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론

삶의 단상 2010. 11. 1. 00:16 |

 
I.
얼마 전 한 연구모임에 참가 하였다, 그 날 토론 주제는 <행복>에 관한 것이었다. 발제자가 행복과 연관하여 여러 가지 흥미로운 사회과학적 연구를 소개했고, 그에 대해 참가자들이 폭넓은 담론을 펼쳤다. 행복은 일정 수준의 경제적 부(富)와 연관될 수는 있어도, 그것이 부의 크기와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명제에 대체로 동의했다. 아울러 행복은 주관적 느낌이며, 문화권이나 나라, 혹은 개개인에 따라 행복을 느끼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도 많이 지적되었다.

그날 논의과정에서 나는 행복과 연관하여 사람들의 유형을 성취형(成就型), 영성형(靈性型),일상형(日常型)의 세 가지로 나누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성취형은 일정한 목표를 따라 매진하면서 그 성취를 통하여 행복을 느끼는 유형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성취욕이 강하며 도전적이며 모험을 중시한다. 창조적 에토스가 두드러지며 한번 일에 취하면 놀랍게 몰입한다. 우리나라 산업화에 앞장섰던 박정희나 현대 그룹의 신화를 키운 정주영 같은 사람이 이런 유형의 전형이다. 기업가 정신이 강조되는 경제. 경영부문에서 두드러지지만, 정치는 물론, 문화, 예술 부문에서도 이런 유형은 적지 않다. 성취에 목을 매는 이들 중에도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자주 만나는 ‘일벌레’들에게서 정작 일을 빼앗으면 그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영성형은 세속적인 인간사에 매달리기 보다는 초월적 정신세계에서 행복을 찾는 유형이다. 종교, 명상 등에 몰입하며, 구도와 수행을 중시한다.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수도자, 라즈니쉬와 같은 명상가가 대표적인 유형이다. 자연 속에서 인간성 회복을 추구한 소로우같은 이도 크게 보아 이런 부류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교조적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좌, 우의 극단적 이념가들도 이 유형적 특성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 이들 유형 중에는 영성개발이나 자기수련을 넘어 사회봉사나 세상구원에 나서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하느님의 은총이나 불심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우리 주변의 많은 이웃들도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일상형은 일상의 삶 속에서 작은 행복을 찾는 보통사람의 모습이다. 대단한 목표나 큰 욕심 없이 일상의 흐름 속에서 비교적 자족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유형이다. 이들은 대단찮은 일에도 꽤나 행복해 하며, 제법 큰 어려움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일인당 국민소득이 매우 낮은 동남아나 중남미 국민들의 행복도가 의외로 높다는 조사결과도 이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한다.

 복잡하기 짝이 없는 인간을, 그것도 행복이라는 그들의 주관적 내면세계를 이처럼 단순화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는 것은 무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다만 논의의 단초를 열기위한 시도로 이해되기 바란다.

 

II.
위의 세 가지 유형 중 어떤 것이 더 좋다 혹은 더 나쁘다고 상대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개개 유형은 저마다 특성이 있고,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다.

성취형의 경우, 이들의 성취목표나 창의성이 세상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발현된다면, 그것은 더 할 니위없이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들의 목표가 지나치게 이기적이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설정되거나 과도한 성취욕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당사자는 행복을 느끼더라도 자칫 이웃이나 인류에게 큰 해악을 안겨 줄 수 있다.

영성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독실한 신앙심이나 큰 깨달음이 자신을 물론 이웃과 중생을 구제하는데 기여할 수 있으나, 자칫 발을 잘못들이면 광신자가 되거나 사교나 미신의 늪에 빠져,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일상형은 다른 유형에 비해 명암의 차이가 그리 두드러지지 않다. 그러나 이 유형도 소박한 삶 속에서 행복을 찾는 다는 장점이 있으나, 자칫 삶에 대해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너무 쉽게 운명에 순응한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이들은 위의 한 가지 유형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실제로, 어떤 유형의 전형처럼 보이는 사람도, 얼마간 다른 유형의 특성을 함께 지니는 게 상례이다. 예컨대 성취형의 인간이 자주 영성에 매달리는가 하면, 간혹 일상형의 행복을 그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유형끼리 조합을 이루는 경우도 흔하다. 특히 성취형과 영성형이 조합을 이루는 복합형이 적지 않다. 톨스토이, 슈바이처, 장기려 등 문화, 예술 분야, 혹은 의료 등 인간봉사 부문에서 큰 족적을 남긴 사람 중 그런 이가 많다. 실제로 깊은 신심이나 영감의 도움 없이 이들 분야에서 큰 성취를 이루기는 쉽지 않다. 반대로 히틀러나 스탈린 등 교조적 이데올로기에 빠져 인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이념적 혁명가들도 성취형과 영성형이 부정적으로 상호작용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두 유형의 선(善)조합이냐, 악(惡)조합이냐에 따라 인간과 역사에 정반대의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어떤 이는 인생의 행로에서 행복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삶의 방향을 크게 선회하기도 한다. 일밖에 모르던 성취형의 인간이 영성형이나 일상형으로 유형전환을 하는 경우가 그런 예다. 성공적인 사업가가 영성의 빛을 쫓아 하루아침에 목회자를 지망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일상 속의 작은 행복을 찾아 귀향을 서두르기도 한다. 친지의 죽음, 병고, 사업실패, 영적 계시 등이 계기가 될 때가 많다, 성취형의 인간도 노경(老境)에 이르러 인생무상을 절감하고 영성형이나 일상형으로 옮겨 가는 경우도 흔하다. 이렇듯, 위의 세 유형은 실제로 다양한 조합과 변환, 비중과 농담의 변화를 보이며, 그런 가운데 행복의 느낌과 의미도 변한다.

 개개인이 행복을 추구하는 일은 주관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타인과 함께 사는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보다 큰 사회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개개 유형은 아래와 같은 기본적인 조건을 갖출 필요가 있다. 성취형은 공의(公義)를 추구하고 과욕을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영성형은 비움과 겸손을 바탕으로 할 때 삶의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다. 일상형 또한 성실한 삶과 자족하는 마음이 함께 할 때 제 빛을 발할 수 있다.

 이들 기본적 조건들을 관통하는 가장 본질적 요소는 무엇일까. 나는 자기 성찰(省察)이 아닐까 한다. 삶의 과정에서 자신을 바르게 살필 수 있는 성숙한 능력이 있다면 유형에 상관없이 누구나 자신의 행복과 큰 사회의 행복을 바르게 조화시킬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인생에서 치열한 자기 성찰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III.
나도 한때 성취형에 가까웠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요즈음의 나를 스스로 돌아 볼 때, 위의 세 유형 중 어느 한 가지 유형에 전형적으로 속하는 것 같지는 않다. 행복을 위해 성취, 영성, 일상을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 어디에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매달리는 편은 아니다.

 이미 70의 고개를 넘어 선 오늘, 과도한 성취욕은 금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학자로서의 ‘적절한’ 성취는 계속 추구하고 싶다. 그것이 내 삶의 의미와 동력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 강도를 조율하려 한다. 아울러 영성으로 향하는 길목도 계속 닦고 다지고 싶다. 이 길은 아직 요원하다. 아마 그 빛을 쫓다가 내 생을 다할 것이다. 그러면서 일상의 소박한 삶에서 우러나오는 작은 행복에 늘 감사하고 자족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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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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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1.02 05:00 Address Modify/Delete Rep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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