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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부부애 바이러스

2010. 10. 3. by 현강

I
따져 보니 벌써 구년 전 일이다. 지난 2001년에 환갑을 기념하여 가까운 친구들 부부 열 쌍이 외국여행을 떠났다. 바삐 살다보니 부부가 함께 외국여행을 함께 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탓에 모두 들떠 있었다. 12일 일정으로 스페인, 그리스, 터키로 간 여행이었는데. 다른 이들이 끼지 않은 우리만의 여행이라 자유롭고 편안했다.

첫 기착지가 마드리드였던 것 같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공항 밖으로 나오는데, M 변호사 부부가 다정스레 손을 잡고 앞장을 서는 게 아닌가. 부부 사이가 좋다고 소문난 부부이기는 하나, 대 놓고 이렇게 돈독한 부부애를 과시하니 뒤에서 따라 오는 일행들은 심기가 조금 뒤틀렸다. 그래서 뒤에 친구들은 옆에 부인들이 극구 말리는 대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한마디씩 던졌다. “그림 좋다”, “그래, 잘해 봐라." “남부끄럽지도 않니”, "마누라가 무섭긴 무섭구나.,

가부장적인 가족문화에 익숙한 우리 세대에게는 초로의 부부가 손을 맞잡고 활보하는 일이 그리 흔치 않았기 때문에, M 변호사 부부의 사랑 표현에 대해 모두 얼마 간 충격을 받은 게 사실이다. 그래서 그들 커플을 향해 한 마디씩 빈정댔지만, 내심 그 용기가 부러웠고, 마치 일격을 당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II.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다음 날 관광차 거리로 나왔을 때, 우리 일행 중 두 쌍의 부부가 새롭게 손을 맞잡고 나서는 것이 아닌가. 그 중 한 친구는 전날 M 변호사 내외에게 가장 신랄하게 핀잔주었던 장본인이기에 우리 모두가 그의 표변한 모습에 아연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날은 나머지 부부들 누구도 그들 손잡은 부부들을 빈정대거나 비꼬는 이가 없었다. 다만 서로 보며 그냥 웃는데 그쳤다.

이후 한 쌍, 두 쌍 손잡는 부부가 늘어났다. 이제 누구도 이런 행동에 대해 왜 그러냐고 묻지도 않았고, 아무도 해명하지 않았다. 점차 그것이 마치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그러다 보니 며칠 후 부부 손잡기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관광 일정이 반쯤 접어들어, 우리 일행이 안달루시아의 그라나다에 이르렀다. 내가 알함브라 궁전의 환상적인 아름다음 취해 넋을 잃고 있을 때, 내 처가 느닷없이 내 손을 잡았고 나도 못이기는 채 맞잡았다.

그러다가 웬걸 우리가 마지막 코스인 이스탄불에 이르렀을 때는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10쌍 전원이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고 희희낙락 관광에 열중하고 있었다. 첫날 M 변호사 커플이 단초를 연 부부 손잡기가 이처럼 강력한 후폭풍을 몰고 올 줄은 실로 아무도 예감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첫 부부가 손잡은 모습이 좋아 보였고, 차츰 그래야 마땅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것이 마치 전염병처럼 급속한 속도로 번져 간 것이 아닌가 싶다

 

III.
그 때 함께 여행했던 부부들은 이후 동네 산책길에서도 빠짐없이 손을 꼭 잡는다는 후일담이다. 우리 부부도 이제 어디가나 스스럼없이 손을 잡고 다닌다. 처음에는 조금 멋쩍었지만 하다 보니 이제 손을 떼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됐다.

어제 속초 시내에 나갔다가 마주 오던 젊은 부부로부터 인사를 받았다. 그들은 손을 잡고 있지 않았다.

 

“어르신들, 두 분이 손을 꼭 잡고 가시는 모습이 정말 보기 좋습니다.”

 

그들 부부도 머지않아 손을 맞잡을 것이 분명하다. 부디 부부 손잡기가 강력한 바이러스처럼 더 크게 번져 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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