 분명 안 들었으면 더 좋았을 법한 말이었다. 

그 집에서 나와 내 여자 친구는 묵묵히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안국동, 돈화문. 원남동을 거쳐 혜화동까지 먼 길을 함께 걸었다.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데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당대 최고의 점술가로부터 얼마 후 죽을 운명이라는 선고를 받았으니 기분이 어떠하였겠는가. 대놓고 겁먹은 소리를 하기에는 남자 체면이 안됐고, 그렇다고 '엉터리 점쟁이의 허튼소리'라고 호기 있게 한마디 내뱉기에는 내 심기는 너무 편치 않았다. 나와 결혼하면 몇 년 안에 과부가 될 팔자라니 내 여자 친구도 기가 막혔을 게 분명했다.

이후 나와 내 여자 친구는 계속 만났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김봉수 사건’을 다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불쾌한 기억을 되살리기 싫었기 때문이다. 다행이 그 사건이 우리 둘 사이를 갈라놓지 못했다. 몇 년 후 나는 그녀와 유학지 오스트리아에서 결혼했다. 결혼 후에도 우리는 그 사건을 한 번도 대화에 올려놓지 않았다. 무언의 합의로 철저하게 그 일에 대한 언급 자체를 금기시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마치 그 일이 전혀 일어나기조차 않았던 것처럼 치부했다. 또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러면 설혹 김봉수의 예언이 ‘운명적’ 점지였더라도 어쩔 수 없이 우리를 빗겨갈 것 같았다.

학위를 마치고 귀국했다. 그리고 얼마 있다 내가 만 30의 고개를 넘었다. 그제야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이 말문을 열었다.

“여보, 생각나. 그때 김봉수가 했던 저주. 이제 내가 만으로도 30을 넘겼으니 그 사람 예언이 틀린 것이 분명하잖아.”

  그러자 내 처도 거들었다.

“실은 나도 그동안 속으로 얼마나 걱정했는지, 말도 마. 그 사람 정말 못된 사람이야. 생사람 잡았으니”

 실로 우리 부부는 오랜만에 터놓고 김봉수를 한껏 성토했다. 이제 마법의 저주에서 풀린 듯했다. 여하튼 내처는 과부를 면했고, 나도 김봉수가 예언한 30을 두 배 이상 넘기며 아직 멀쩡히 살고 있다.  김봉수에게 크게 덴 후로, 나는 다시는 역술가에게 가지 않는다.

 

II.

 1995년 12월 어느 날 아침, 선배인 K 교수가 내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내 사주를 물었다. 말씀인즉, 명리학에 정통한 지인이 있는데, 오늘 그 분과 약속이 있어 안 교수 운세를 알아보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날 때부터 양력을 쇠 왔기 때문에 음력 생일조차 기억을 못 한다고 답하니, 어머님께 빨리 여쭤 보라고 채근했다. 결국, 어머님을 통해 사주를 알아내서 그 선배께 말씀드렸다.

 그리고 한 열흘쯤 지나 나는 예의 그 K 교수와 다른 선배 S 교수와 저녁을 함께 했다. 그 자리에서 K교수는 내 사주 얘기를 하며,  “그 명리학 하는 친구 말이야. 이제 완전히 한물갔어. 엉뚱한 소리만 하잖아. 아, 그래 안교수가 얼마안가 장관이 된다는 거야. 있을 법하기나 한 얘기야. 그래서 내가 말 같지 않은 소리, 하지 말라고 면박을 주었지.” 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S교수도,  “정치 근처에도 안 가는 사람이 어떻게 장관이 돼. 안 교수야 천생 백면서생인데.”라고 맞장구를 쳤다. 나도 “괜한 수고를 하셨군요.”라며 함께 웃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교육부 장관 발령이 났다. 나는 물론, 가까운 친지 누구도 예상치 않았던 일이다. 이번에는 내 운명을 귀신이 곡할 정도로 정확하게 점친 것이다.

 

III.

 내 운명을 점쳤던 위의 두 예를 보면, 김봉수의 예언은 빗나갔고, K교수의 친구인 명리학자는 적중했다. 이들 예로 미루어 볼 때, 사람의 운명은 미리 맞출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 듯하다.  인생은 자유로운 존재인가, 아니면 운명적 존재인가. 그 대답은 역시 <자유도 운명도 아니라는 이야기>(박영식, 2010)가 정답인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운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으나, 그 운명의 영향 아래서 가능한 한 자기 영역을 확대하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운명을 부정하고 거부하지는 않지만, 너무 그것을 의식하고 그에 매달리던가, 만사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주위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을 미리 염탐해 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역술가나 도사 등을 찾고 혹은 스스로 예지력을 키우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나쁜 일은 미리 피하고 조심하며, 좋은 일은 더 열심히 노력하기 위해, 혹은 재미삼아 그런다고 그럴싸한 이유를 댄다.

 그러나 나는 자신의 내일을 미리 내다보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미래는 운명과 자유의지의 합작품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전에 탐지하고 대처하기보다는, 미래의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그 안에서 자유의 몫을 키우고 그 영역을 확장하는 데 더 진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운명이라는 어휘 자체가 이미 초월성과 신비성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거기에는 얼마간 신의 영역이 깃들어 있다고 본다. 따라서 미래 세계에 미리 가보려 하는 일은 우리 인간이 신의 비원(苑)을 기웃거리는 행위이다. 그것은 주제넘은 일이며, 자칫 신의 노여움을 살 수도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Ⅳ.

지난주에는 탈북한 전 노동당비서 황장엽씨가 세상을 떠났다. 저승 가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무거웠으리라 생각한다. 연약한 인간이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며 극복하기 어려운 운명의 굴레 속에서 의미 있는 성취를 추구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래도 인간이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운명 앞에 좀 더 의연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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