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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190

이중섭의 에덴 I. 이미 십 년이 지났으니 한참 된 얘기다. 서귀포에 들렀다가 이중섭 미술관을 찾았다. 우리 부부 외에 다른 관람객은 없었다. 전시장을 둘러보는데, 미술관 관계자인 듯한 분이 눈인사를 했다. 큐레이터나 아니면 자원봉사자가 아닐까 싶었다. 내가 그에게 “미술관 관계하시는 분이신가 보죠?” 하고 말을 건네자, 그는 “네, 혹 도울 일이 있나요?”하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함께 작품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이런저런 말을 나눴다. 그러다가 내가 그에게 심술궂은 질문을 했다. “이중섭은 이곳에 채 1년도 체류하지 않았는데, 서귀포가 이중섭을 온통 독점하고 있네요. 이중섭 미술관에다 이중섭 거리까지. 조금 지나친 게 아닌가요?” 그러자 그는 가볍게 미소를 머금으며, “이중섭 씨가 여기서 주옥같은 그림을 많이 그렸.. 2010. 11. 7.
행복론 I. 얼마 전 한 연구모임에 참가 하였다, 그 날 토론 주제는 에 관한 것이었다. 발제자가 행복과 연관하여 여러 가지 흥미로운 사회과학적 연구를 소개했고, 그에 대해 참가자들이 폭넓은 담론을 펼쳤다. 행복은 일정 수준의 경제적 부(富)와 연관될 수는 있어도, 그것이 부의 크기와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명제에 대체로 동의했다. 아울러 행복은 주관적 느낌이며, 문화권이나 나라, 혹은 개개인에 따라 행복을 느끼는 방식이 다르다는 점도 많이 지적되었다. 그날 논의과정에서 나는 행복과 연관하여 사람들의 유형을 성취형(成就型), 영성형(靈性型),일상형(日常型)의 세 가지로 나누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성취형은 일정한 목표를 따라 매진하면서 그 성취를 통하여 행복을 느끼는 유형이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성취.. 2010. 11. 1.
이웃집 웬수 I. 나는 요즈음 TV 주말 연속극 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연속극에 한번 빠지면 계속 보기에 시간이 아까워 가급적 피하는데 이 드라마는 거르지 않고 보고 있다. 이 드라마를 화제에 올렸더니, 한 친구가 내게 이 프로를 즐겨 보는 이유를 물었다. 나는 “건강해서, 그리고 쏠쏠한 재미도 있고”라고 답했다. II. 내가 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를 스스로 따져 보았다. 대체로 다음 몇 가지로 간추려 질 듯하다. 우선 최근 TV에 소위 막장 드라마가 판을 치는데 에는 복수, 살인, 불륜, 치정, 배신과 같은 추하고 어지러운 내용이 없어서 좋다. 큰 분노나 격정, 불안을 자아내는 장면도 별로 없다. 그래서 비교적 정서적으로 편안하게 볼 수 있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은 좋은 사람이거나 적어도 괜찮은 사람이다.. 2010. 10. 24.
운명 앞에 서서 I. 1964년 늦가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마지막 학기 때 일이다. 그때 내가 총무처에서 인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자 친구와 중앙청 근처에서 만날 약속을 했다. 둘이 떨어진 은행잎을 밟으며 몇 걸음 걷다 보니 당시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들던 유명 역술인 김봉수의 점집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재미삼아 한번 들어가 보자고 했다. 여자 친구도 쉽게 동의해서, 난생 처음 점술가를 찾았다. 엄청나게 큰 방에는 사람들이 꽉 차있었다. 겨우 비집고 들어가서 등록을 했다. 성명만 달라고 해서 내 이름만 적었다. 어렵사리 자리를 잡다 보니 여자 친구와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앉게 되었다. 김봉수씨는 한복차림으로 앉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고객의 운세를 구변 좋게 설파하고 있었다. 말투는 거의 반말지거리였는데, 그게 오.. 2010. 10. 16.
장용학 선생님의 추억 I. 1956년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이다. 한창 오수가 밀려오는 5교시, 장용학 선생님이 담당하는 국어 시간이었다. 교탁 앞에 서신 장 선생님의 모습이 그날따라 예사롭지 않았다. 가뜩이나 우울해 보이는 얼굴인데 분노로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흥분을 가라앉혀 보려고 애쓰시는 품이셨다. 그러나 끝내 폭발했다. 마치 활화산에서 용암이 분출하는 느낌이었다. “이 놈들아, 너희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로 시작한 그의 토설은 10여 분 계속되었다. 말씀인 즉, 내가 다니던 K 고교에 오자면 안국동 로터리에서 풍문여고 옆 골목으로 접어들어 덕성여고를 거쳐 화동 언덕으로 올라와야 되는데, 덕성여고 앞에 앉아서 구걸하는 걸인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행태가 돼 먹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 2010. 10. 7.
부부애 바이러스 I 따져 보니 벌써 구년 전 일이다. 지난 2001년에 환갑을 기념하여 가까운 친구들 부부 열 쌍이 외국여행을 떠났다. 바삐 살다보니 부부가 함께 외국여행을 함께 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탓에 모두 들떠 있었다. 12일 일정으로 스페인, 그리스, 터키로 간 여행이었는데. 다른 이들이 끼지 않은 우리만의 여행이라 자유롭고 편안했다. 첫 기착지가 마드리드였던 것 같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공항 밖으로 나오는데, M 변호사 부부가 다정스레 손을 잡고 앞장을 서는 게 아닌가. 부부 사이가 좋다고 소문난 부부이기는 하나, 대 놓고 이렇게 돈독한 부부애를 과시하니 뒤에서 따라 오는 일행들은 심기가 조금 뒤틀렸다. 그래서 뒤에 친구들은 옆에 부인들이 극구 말리는 대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한마디씩 던졌다. “그림 좋다”, .. 2010. 10. 3.
글을 쓴다는 것 I. 돌이켜 보면 나는 평생 글 고민을 머리에 달고 살았다. 늘 원고 재촉에 시달렸고, 그렇지 않더라도 새로 쓸 글 주제를 구상하고, 그 얼개를 만들기 위해, 또 거기에 그럴듯한 내용을 담아내기 위해 내 머리는 언제나 글 걱정으로 가득 찼다. 그러다 보니 비단 책상머리에 앉았을 때뿐만 아니라, 지하철 안에서나 등산길에서도, 심지어는 잠자리에 들면서도 글 고민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내가 공부바탕이나 지적 통찰력이 뛰어나지도 못하면서 글 욕심은 있는 편이었기에 더 힘겨웠던 것 같다. 글 걱정과 부족한 능력 때문에 얼마간 고단한 삶을 영위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생활을 스스로 그리 불행하다거나 견디기 어렵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오히려 글과 더불어 바쁘게 사는 데 따르는 긴장감과 .. 2010. 9.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