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단상191

5Km부터 시작하세요 I. 2000년 여름학기부터 1년간 나는 캐나다 밴쿠버의 University of Columbia에 객원교수로 가 있었다. 대학도 마음에 들었지만, 대학주변의 숲이 좋아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한, 두 시간씩 숲을 거닐었다. 그런데 역시 UBC에 객원교수로 와 있던 K교수는 장거리 달리기를 즐겨 자주 해변과 숲길을 길게 누볐고, 제법 이름 있는 밴쿠버 마라톤 대회에도 출전해서 아마추어로서는 비교적 좋은 기록을 작성하기도 했다. 나보다 한 10년 연하인 그는 평소 말수가 적고 조용한 은둔자형의 공부꾼이었다. 그런 그가 바람을 가르며 빠르게 달리고 엄청난 체력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마라톤에 자주 도전한다는 게 무척 신기하고 멋지게 보였다. 그래서 한번은 그에게 어떻게 마라톤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 2012. 1. 24.
10000번의 클릭! I. 몇 달 전 감기약을 사려고 속초 시내 중앙시장에 있는 한 약국을 찾았다. 그런데 약사분이 나를 보고 “안녕하세요. 제가 가끔 선생님 블로그에 들립니다. 뵙게 되니 반갑습니다.‘라는 게 아닌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기에 깜짝 놀랐다. 이럴 때면 이미 심각한 지경에 이른 예의 부끄럼증이 발동해, 얼굴부터 달아오른다. 어떻게 내 블로그를 아시느냐 물었더니, 그분은 “ ’좋은 교사‘에 실린 선생님 글에서 블로그 주소를 알았어요.” 라고 대답했다. 나는 “고맙다.”라는 말을 남기고 빨리 약국을 나왔다. 내 블로그 주소는 몇몇 주변에 지인들, 제자들이나 알거니 했더니, 생각지 못한 곳에서 독자를 만난 것이다. 고마운 마음이 앞서지만, 역시 부끄러움이 따른다. 벗겨진 내 몸을 모르는 사람에게 들킨 느낌 같은 .. 2011. 12. 25.
미리 적는 발문(跋文) I. 어제 제자 한 사람이 내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는, “가끔 선생님 블로그를 들리는데, 왜 요즘 글이 뜸하세요? 전에는 일주일에 한편씩은 올리시더니, 요즘은 글이 늦어지고, 이번에는 20일이 가까워지는데도 소식이 없어 걱정되네요. 혹 어디 편찮으시든가, 심기 불편한 일이라도 있으신 것은 아니시죠?”라고 물었다. 나는 황급히 “아니, 나는 별일 없네, 단지 요즘 내가 뭐 따로 전념하는 일이 있어 블로그에 소홀히 했네. 앞으로 좀 더 자주 글을 올리겠네.”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전념하시는 일이 무엇이신데요? 속 시원하게 털어놓으시지요.”라고 재차 물었다. II. 요즘 나는 책을 쓰고 있다. 책 제목은 가칭 이다. 이 책은 내가 지난여름 유럽 여행을 가기 전부터 구상한 것인데, 몇 달 전부터 .. 2011. 12. 21.
새벽찬가  I 나는 수면패턴이 이른바 에 속해 대체로 새벽 4시면 침대에서 일어난다. 이 습관이 이미 젊었을 때부터 몸에 배었기 때문에 그 시간이 되면 그냥 일어난다. 늦게 자도 이때쯤은 으레 잠에서 깬다. 그래서 자명종이 따로 필요 없다. 나는 새벽 시간을 사랑한다. 새벽은 하루의 처음이고 시작이기에 그 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감회가 있다. 거기에는 첫사랑이나 첫눈과 같은 설렘, 순수와 신비가 있고, 출발선에 선 마라토너의 긴장과 결의가 있다. 그리고 잠든 영혼을 무섭게 깨우는 힘과 소명이 있다.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 때면, 나는 마치 내가 온 세상을 처음 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또 이때만은 내가 70대의 노인이 아니라 세상 무슨 일도 해낼 수 있는 한창나이의 청년이 된다. 그래서 나는 이 새벽 .. 2011. 12. 1.
유석진 박사님의 추억 I. 고등학교 3학년 (1958년), 한창 대학입시에 열을 올리던 5월 즈음에 나는 불면증에 걸렸다. 아무리 잠을 청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자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정신은 더 말똥말똥해지고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져서 멀리 수돗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마저 크게 들렸다.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녘에야 잠시 눈을 붙이곤 했다. 온 종일 머리는 빠개지는 것같이 아프고 밥도 잘 못 먹어 몸도 여위어 갔다. 그러다 보니 6월 이후 겨우 중간, 기말시험 때만 학교에 갔던 기억이 있다. 고3이라 학교에서 출석은 관대하게 봐 주었던 것 같다. 시기가 시기인 지라 아버지를 따라 유명한 병원 여러 곳을 찾았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진단은 언제나 신경쇠약이었고, 어떤 의사는 ‘고3병’이니 대학에 들어가면 낳는다고 했다... 2011. 11. 15.
아름다운 순간들  I. 나이가 70을 훌쩍 넘으니 아무래도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때가 많다. 더욱이 요즈음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친지들을 별로 만나지 않고 지내니 가끔 그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함께 지냈던 시간이 어제인 듯 가까이 다가오기도 한다. 그들과 즐거웠던 일, 기뻤던 일도 적지 않지만, 간혹 섭섭했던 일, 아쉬웠던 일들도 없지 않았다. 그럴 때면 나는 내 기억 속에 좋은 일은 크게 담으려 애쓰고, 덜 좋은 일은 지워버리려 노력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아름다운 순간들만 내 머럿속에 소중히 간직하려 한다. 그리고 가끔 그것을 꺼내 아껴둔 좋은 차를 마시듯 깊게 음미하려 한다. Ⅱ 대학에서 30여 년을 가르쳤으니, 관계의 차원에서 보면 이 내 삶의 여정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런데 되돌아보면 아쉬운 일이 .. 2011. 10. 26.
주례 이야기  I. 교수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제자들 결혼식 주례를 자주 서게 된다. 나도 지난 세월 동안 300번 가까이 주례를 섰다. 그러다 보니 한창 주례를 자주 섰던 50대 때는 학자로서, 또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가장 바쁜 시기였는데, 모처럼의 주말마다 한, 두 차례 주례하다 보니 여러 가지로 생활에 지장이 컸다. 결혼은 인륜지대사이므로 주례는 그 전 과정에서 추호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래서 자주 하더라도 매번 긴장하고 적잖은 신경을 써야 한다. 그리고 일단 주례를 맡기 시작하면 누구는 해 주고 누구는 마다할 수가 없어 그 횟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주례는 우리나라에서 교수가 피할 수 없는 업보거니 생각했다. 부끄럽지만, 나는 첫 주례를 38세에 섰다. 본의 .. 2011. 10.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