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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한국인의 의식구조

2011. 1. 29. by 현강

I.
약 20년 전, 그러니까 1990년 전후에 나는 모 일간신문이 실시하는 전국규모의 여론조사에 두 해 거푸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 조사 설계 단계와 조사결과를 평가하는 데 관여했는데 그 과정을 통해서 한국인 특유의 의식구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두 번의 조사에서 무척 인상적이었던 내용이 있었다. 구체적인 자구(字句)는 기억이 나지 않으나, 대부분 한국인이 ‘오늘 한국의 경제 현실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매우 나쁘다.’라는 부정적 평가를 하는 반면에, ‘3년 후 한국 경제를 어떻게 전망하느냐?’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꽤 잘 될 걸’이라는 낙관론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를 매우 어둡게 평가하면서, 불과 몇 년 후의 내일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낙관적 확신을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그리 자연스럽지 않다. 그러나 나는 바로 이 대목이 한국인의 의식구조의 매우 주요한 특성이 담겨 있다고 본다.

  II.

대체로 한국인은 눈앞에 전개되는 현실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그들은 세상의 현재 모습에 대해 가혹할 정도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따라서 비단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나 사회의 현실에 대해서도 호의적, 긍정적 평가보다는 매우 비판적, 부정적인 평가를 많이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처럼 암울하기 짝이 없는 현실에 직면해서, 적당히 그 그늘에 안주하거나, 좌절 혹은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심경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현실 극복에 나선다. 따라서 그들에게 ‘현재’라는 시제는 상황의 절박함과 개혁을 향한 타는 목마름, 그리고 용솟음치는 도전의식을 일깨우는 신호탄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인지하는 참담한 오늘의 현실이 더 이상 추락의 낭떠러지가 되기보다는 새로운 비상을 위한 도약대가 된다.

 현실이 아무리 각박해도 한국인은 미래에 대해 낙관주의의 편에 선다. 그러나 그들의 낙관주의는 ‘잘되겠지’ 하는 막연한 희망적 기대가 아니라, ‘냉혹한 현실 판단’과 ‘최선을 다 하겠다’라는 결의와 자신감을 바탕으로 하는 근거 있는 낙관주의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인에게 열악한 ‘오늘’과 성공적 ‘내일’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최선을 다 한다’라는 자신을 향한 강한 명령어이다.

 나는 한국인 특유의 이러한 ‘낙관주의’는 기질적이라기보다, 얼마간 ‘학습 된 특징’(learned traits)이 아닐까 생각한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후진 농업사회에서 선진 산업사회 내지 후(後)산업사회로 거대한 사회이동을 했고, 한국전쟁의 참담한 잔해 위에서 압축 경제성장과 정치 민주화라는 기적을 창출했다. 그뿐인가. 세계화 시대의 경제위기들, 즉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도 극복했다. 비록 고난의 역정이었으나, 이 성공의 역사 속에서 한국인은 ‘하면 된다.’라는 범국민적 학습을 할 수 있었고, 그것은 우리 의식 속에 문화적, 심리적 유전자로 깊숙이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III.

'최선을 다 하면 분명 이루어진다.‘ 라는 한국인 특유의 낙관주의는 분명 우리의 큰 정신적 자산이다. 그것은 한국의 더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주요한 원동력이 될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나는 지난 시대에 우리가 ’최선을 다 했던 방식‘ 이 계속 미래의 성공을 담보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자못 회의적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성찰적 관점에서 기존의 ’방식‘ 에 대해 곰곰이 다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하면 된다.‘는 한국형 낙관주의 안에 숨겨져 있는 몇 가지 주요한 위험요소들, 즉 단선형(單線型) 사고, 압축성장의 미몽(迷夢), 그리고 모험주의를 되짚어 보고 그 극복의 필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근래에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나,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가 가장 열망했던 삶의 목표가 ‘잘 살아보자’ 였다. 이 욕구는 경제성장이라는 목표 속에 집약되었고, 삶의 다른 목표들은 평가절하 되었다. 그 결과 경제성장과 물질적 풍요 위주의 단선형 사고가 우리의 인식구조 속에 깊이 자리 잡았다. 그러다 보니 부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는 빈부격차와 사회적 유대의 약화 등 적지 않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따라서 이제 우리의 삶의 목표도 먹고 사는 것을 넘어, ‘사람답게 사는’ 쪽으로, 그리고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쪽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의 삶의 목표도 보다 다양화, 유연화, 균형화 되어야 하며, 사고의 진폭과 깊이도 보다 확장, 심화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의 현대사는 압축성장의 신화를 낳았다. 아직도 우리는 ‘빠른 성공’에 크게 집착한다. 그러나 압축성장은 불가피하게 과도한 성과주의, 목표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과정을 소홀히 하는 경향, 그리고 졸속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고도성장이 가능했던 산업화 시대에는 시간단축이 성공의 열쇠였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양 보다는 질, 창의성과 문화적 세련미, 그리고 안전사회 추구의 치밀성이 요구되고, 압축성장 보다 지속가능한 발전이 중시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도 압축성장의 미몽에서 깨어날 때다.

 모험주의 또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위험요소이다. 고도성장 시기에 우리는 정해진 목표를 향해 온갖 위험을 감수하면서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단선궤도를 돌진하는 ‘마초’(macho)의 습성을 몸에 익혔다. 그러다 보니 부지불식간에 모험주의가 일상화되었고, 위험 불감증에 물들어 버렸다. 북한리스크를 비롯하여 각종 최첨단 테크놀로지에 의한 위험 등 도처에 위험이 도사린 오늘, 한국이라는 ‘고도 위험 사회’에서 모험주의는 자칫 체제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 치명적 위험요소가 될 수 있다. 혁신을 위해 얼마간 ‘계산된 위험’은 필요하다. 그러나 ‘저지르고 보자’는 식의 모험주의는 절대 금물이다. 체제능력의 근본적 개선을 위해서는 치밀한 위험관리가 필수적이다.

  IV.

‘최선을 다 한다’는 한국형 낙관주의는 한국인의 큰 자산이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는 방법’은 이제 시대 변화에 부응하여 바뀌어야 한다. 우리의 삶의 지향도 한 차원 높은 ‘인간화’를 겨냥해야 하며, 이를 위해 보다 깊이 생각하고, 두루 살피고, 바른길을 찾으며, 치밀하게 준비하여야한다. 얼마간 동양화의 여백 같은 여유도 있었으면 좋겠다. 이러한 재(再)학습화, 재()사회화 과정을 통하여 ‘하면 된다’라는 낙관주의 유전자도 그 원형질은 지키면서, 그 방식은 발전적으로 변형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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