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단상191

나의 <대안 찾기> 여행 I.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나는 남들이 하는 식으로 똑 같이 행동하거나 한 가지 해답에 집착하기 보다는 열심히 를 해 온 편이다. 한 길만을 고집하기 보다는 그 때 그때 선택가능한 다양한 행동경로에 두루 관심을 갖았고, 늘 대안을 모색했다. 그리고 남들과 다른 길, 다른 선택지(選擇肢)를 택할 때 크게 망설이지 않았고 그 때마다 마음이 그리 불편하지도 않았다. 나는 (all or nothing)식의 극단론을 배척하며, 일을 처리하는데 일정한 방식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이른바 정석(定石)적 사고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정관념이나 상투어 같은 를 무척 싫어했다. 그러다 보니 내 인생은 줄곧 , 여행이었다. II.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몸이 무척 아팠다. 그래서 5월 이후 학교에 가지 .. 2013. 4. 7.
왜 <오스트리아 모델>인가 내가 에 관해 책을 쓰고 있다고 장광설(長廣舌)을 한 것이 재작년 겨울(현강재, 2011/12/21일 ‘미리 적는 발문(跋文)’참조)이었다. 그 후 별 소식이 없으니, 많은 분들이 책이 어떻게 되었느냐가 물으신다. 그래서 오늘은 그 답을 드려야겠다. 초고는 작년 봄에 마쳤으나, 그 후 얼마간 보완작업을 하며 차일피일 늦추다가, 며칠 전에 원고를 출판사(문학과 지성사)에 넘겼다. 그간 산고(産苦)가 만만치 않았다. 아직 책 이름도 확정을 못 짓고 있는 형편인데, 앞으로 편집해서 책이 나오기 까지는 적어도 두 달은 걸릴 것 같다. 아래에 책의 머리글 를 옮겨 본다. 왜 오스트리아 모델인가 I. 최근 들어 , , 등 유럽의 모범적 강소국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점차 이 나라들의 제도와 정책.. 2013. 3. 23.
"L군, 어디 잘있겠지?" I. 오래된 일이라 시점이 확실치 않다. 내 기억으로는 유신 말기였던 것 같은데, 그 이후의 경과를 따져보면 1980년대 초 이른바 5공 초기 일인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무척 엄혹했던 권위주의 시절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내가 교수로 일하던 연세대학교 행정학과 학생 한명이 정권을 비판하는 전단을 뿌렸다가 경찰에 잡혀갔다. 얼굴이 희고 귀티 나는 귀공자 타입의 3학년 L군이었는데, 평소에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학생이었다. 혼자 저지른 일이 었다. 그런데 글 내용이 매우 신랄하고 비판수위가 높아 정보기관에서 크게 다룬다는 얘기가 들렸다. 얌전히 학교에 잘 다니던 외아들이 잡혀 들어가니 집안에서도 난리가 났다. 몇 살 위 시집안 간 누나가 사색이 되어 학교로 쫓아왔던 기억이 난다. 결국 제적이 되고 한 동안.. 2013. 3. 12.
껍데기는 가라 I. 1995-97년 내가 교육부장관으로 있을 때 일이다.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가 전문대학 명칭에서 ‘전문’ 자(字)를 빼달라고 건의했다. 전문대학 측은 전문대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심하니 그 ‘두자’는 빼야 되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안 되겠다고 하자, 협의회은 물론 많은 개별 전문대학들이 대대적으로 로비에 나섰다. 그리곤 당.정.관에 접근하여 전방위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자 국회 교육위에서도 여야 없이 많은 의원들이 내게 “저들이 그렇게 원하는데, 그 이름 두자 빼줘 사기를 올려주면 좋지, 작은 일에 왜 그리 까다롭게 구냐”고 나를 몰아 세웠다. 나는 전문대학은 전문 중견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된 대학인데, 그 핵심개념인 ‘전문’을 빼면 어떻게 되느냐는 반문했다. 그러면서 그 ‘두자’가 .. 2013. 1. 20.
대통령과 현인(賢人) I. 나는 평소에 대통령 가까운 거리에 현인(賢人)이 한명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는 굳이 아는 것이 많고 지혜가 출중한 글자 그대로의 현인일 필요는 없다. 그 보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 그리고 사심이 없는 사람이면 된다. 굳이 비서실장이나 특보, 수석과 같은 직책을 맡지 않아도 된다. 다만 그 사람이 언제라도 대통령에게 다가갈 수 있고, 대통령도 그 사람을 크게 신뢰해서 평소에도 그와 고민을 나누고, 중요한 결정에 앞서 그의 의견을 묻는 관계이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대통령이 그런 사람 하나 옆에 두기가 무어 그리 어렵겠느냐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게다. 사심 없는 상식인, 그러면서 대통령과 서로 신뢰하고 깊이 교감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대통령을 옆에 둔.. 2012. 12. 26.
천직(天職)의 후유증 I. 나는 손수 운전을 못하기 때문에 대중교통이나 택시를 자주 이용하는 편이다. 그런데 택시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뒤를 보면서, “제가 손님이 무엇 하시는 분인가 한번 맞춰 볼까요?” 하며 내게 넌지시 말을 건넨 적이 몇 번 있었다. 내가, “그러세요” 라고 대답하면, 대뜸 “학교 선생님이시지요”라고 되묻는다. 내가 그렇다고 말하면, “얼굴에 그렇게 써 있어요”한다. 그럴 때면 내심 무척 기쁘다. 내가 자부심을 갖고 있는 직업을 얼굴에 달고 다닌다니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내가 그간 헛살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닌가. II. 내가 대학 교단에 40년 가까이 섰으니, 가르친다는 일이 몸에 배인 것 같다. 그러다보니 그것이 ‘제2의 천성’이 되었는지, 늘 어디서나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든다는 비판을 자주 듣는다... 2012. 12. 22.
어떤 대화: <인생 3모작> 재론 I. 나는 약 2년 전에 (앞 글 ‘스웨덴으로부터의 화답’ 참조)를 제안한 바 있다. 첫 번째 일터에서 한 30년 열심히 일하고 50대 중반에 이르면 자신이 평소에 정말 하고 싶었던 일 혹은 보람 있다고 생각되는 일을 찾아 70세까지 일 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다시 시골로 못자리를 옮겨 조용히 텃밭이나 가꾸며 ‘자연 회귀’, ‘자아 찾기’로 여생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는 조언도 곁들였다. 그러면서 은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사회의 총체적 생산력을 높이고, 아울러 개인의 행복도도 제고하는데 필요한 삶의 지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평생학습’ 내지 ‘학습복지’의 개념이 깊게 깔려 있음을 내 비쳤다. 이에 대해 주위의 몇몇 가까운 이들이 관심을 표명했다. 그 중 한 제자와의 대화를 옮.. 2012. 1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