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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기억 속의 보좌 신부님

2011. 1. 23. by 현강

 

* 이 글은 1985년 3월 31자 <가톨릭 신문>에 게재되었던 글을 다시 실린 것이다. 
 
원문 뒤에 실은 후기는  이  블로그에 처음 소개한다.

 실로 오랜만에 대구를 찾았다. 1.4 후퇴가 있던 해인 1951년 이곳으로 피난 와 열한 살 소년시절을 보낸 후 몇 번 스쳐는 갔지만 정작 이번처럼 하루를 묵으며 여유있게 옛 추억을 더듬기는 처음이었다.

 교우인 제자와 함께 계산동 성당도 찾았고 성모당에도 올랐다. 퇴색한 기억 속에 바로 성당 뒤에 붙어 있는 것으로 여겨졌던 성모당은 훨씬 떨어진 주교관내에 있었다. 그러나 고풍스런 성당의 붉은 벽돌이나 쌍을 지어 우뚝 솟은 뾰족 십자가는 기억 그대로 정겨웠고 그윽하게 가라앉은 성모당의 경건한 분위기는 그때나 다름없이 가슴에 스며들었다. 바로 이 두 곳이 전쟁에 찢긴 어린 소년의 영혼을 달래주던 안식처였거니 생각하니 벅찬 감회를 누르기가 어려웠다.

1 ,4 후퇴가 있던 해 겨울의 추위는 대단했다.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열사흘을 걸어 대구에 도착했을 때는 심신의 피로가 극에 달했고, 외가인 평택을 떠날 때 뒤를 쫓던 포화소리가 그대로 귓전에 남아 있었다. 대구에 정착한 이후에도 어려운 피난생활이라 학교에 다닌다는 것은 엄두도 못했다. 신문도 팔아보았고, 어머니 바느질감을 받으러 중앙로 뒷골목을 서성거리기도 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마땅히 고달파야했을 이 시절이 그 때나 이제나 꽤나 행복했던 시절로 뇌리에 각인되는 것은 무엇보다 계산동 성당과 성모당이 나에게 선사해 준 사랑의 묘약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 때 열한 살 자리 소년은 성당 다니는 기분으로 살았고 또 스스로 성소(聖召)를 받았다고 느꼈다. 서울에서 엄마 따라 건성으로 성당 문턱을 드나들던 나를 이처럼 바꿔 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는 당시 계산동 본당 보좌 신부님으로 계시던 젊은 신부님이셨다. 부끄럽게도 이젠 성함도 기억 못하는 이 신부님의 따듯한 손길이 나의 대구 피난시절을 아름답게 수놓아 준 것이다. 그 신부님을 기억에 올리면 항상 다가오는 감격스런 장면이 있다.

 언젠가 보좌 신부님이 교리반 아이들을 모아, 성당에서 봉사해야 할 역할에 따라 어린이들을 몇몇 그룹으로 나누셨다. 신부님께서는 우선 각자가 원하는 데로 지망을 하게하고 경합이 심한 그룹은 다시 조정한다는 원칙을 미리 밝히셨다.

 누구나 예상했던 대로 대부분의 학생들이 복사반(服事班)을 지망했다. 그 나이 또래의 소년들에게 붉고 예쁜 복사복을 입고 제대 앞에서 신부님을 돕는다는 일이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음은 쉽게 이해가 될 일이었다. 하느님의 사랑을 가까이서 독점하는 느낌이었을 터이니 말이다. 그런데 막상 나는 복사반 지망을 처음부터 생각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직도 분명치 않으나 모두가 그쪽을 원하니 경합하기를 꺼려했던 듯도 싶고, 또 원래 허둥대는 편인 내가 제대 앞에서 실수나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보좌 신부님의 의아한 눈초리가 나에게 향해지는 것을 느꼈다. 뒤이어 신부님께서는 “주일날 가톨릭 신문 팔 사람?” 하고 외치셨다. 나는 호기 있게 손을 번쩍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30명 가까운 아이들 중에 유독 나 혼자만이 손을 치켜 든 것을 알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 것도 같은 순간이었다.

 그때 보좌 신부님이 급히 나에게 다가오시면서 “분도(내 세례명) 그건 안 돼!”하고 노한 목소리로 외치셨다. 이윽고 놀라서 올려보는 나를 부등켜 안으시며 “내가 너 고생하는 것을 아는데 성당에 와서도 신문을 팔다니. 그건 말도 안 돼”하시며 팔에 힘을 주셨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신부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고 엉겁결에 고개를 떨어뜨리면서 중얼거렸다. “신부님, 저 자신 있어요. 신문도 팔아 봤구요. 정말 제가 원하는 일인데요.”

 결국 신부님은 내 고집에 꺾이셔서 가톨릭 신문을 팔도록 허락해 주셨다. 그러면서 신부님께서는 복사복을 입은 내 모습이 보고 싶으셨다는 얘기와 하느님께서 신문 파는 소년을 더 사랑하실 것이라는 말씀도 들려 주셨다.

 지금도 왜 내가 그토록 신문을 팔 것을 주장했는지 분명치 않다. 혹 어린 마음에 내가 좋아하는 보좌 신부님의 심리적 반향을 미리 간파하고 의식적으로 일을 그렇게 꾸몄는지도 알 수 없다. 그랬다면 교활한 소년의 페이스에 순진한 신부님께서 말려들어간 셈이 된다. 여하튼 나는 주일날이면 미사 전후해서 열심히 신문을 팔았고 엄마 친구들에게 매달려 짓궂게 신문을 강매하는 재미도 만끽했다.

 보좌 신부님과의 그 감동적인 순간의 기억은 시간과 더불어 계속 미화되어 내 가슴에 남겨졌다. 따라서 그 때 그 기억이 당시의 실제와 그대로 맞아 떨어지는지도 이제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 젊고 인자하신 보좌 신부님의 눈에서 반짝이던 눈물은 나에게 아직도 더 할 수 없이 숙연한 감동을 자아내고 아울러 하느님 사랑의 유현(幽玄)한 깊이를 되새기게 한다. 열한 살 소년의 고달픈 대구 피난시절의 온갖 체험은 바로 그 순간 속에서 밝고 행복하게 승화되어 버린 것이다.

 나는 그후 언제부터인가 그 보좌 신부님이 대구 대교구의 S 신부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가톨릭 신문에서 그 분의 글을 여러 번 읽고 너무 좋아 처음에는 그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었으나, 시간이 감에 따라 점차 그분이거니 생각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생각을 뒷받침 할 논거는 매우 빈약하다. 전에 신문에 나온 S 신부님이 모습이 내 기억의 그 분처럼 인자하고 잘 생기셨다는 것과 글이 좋았다는 것 이외에는 분명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물론 지금이라도 그 때 계산동 성당 보좌 신부님이 누구셨나 직접 알아보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사실 나에게 있어 그 기억은 매우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것이어서 누구에게 내 놓고 털어 놓은 적도 없었다.

 이번에 대구에 가서 만난 영남대의 C 형에게 그냥 S 신부님이 어떤 분이냐고 물었다. “성인 같은 신부님이시지” 그 분 대답은 간단했다. 서울에 올라와 어머님께 처음으로 그 때 대구 보좌 신부님 성함이 혹 S 신부님이 아니셨던지 여쭤 보았다. 어머님 말씀은 기억이 분명치 않다는 대답이셨다. 그 후 나는 두 분이 같은 분이 아니라도 별로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적어도 하느님의 참된 목자가 한 분 더 계시다는 얘기일 수 있으니 말이다.

 흔히 “신부님보고 교회가나, 하느님보고 교회가지”라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그러나 ‘기억 속의 보좌 신부님’ 같은 분의 뜨거운 성화(聖化)의 힘이 역시 제 3세기로 진입하는 한국 천주교회의 참된 생명력이 아닐지.

(<가톨릭 신문> 1985.3.31)

  후기(後記)

 위의 글이 1985년 3월 31자 <가톨릭 신문>에 게재된 후 며칠 뒤 나는 대구 대교구의 신상조 신부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내 머리 속에 항상 자리했던 S신부님, 바로 그 분 편지였다. 신 신부님은 편지에서, 1951년 당시 자신이 계산동 성당 보좌 신부님이셨다는 말씀과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를 기억할 수 없어 미안하기 짝이 없다는 내용, 그리고 가까운 장래에 꼭 나를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함께 담으셨다. 나는 기억 속의 보좌 신부님이 같은 분이시기를 그토록 희원했던 바로 그 S 신부님이라는 사실에 무척 기뻤고, 크게 감격했다. 놀랍고 신기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나를 기억하지 못하시는데 대한 섭섭함은 없었다. 곧장 신부님께 편지를 올리고 올 해 안에 꼭 대구로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해 10월 26일, 뜻밖에도 신상조 신부님의 선종(善終) 소식을 들었다.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대구로 내려가 영정 속의 신부님께 눈물로 작별 인사를 드렸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장례미사를 집전하셨는데, 추모객이 인사인해였다. 거기서도 나는 옆에 서 있던 이름 모를 교우로부터 전에 영남대 C 교수에게 듣던 똑 같은 말을 다시 들었다.

 “정말 성인 같은 분이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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