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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원암리 일기

2010. 11. 16. by 현강

   I.
나는 4년 전 서울을 떠나 강원도 속초로 내려 왔다.  2년 뒤, 새 집을 짓고 이곳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로 옮겨왔다. 먼저 살던 속초 아파트에서 차로 불과 20분 안쪽의 거리이지만, 이곳으로 이사 온 후  내 생활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당초 속초 생활에는 별 불만이 없었다. 산과 바다가 가까이 있어 좋았고, 속초라는 적당한 크기의 중소도시와 새로 지은 33평 아파트가 노년의 우리 부부에게 기대 이상의 안락을 제공했다. 그러나 속초 생활이 두 해째로 접어들 무렵부터 내 처가  “조그만 텃밭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라는 말을 자주 했다. 나는 그냥 귓전으로 들었다.

어느 날 속초 교외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아름답게 줄지어 선 소나무 사이로 예쁜 하얀 집이 눈에 띠었다. 집 구경도 할 겸해서 그 집 앞으로 다가갔다. 마침 집 앞에 나와 있던 그 집 부부가 반갑게 맞으며, 차나 한잔 하자며 집안으로 이끌었다. 그 분들도 서울에서 온 분들이었다. 우리가 속초에 산다고 하니 대뜸, “아니 서울 분이 이곳까지 내려와 아파트에 산다니 말이 됩니까.” 하는 게 아닌가.

그 때 불현듯 내 뇌리에 <아차! 그렇지. 속초는 기착지(寄着地)일 뿐, 목적지는 아니지>라는 생각이 스쳤다. 멀리 울산바위가 보이고 동해를 가까이 품에 안고 있지만, 그 곳은 역시 인공(人工)의 도시이고, 아파트 일 뿐, 내가 그리던 자연의 품은 아니라는 자각이 그것이었다.

이후 그 친절한 하얀 집 부부의 주선으로 그 댁 바로 옆에 작은 땅을 사서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이렇게 우리 부부의 이른바 ‘고성 시대’가 개막되었다. 

  
   II.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일생 도시 생활만 한 사람이다. 산과 바다를 좋아 하지만, 자연은 여태껏 나에게 그냥 추상적인 개념이거나 여가의 수단이었을 뿐, 내 삶의 공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내가 진정으로 ‘자연의 품’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할 때가 많다.

여기 와서 자연이 두려움의 대상이라는 것을 처음 배웠다. 서울에서 나는 태풍이나 폭설, 천둥, 벼락을 두려울 정도로 가까이 느껴본 적이 없다. 이런 자연현상으로 인한 재해는 남의 일이었고, 내게는 생활의 불편을 주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런 자연의 큰 손길들을 일상 속에서 만나고 피부로 접한다. 폭우와 함께 천둥, 벼락이 밤새 계속된다. 80cm가 넘는 폭설로 길이 막히고 집이 고립된다.  태풍이 파죽지세로 엄습한다. 이럴 때면, 정말 무섭고 겁난다. ‘외경(畏敬)스럽다’는 어휘만큼 적절한 표현이 없을 것이다. 인간의 역사가 자연의 정복사라고 하지만, 이럴 때 인간은 자연 앞에 한낮 작은 존재일 뿐이다.

그런가 하면, 자연은 정말 신비하고 아름답다. 사시사철 일어나는 자연의 변화, 꽃과 나무의 생장은 오묘하고 경이롭다. 초봄 연초록으로 물드는 앞산의 신록이나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 막 터질 듯 부풀은 꽃망울, 비낀 석양 속 들녘의 야생화, 새벽잠을 깨우는 이름 모를 아름다운 작은 새는 인간이 만드는 어떠한 인공적, 인위적 아름다움도 능가한다. 자연을 가까이서 보고, 느끼고, 함께 숨 쉴 수 있다는 것은 일상의 기쁨을 넘어 마치 나만의 특권처럼 느껴진다.

이곳은 산과 바다, 강과 계곡, 호수와 습지가 지척에 있다. 해 뜨는 동해와 석양의 설악을 매일 접하고, 백로와 고라니는 수시로 만난다. 내가 이곳에 와서 일생 처음 손대기 시작한 것이 카메라이다. 자연이 선사하는 순간의 아름다음을 그냥 뇌리에만 담기에는 너무 아깝고 아쉬워서이다. 물론 아직 간단한 디지털 카메라로 ‘찰깍’하는 왕초보 수준이다. 그러나 천하의 ‘기계치’인 내가 20년 전 컴퓨터 앞에 앉을 때는 ‘불가역적(不可逆的)’ 시대 변화에 굴복한 것이지만, 이번은 내가 솔선해서 기쁘게 나선 미학(美學) 여행 이다. 늘 사람 대신 자연을 쫓는다. 자연 속에 서식하는 갖가지 생물들도 내가 찍고 싶은 피사체이다. 지난 봄 차를 타고 가다가 잼버리 야영장 근처에서 멧돼지를 만났다. 200kg은 됨직한 큰 놈이 바로 옆에서 무섭게 돌진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사진기를 지참하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웠다.

이곳에 살면서 내가 얻은 또 하나의 변화는 일하는 기쁨이다. 집을 빼면 채 200평도 안되는 작은 땅이지만 그 마당을 가꾸는 일이 만만치 않다. 잔디 깔고, 꽃, 나무를 고르게 심고, 손바닥만 한 텃밭을 일군다. 그런데 한 여름철에는 적어도 하루 서너 시간의 마당 일감이 기다린다. 돌아서면 잡초라더니 잡초 뽑는 일이 만만치 않다. 또 벌레는 왜 그리 많은지, 밤이면 여기 저기 몸 긁기에 바쁘다. 그러나 몇 시간 마당에서 땀을 흨뻑 흘리며 일하고 나면, 오랜 등산 끝에 산마루에 올랐을 때 만큼이나 상쾌한 기분이다. 요사이는 마당일이 거의 끝났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을 한가로이 바라보며 앞마당에 떨어진 은행나무 낙옆을 쓰는 일이 고작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 집 마당일은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수준이다. 그래서 ‘노동과 놀이’를 함께 할 수 있어 좋다. 건강, 특히 정신건강과 마음수련에도 보탬이 된다. 무엇보다 내가 ‘노동하는 사람’(homo laborius)아라는 느낌이 나를 크게 기쁘게 만든다.

자연은 또한 나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도록 인도한다. 도시에서 바삐 살아갈 때는 생각을 ‘했다’기 보다, 생각을 ‘강요당했다’. 원고마감과 논문 재촉에 시달리며, 생각을 쥐어 짜서 남보다 다른, 그러면서 더 그럴듯한 생각을 펼쳐 보려 아등바등 했다. 현학적인 표현에도 집착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도시 그럴 필요가 없다. 자연의 품속에서 많은 생각이 자연스레 움튼다. 생각의 실마리를 찾으면, 즐겨 그 사고의 바닷속에 깊이 빠진다. 그러는 가운데 세상이 다 아는데, 나만 모르고 살았던 삶의 진리를 깨우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곳 농촌 사람들은 동창이 밝으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자리에 든다. 겨울에는 저녁 여덟시를 넘으면 동네가 깜깜 절벽이다. 농사가 생업이니 삶의 방식도 농번기, 농한기에 따라 천지 차이가 난다. 이렇듯 생활의 모든 단면이 자연에 맞춰 조율된다. 나도 이곳에 살면서, 자연을 거스르기보다, 그에 순응하며 사는 게 현명하다는 것을 몸으로 배운다. 그게 편하고 자연스럽다. 밤 12가 되어야 잠자리에 들 던 내 처도 이제 9시가 넘으면 잘 채비를 한다.


 III.
도시라는 인공적 공간 속에서 자연과 떨어져서 살았던 나에게 이곳 생활 하나하나가 신기하고 새롭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자연의 품속에서 산다는 일은, 인간에게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고 인간 본성에 맞는,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내가 그동안 엉뚱한 동네에 가서 타향살이를 한 셈이다.

‘자연’의 파생어인 ‘자연스럽다’는 ‘억지로 꾸미지 아니하여 이상함이 없다’, ‘순리에 맞고 당연하다’를 의미한다. 자연이 바로 그런 것이다. 영어로도 자연을 뜻하는 ‘nature'의 사전적 의미는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자연' 외에 '천성', '본성', '본질'을 뜻한다. 'naturally' 또한, '자연스럽게', '당연히', '생래적으로', 그리고 '물론'을 뜻한다. 자연은 어느 나라 말을 빌려도 이처럼 '있는 그대로' 내지 '마땅히 있어야 할' 그런 상태이며, 인간과 사물의 '천성'이자 '본질'이다. 두말할 나위 없는 '물론'의 개념이다.

내가 뒤늦게나마, 내 보금자리를 ‘마땅히 있어야 할 그 자리’, 자연의 품속에서 찾았다는 사실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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