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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고 이태석 신부가 남긴 것

2011. 3. 1. by 현강

      I.
‘울지마 톤즈’는 절망의 땅 남수단에서 신부, 의사, 교사로 헌신적으로 봉사하다 48세로 선종한 이태석 신부를 기리는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 정신세계가 힌 눈처럼 하얗게 순수한 빛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전편이 다 감동적이었지만, 그 가운데 아래 두 장면은 내게 긴 여운을 남겼다.

그 하나는, 외국인 노신부 한 분이 “왜 하느님께서 나처럼 나이 많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을 놔두고 이 젊고 유능한, 그리고 할 일 많은 신부님을 데려가셨는지”하며 안타까워하던 장면이다.

또 하나는 이태석 신부의 육친 형님인 이태영 신부가 동생의 죽음에 대해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었던 그 삶이 부럽고, 그렇지 못한 나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라고 말한 대목이었다.

이 두 장면은 비단 나에게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공감의 물결을 일렁이게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II.

첫 번째 대목은 따지고 보면 청소년 시절, 어린 이태석이 하느님께 던졌던 바로 그 의문이기도 하다. 그가 고3 때 작사, 작곡한 성가 ‘묵상’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실로 많은 이들이 바로 하느님의 이러한 불가해(不可解)한 섭리에 대해 회의하고, 고민하며 힘겨워한다 그러다가 어떤 이는 아예 신에게 등을 돌리고, 다른 이는 절망의 심연에서 그를 한껏 원망하며 멀어진다. 대다수가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기 어려운 신의 섭리에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래도 적지 않은 이들이 은총과 믿음의 힘으로 다시 그에게 다가간다.

우리가 결국 하느님이 하신 일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하더라도 그분이 이태석 신부를 그토록 일찍 데려가신 ‘숨은 뜻’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은 외국인 노신부에게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는다.

     III.

이태석 신부의 ‘예수님을 닮은’ 불꽃같은 생애는 우리 모두의 영혼을 온통 흔들어 놓았다.  그의 아깝고 이른 죽음 앞에서 우리는 잠시나마 오늘 자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얼마나 덧없고 하찮은 것인지 절감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세상을 사는 이유, 인류의 꿈과 희망, 먼 이웃, 사랑과 봉사,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명상하며 가슴 저리는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아울러 정작 우리가 지향하고 부러워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깨달았고, 그 길을 가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몸서리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런 가운데 이 순수하고, 절절한 기억이 부디 우리 마음속에 오래 살아 있기를 기원했다.

형님 신부의 말씀을 빌리지 않아도 이태석 신부는 이처럼 오롯이 자신을 봉헌하여 남겨진 우리 모두의 영혼을 정화(淨化)하고 부끄럼의 참뜻을 가르쳤다.

III.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로부터 이태석 신부를 그처럼 일찍 데려가신 ‘숨은 뜻’을 다시 묵상해 본다. 하느님은 자신을 가장 많이 닮은, 그래서 더없이 사랑스러운 이 아름다운 목자를 왜 그리 서둘러 자신의 품으로 불러 들이셨을까.

혹시 그의 죽음을 매개로 부끄러움을 잊고 사는 우리 모두를 세차게 흔들어 깨워, ‘부끄러움’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시려는 뜻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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