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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이중섭의 에덴

2010. 11. 7. by 현강

I.
이미 십 년이 지났으니 한참 된 얘기다. 서귀포에 들렀다가 이중섭 미술관을 찾았다. 우리 부부 외에 다른 관람객은 없었다. 전시장을 둘러보는데, 미술관 관계자인 듯한 분이 눈인사를 했다. 큐레이터나 아니면 자원봉사자가 아닐까 싶었다. 내가 그에게 “미술관 관계하시는 분이신가 보죠?” 하고 말을 건네자, 그는 “네, 혹 도울 일이 있나요?”하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함께 작품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이런저런 말을 나눴다. 그러다가 내가 그에게 심술궂은 질문을 했다.

“이중섭은 이곳에 채 1년도 체류하지 않았는데, 서귀포가 이중섭을 온통 독점하고 있네요. 이중섭 미술관에다 이중섭 거리까지. 조금 지나친 게 아닌가요?”

그러자 그는 가볍게 미소를 머금으며, “이중섭 씨가 여기서 주옥같은 그림을 많이 그렸죠.”라고 담담하게 답했다. 나는 괜스레 한마디를 덧붙였다. “대향(大鄕; 이중섭의 호)이 여기서 동화 같은 작품을 많이 그렸지만, 그것들이 그의 대표작이라고 하기는 어렵지요.” 그러자 그는 매우 진지한 낯빛으로 대답했다

“화가 이중섭에게 서귀포 시절은 그의 생애 중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그가 정곡을 찔렀다고 느꼈다. 그래서 주저 없이 동의했다.

“ 옳은 말씀입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중섭에게 이곳은 에덴동산이었을 테니까요.”

II.
내가 이중섭의 작품을 처음 만난 것은 1955년 1월 미도파 겔러리에서 열린 그의 첫 개인전에서였다. 중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당시 나는 그림이라면 사족을 못 썼는데 이중섭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날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의 ‘소’ 시리즈 몇 점 앞에서 발이 얼어붙었다. ‘아니 한국에 이런 작가가 있었다니’, 내게 이중섭은 위대한 발견이었다.

작품 소재와 분위기는 다분히 토속적인데, 야수파를 연상시키는 역동적 터치, 단순화된 형태, 굵고 웅걸한 붓 자국, 화려한 원색의 담대한 구사는 분명히 모더니티의 현현(顯現)이었다. 그의 그림 속의 한우는 지극히 도발적인 자세로 눈망울을 번득이고 거친 콧김을 내 뿜으며 울부짖고 세상 모든 것을 떠받으려는 듯 땅을 박차고 있었다. 용솟음치는 분노와 저항, 그리고 생명력이 넘쳤다.

담뱃갑 은박지에 송곳으로 긁어 그린 선화(線畵)도 그 때 처음 보았다.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에는 밝고 장난기 넘치는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벌거벗은 채 서로 엉켜 뒹굴고 있었다. 또 하나의 세계, 거기에는 한마디로 도원(桃園)이 펼쳐져 있었다.

격정과 동심의 두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저 화가,  도대체 그는 누구일까?’ 나는 전율했다. 그러면서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머리에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III.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피난길에 나선 이중섭 일가는 천신만고 끝에 제주도 서귀포에 이른다. 거기서 그는 아내 마사코(이남덕)와 두 아들과 함께 바닷가 초가집 단칸방에서 곤궁하게 지낸다. 작은 양의 배급과 고구마, 그리고 잡아 온 게로 연명하는 생활이었다. 하지만, 뒷날 그의 평자(評者)들은 그 시절이 그의 불행했던 가족사 중 가장 행복했던 한 때로 기록하고 있다. 그곳에서 36세의 이중섭은 ‘섶섬이 보이는 풍경’, ‘서귀포 환상’, ‘바닷가의 아이들’을 그린다. 모두가 서귀포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한 목가적이고, 동화적이며, 가족적인 작품들이다. 거기에서 그는 오랜만에 다시 소 그리기에도 열중한다. 이중섭에게 11개월의 서귀포 생활은 그의 비극적인 생애 속에 아주 짧게 빛났던 찰나의 행복, 에덴의 체험이었다.

서귀포를 떠나고 이중섭의 삶은 다시 격랑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사랑하는 부인 마사코와 두 아들을 송환선에 태워 일본으로 보내고, 자신은 극심한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면서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을 계속한다. 처자에 대한 그리움과 생활고 속에서도 그의 예술혼은 더욱 치열하게 타오른다. 1953년 한 해 동안 ‘달과 까마귀’, ‘떠받으려는 소’, ‘소’, ‘노을 앞에서 울부짖는 소’, ‘흰 소’, ‘도원’, ‘길 떠나는 가족’ 등 그의 대표작들이 쏟아져 나온다.

말년의 그림 속에 이중섭의 ‘소’는 울음이 곧 터질 것 같고, 몸짓도 더 격렬해진다. 온몸으로 세상에 저항하고 있었다. 단말마(斷末魔)의 고통마저 느껴진다. 그가 처한 극한의 상황이 투사되는 듯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는 간간히 서귀포의 환상을 쫓으며 그 시절의 추억을 그림으로 옮겼다. 거기에는 사랑하는 가족과 아이들, 바닷가와 게가 있고 평화와 행복이 넘친다. 마사코에게 보내는 편지와 편지봉투에도 그림을 곁들인다. 거기에도 서귀포 시절이 에덴의 모습으로 아름답게 되살아난다.

1956년 그는 정신분열증 증세와 간염으로 끝내 41세의 나이로 적십자 병원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는다. 숨을 거두는 순간, 그에게 떠올랐던 마지막 영상은 무엇이었을까.

IV.

이중섭의 불꽃같은 예술혼과  비극적 생애는 마사코와의 국경을 넘는 사랑과 함께 이제 우리 모두의 전설이 되었다. 그가 불행한 삶 속에서도 행복했던 서귀포 시절이 있었다는 것은 무척 다행한 일이다. 서귀포에는 이중섭 미술관과 더불어 한국 최초로 화가 이름이 붙은 거리가 생겼고, 매년 그를 기리는 예술제가 열린다. 불우했던 그에게 에덴의 동산이 되었던 서귀포가 그를 독점한다고 한들 누가 무어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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