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단상

연구실 연가(戀歌)

2011. 1. 9. by 현강
  I.
2006년 12월 정년퇴임을 앞두고 마지막 학기 대학원 수업이 끝났다. 학생들과 섭섭한 정을 나누는데 한 원생이 내게 물었다.

 “30여 년 교단에 스셨는데, 정년을 앞두시니 정말 안타깝고 발걸음이 안 떨어지시죠.”

그런데 내 대답은 좀 엉뚱했다.

 “얼마간 섭섭한 건 사실이지. 하지만, 기쁜 마음이 더 크네. 정년 후 생활을 생각하면 막 가슴이 뛰어. 다 접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 수 있다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네.“

그러자 다른 학생이 질문했다.

 “저희 떠나시는 일이 그렇게 즐거우시다니 섭섭하네요. 그래도 제일 아쉽고 놓치고 싶지 않은 게 무엇이세요.?” 

내 대답은 짧고 명확했다.

 “연구실을 떠나는 것이네. 그게 정말 못 견디게 힘드네.”


  II.
연희관 317호, 그곳에서 나는 약 17년을 보냈다. 연구실을 몇 번 옮겼는데, 거기에 제일 오래 있었고 또 그 방이 내 마지막 연구실이었다. 다른 연구실은 복도 양편에 도열되어 있는데, 이 연구실은 연희관 3층 복도 옆문을 열고 들어가야 마주하는, 그래서 다른 연구실보다 한 겹 뒤에 깊숙이 자리한 방이다. 덕택에 낭하의 왁자지껄하는 소음으로부터 차단되어 방에 들어서면 조용하고 아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창문 밖 풍경도 일품이다. 위치가 조금 높아 연세대학교 정문부터 본관에 이르는 백양로가 훤히 눈앞에 열리고 유서 깊은 본관 건물이 바로 눈 아래 보인다. 멀리는 아스라이 한강과 여의도가 가물거린다. 그리고 바로 창 밖에는 명품 은행나무가 위용을 자랑한다. 내가 늘 조교에게 ‘연세 대학교에서 가장 잘생긴 나무’라고 말하던 그 나무다.

연구실은 나만의 작은 왕국이었다. 책으로 둘러싸여 운신조차 불편한 10평도 안되는 비좁은 공간이지만. 그곳은 언제나 충만한 느낌이었다. 최상의 자유와 풍요, 그리고 행복을 느꼈다. 늘 일거리와 쓸거리에 쫓겼지만 이곳에 들어서면 이상하리만큼 느긋한 여유와 평정심, 그리고 자신감이 샘솟는다. 거기에는 고향 같은 포근함과 절간 같은 그윽함이 함께 있었다.  

집이 가까워 나는 아침 7시 반이면 연구실에 나왔다. 아주 바쁘지 않으면 연희관 바로 옆에 자리한 청송대(聽松臺)를 한 바퀴 돈다. 이곳은 연세대에 얼마 남지 않은 천혜의 자연명소이다. 소나무와 도토리나무가 가득한 숲 속에는 청정한 기운이 감돌고 온갖 새소리가 가득하다. 서울이라는 인공도시에 이런 자연의 섬이 존재한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사철 아름답지만, 특히 이곳의 늦가을 정취는 정말 환상적이다. 매일 아침 이런 곳에서 사색과 산책을 할 수 있다니. 어디 그게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호사인가.

강의가 없을 때는 온 종일 연구실에 머문다. 책 읽고, 글 쓰고, 학생 상담하고 가끔 손님도 맞는다. 조교와 함께 있지만, 연구실 안은 시간이 멈춘 듯 정적이 감돈다. 컴퓨터가 바로 창가에 있어 일하면서 가끔 창밖으로 눈을 돌린다. 떠도는 구름도 보고 계절의 흐름도 감지한다. 어떤 때는 본의 아니게 본관 건물을 오가는 총장을 비롯한 대학 수뇌들의 동정(動靜)이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웃으며 내려다 볼 수 있어 재밌다.

몸이 나른하게 가라앉는 오후 4시면 다시 산책에 나선다. 연희관 옆 빌링슬리관을 끼고 숲길 따라 산비탈로 오르면 대학의 서쪽 경계를 이루는 오래된 담장이 나온다. 그 담을 끼고 산길로 이과대학 너머 서문 근처까지 갔다가 되돌아온다. 돌아올 때는 좀 멀리 상경대학 너머 산 중턱 초소까지 갔다 올 때가 잦다. 빠른 걸음으로 왕복 약 30분 걸리는 호젓한 숲길인데, 인적이 드물다. 간혹 다람쥐와 꿩은 만나도, 사람과 조우하는 일은 거의 없다. 

땅거미가 질 무렵, 연구실에서 내려다보이는 본관의 실루엣은 정말 아름답다. 고전미 넘치는 사진작품을 연상시킨다. 얼마 후 본관의 불이 하나, 둘 꺼지고 건물이 어둠 속에 잠긴다. 저녁 아홉 시, 나도 집으로 갈 채비를 한다. 고개 넘어 걸어서 20분이면 우리 집이다.


   III.
연희관 317호실은 연세대학교의 최고 명당이라고 신문에 몇 번 올랐다. 내가 이 방의 세 번째 주인인데, 첫 주인이 1980-1987년 간 연세대학교 9, 10대 총장을 지낸 안세희(물리학) 교수이고, 두 번째 주인이 1990-1992년 간 문교부장관을 지낸 윤형섭(정치학) 교수이다. 1990년 내가 이 방으로 연구실을 옮긴 후 1995-1997년, 2003-2005년 두 차례 교육부 수장을 역임하자, 언론에서 명당이라고 소문을 낸 것이다. 

내가 장관에 임명되었을 때, 두 번 다 첫 기자회견을 이 연구실에서 했다. 장관직을 수행하는 동안에도 언제나 이 방이 내 마음의 고향이었다. 그 시절 연희동 우리 집에서 세종로 중앙청사로 출퇴근했는데, 지름길이어서 연세대 캠퍼스 안을 통과해서 다녔다. 그때마다 나는 고개를 내 연구실 반대쪽으로 돌렸다. 연구실 쪽을 바라보면 ‘아, 내가 저곳에 있어야 하는데’ 라는 죄스러움 때문에 가슴이 미어져서였다. 정부에 있을 때도 일요일 아침이면 학교 뒤 안산(鞍山)에 오르곤 했다. 그런데 내려올 때는 으레 연구실에 들러 혼자 한 시간가량 머물다 온다. 딱히 할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심신을 위로받기 위해서였다. 연구실에서 잠시 명상에 잠기면 그간 공직에서 쌓인 천 겹, 만 겹의 풍진(風塵)과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지고, 나랏일에 대한 새로운 소명(召命)을 감지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희관 317호실은 내 지친 영혼을 치유하는 성소였다.  

장관을 그만 두는 날에는 퇴임식 후에 차관, 실. 국장들과 저녁을 같이 한다. 이때 이들 관료들은 섭섭한 정을 피력하며 연민에 가까운 눈빛으로 떠나는 나를 위로한다. 그 때 나는 그들에게 “여러분과 헤어지는 것은 서운한 일이지만, 나를 애타게 기다리는 연구실이 있어 지금 내 가슴은 무척 벅차다”고 말한다. 그들이 내 진심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퇴임 후 나는 집에서 하루를 쉬며 오래 밀린 잠을 잔다. 그리고 그 이튿날 아침이면 귀향하는 기분으로 다시 연구실로 향한다. 두 번 다 그렇게 했다. 

그러나 세월은 나를 이 오랜 보금자리에서 밀어냈다. 아쉽고 한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년 후 두어 차례 연희관을 찾았으나, 내 옛 연구실에는 일부러 들리지 않았다. 새로 꾸며진 연구실을 둘러보며 내 머릿속에 전설처럼 깊게 각인된 317호실의 옛 이미지가 흔들릴까 두려워서였다. 

  V.
이곳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는데, 집터 예정지 앞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위세 좋게 서 있었다. 집 짓는 일을 준비하던 대목(大木)이 나에게 물었다. 

“교수님이 울산바위, 울산바위 하셨는데 저 은행나무들이 울산바위 쪽 시야를 조금 가리는 데요. 괜찮으시겠어요? 아예 베어버리시던가.” 

나는 서둘러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얼마나 멋집니까. 은행나무라면 제가 미칩니다. 내가 조금 비켜서면 되는 데요”

그러면서 이게 필시 무슨 인연이거니 생각했다. 지금도 나는 계절 따라 변하는 집 앞의 은행나무를 볼 때마다 옛 연구실 앞 은행나무가 오버랩 되어 내게 정겹게 다가온다. 

    
   

'삶의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억 속의 보좌 신부님  (2) 2011.01.23
은퇴후 '시골살이'에 대하여  (2) 2011.01.16
새해 새 아침  (1) 2011.01.01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5) 2010.12.24
연평도 사격훈련을 재고하라  (2) 2010.12.18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