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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부끄럼에 대해

2011. 2. 13. by 현강

    I.

나는 어려서부터 부끄럼을 꽤 많이 탔다. 그래서 남들 앞에 나서기를 망설일 때가 많았고 별스럽지 않은 일에도 자주 얼굴을 붉혔다. 나이가 들면 나아지려니 했는데, 아직도 별로 나아질 기미가 없는 것을 보면 이것이 천성인 듯하다.

신문에 글은 자주 썼지만 1995년 처음 정부에 들어갈 때까지 한번도 TV나 라디오에 나간 적이 없었다. 여러 번 출연 요청이 있었으나 언제나 한 마디로 거절했다. TV 출연한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렸고 얼굴이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TV에 자주 출연하는 다른 ‘스타 교수’들에 대해 비난하거나 질시하는 감정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나와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거니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천만다행인 것은 내가 꼭 해야 할 일을 할 때는 그 부끄럼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이다. 대학에서 강의할 때나, 학회에서 발표 할 때, 또 가끔 외부에서 특강을 할 때는 별다른 부담 없이 자연스럽게 임하곤 했다. 정부에 들어가 두 번 장관직을 수행하는 동안 수없이 TV에 출연했는데, 내심 불편한 심경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게 내 일이다’라고 생각하니 수줍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때 수없이 대담, 토론, 특강 등에 나섰는데, 주저하는 마음이 생길 때 마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정치가였던 ‘앙드레 말로’를 떠올렸다. 말로는 드골 정권하에서 매우 성공적으로 문화상(文化相)직을 수행했는데, 당시 그는 시민과 잦은 소통을 통하여 대중의 의식 속에 정부의 문화정책을 깊숙이 심었다.  

그러나 정부에 있을 때도 천성적 부끄럼 증은 항상 나를 따랐다. 장관의 공식적 역할을 할 때는 멀쩡하다가도 비공식적 모임이나 사적인 어울림에서는 늘 이 병이 도지곤 했다. 장관을 하다 보면 직접 일과 연관되지 않는 외부 행사나 리셉션에 참여하는 일이 적잖은데, 그런 날이면 아침부터 마음이 불편하고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특히 정치인, 재계 인사 등이 많이 참여하는 리셉션 때는 더 그랬다. 그런데 가게 되면, 별로 아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분위기에도 익숙하지 않아 주변에 잠시 머물다가 슬그머니 빠져나오곤 했다. 

장관을 그만 둔 후에는 TV 출연을 한 적이 없다. 생각만 해도 ‘부끄럽기’ 때문이다. 택시를 탔다가 기사가 우연히 내 얼굴을 기억하고 말을 걸어오면, 반갑기보다는 부끄러워 좌불안석이 된다. 이곳 속초/고성에 살며 마음 편한 것 중 하나가 여기서는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부끄러울 계기가 없기 때문이다. 

부끄럼을 타는 내 성격이 나를 소극적으로 만들고, 행동반경을 좁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내 스스로 그런 습성을 그리 나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부끄럼을 아는 마음을 잘 가꾸면 매우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II.

성격 탓인지, 나는 부끄럼을 아는 사람, 얼마간 ‘shy'한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얼마 전에 돌아가신 박완서 선생님이 부끄러운 듯 짓는 수줍은 미소를 무척 좋아했다. 그 분은 팔순에도 언제나 소녀의 부끄러움을 간직하고 계셨다. 돌아가신 후, 박 선생님이 새색시 때 아기를 안고 찍으신 사진이 공개되었는데 거기에도 예의 때 묻지 않은 수줍은 미소가 빛나고 있었다. 박완서 선생님은 글이나 언행 모두 바르고 당당하셨던 분이다. 나는 그 분이 자신의 강직하고 올곧은 속내를 수줍고 따듯한 미소로 감싸고 계셨기에 더 좋아했던 것 같다. 박완서 선생님의 글,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는 그 분의 생활철학이 담긴 작품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 일으켰을 것으로 생각한다.  

<간디 자서전>을 보면 간디도 꽤나 부끄럼을 많이 탔던 사람이다. 영국서 공부하고 돌아와서 변호사 일을 시작했는데, 첫 변론에서 눈앞이 캄캄해 져서 아무 말도 못하고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주저앉는다. 스스로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개인적 이득을 위해 다른 사람 앞에 나서는 일이 부끄럽고 떳떳치 못하다고 느꼈다. 결국 생계의 수단으로 변호사직을 하는 일을 포기했다. 그러던 그가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지는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정책에 분노하면서, 결연히 인종차별 반대투쟁에 앞장을 선다. 공공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천성적인 부끄러움을 극복한 것이다. 이후 그는 인도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도자로, 인도 건국의 아버지로, 그리고 금세기 마지막 성자로 보람찬 생애를 이어간다. 그의 비폭력저항운동의 근간이 되었던 ‘사티아그라타’(‘진리의 파지把持’) 정신은 ’불상해‘(不傷害), ’극기‘, ’금욕‘를 바탕으로 하는데, 나는 이 원칙들이 모두 부끄럼을 아는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간디는 자서전에서 자기가 워낙 부끄럼을 타기 때문에 유리한 점이 있는 데, 그것은 무슨 말을 할 때 그냥 내뱉지 않고 조심스럽게 되씹어 보고 말을 하기에 별로 말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겨 둘 만한 얘기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간디는 단순히 부끄럼을 탔던 순진한 사람이 아니라,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진리 파지’의 지렛대로 승화시켰던 위대한 사상가였다. 

석가는 두 가지 ‘깨끗한 법(二淨法)’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것’과 ‘남에게 부끄러워하는 것’이며, 이 두 법에 의해 세상은 보호된다고 설파하셨다. 우리는 흔히 남에게 부끄러워하는 것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자기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지난날을 되돌아보면서 낮 뜨거워 견디기 어렵고, 스스로 환멸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나는 스스로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마음은 실로 보배 같은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부끄러움이라는 잣대 없이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자기 성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III,


부끄러움은 우리의 피폐한 마음을 정화(淨化)시키는 위대한 힘을 갖고 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노래했던 윤동주의 시심이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것도, 바로 ‘염치’(廉恥)를 갈구하는 우리 내면의 순수한 욕구 때문이 아닐까.

박완서는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에서 중년여성인 화자(話者)를 통해 모처럼 찾아 온 ‘부끄러움의 통증’과 그것을 만인이 공유하고 싶은 간절한 심경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처음엔 나는 왜 내가 그 말뜻을 알아들었을까 하고 무척 미안하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몸이 더워오면서 어떤 느낌이 왔다. 아 아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 느낌은 고통스럽게 왔다. 나는 마치 내 내부에 불이 켜진 듯이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나는 각종 학원의 아크릴 간판의 밀림 사이에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깃발을 퍼러덩 퍼러덩 휘날리고 싶다.”

 

              

 <박완서 새댁시절 시어머님과>                         <첫 따님을 안고> 


                <영정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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