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대학에 나갈 때 나는 아침에 출근하면 으레 교수 휴게실에 들려 우편함에서 각종 우편물을 한아름 안고 연구실로 향했다. 가끔 반가운 편지나 주문한 책, 유익한 자료도 있지만, 대체로 별 쓸모없는 자료들이 대부분이고,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선전물도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배달된다. 그때부터 내가 연구실에서 하는 첫 번째 작업은 필요한 자료를 고르는 일이다. 한 마디로 버릴 것은 버리고, 챙길 것은 챙기는 작업인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버릴 것을 제때 과감히 버리는 것이다.


  
우선 잡다한 선전물이나 한 눈에 불필요한 자료나 문건은 그냥 휴지통에 넣는다. 그리고 나면 내게 크게 도움이 됨직한 것부터 그런대로 쓸모가 있는 것, 그리고 당장엔 별 필요가 없지만 언젠가 참고가 될 수 있어 보이는 것 까지 다양한 종류가 남는다. 욕심 같아서는 많은 것들을 거두고 싶지만 실제 내 연구실 공간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잡다한 자료가 훗날 오히려 짐이 된다는 그간의 경험 때문에 자료 선별과정에서 나름대로 신중을 기하게 된다.


  
곧 제법 큰 휴지통에 버려진 자료들이 수북이 쌓인다. 그리고 나머지는 일단 필요한 정도에 따라 두어 뭉텅이로 나눠놓고 하나하나 다시 살펴본다. 조교에게 “혹시 자네 이것 필요한가” 물어 건네주기도 하고, 어떤 것은 휴지통 가까이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다가 가끔 의외의 수확에 쾌재를 부를 때도 없지 않다.


  
그런데 당장 버리기 아까워 여기저기 꾸겨 넣었다가 나중에 책상부터 서가, 연구실 바닥까지 잡동사니 천국을 만들기 일쑤다. 그렇게 되면 산더미처럼 쌓인 별 쓸모없는 자료의 숲, 그 미로 속에서 제대로 된 것 하나를 찾아내려면 온갖 고생과 시간낭비를 해야 한다. 결국 이들 자료들 대부분은 내손 한번 닿지 않은 채 몇 년 만에 한번 하는 연구실 총정리 때 한몫에 버려지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자료를 고르면서 항상 스스로에게 되뇌던 말이 “버리자, 과감히 버리자”다


  
돌이켜보면 젊은 나이에는 일에 대한 욕심 때문에 이것저것 많이 챙겼던 것 같다. 그러다가 정년 가까워지면서 보다 많은 것을 제법 과감히, 그리고 별 망설임 없이 버렸던 기억이다. 적은 것을 더 채우려고 애쓰는 것보다 크게 버려 스스로를 비우는 것이 더 슬기롭다는 것을 몸소 체득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확실히 버릴 것이 많아진다. 여년이 길지 않으니 일을 더 벌리기 보다는 줄여야 하고, 거기에 맞춰 욕심도, 집착도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훨훨 털고 한껏 비워 삶을 더 단순하게, 그리고 소박하게 만드는 것이 노년의 자연철학이 아닐까 한다. 거기에는 순리대로 사는 인생의 아름다움이 있다


  
같은 맥락에서 볼 때, 나이가 들어가면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이 노욕이 아닌가 한다. 노인이 <제 일>을 찾아 그 일을 열심히, 보람 있게 하는 것은 노욕이 아니다. 문제는 온갖 세속에 대한 늙은이의 헛된 욕심과 추한 집착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욕되게 하고 주위를 어지럽게 만든다. 때문에 노년의 아름다움은 노욕에서 벗어나서 자신을 온전히 비우는 데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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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heap nfl jerseys 2012.10.17 12:21 Address Modify/Delete Reply

    어느정도 무감각해진답니다~


이곳 속초/고성에 와 살기 시작한지 이제 3년이 가까워 온다. 아무 연고도 없던 곳이라 처음에는 이곳 사정에 어두웠고 실제로 지역사회에 대한 세세한 관심도 별로 없었다. 그러다 보니 이곳 자연에 취해 산과 바다, 호수와 계곡을 자주 찾았지만 이곳 주민들의 생활세계와는 얼마간 거리를 두며 살았다.


  
‘탈 서울’을 하면서 가능하면 서울과 중앙에 대한 관심은 줄이고 이곳의 일상에 충실하자고 다짐을 했는데도 부지불식간에 내 주된 관심은 여전히 서울 중심, 나라 전체에 가있었고 정작 내 구체적 삶이 펼쳐지는 이 지방과 이곳 주민들의 사는 모습에 대해서는 피상적인 관심밖에 없었다. 그래서 TV뉴스를 볼 때에도 전국 뉴스가 끝나고 지방 뉴스가 시작될 때면 으레 채널을 다른 데로 돌리곤 하였다. 몸만 여기 있지 마음은 그냥 서울에 머물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다가 처음 한해를 넘기면서 내가 차츰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감지하게 되었다. 이곳 사람들의 삶의 터전인 바다농사가 잘 안되면 그 걱정을 하게 되고, 피서철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주말에 비가 올라치면 한숨이 절로 나오게 되었다. 피폐한 지역경제를 실감하면서 아내에게 이제 이마트에 그만가고 재래시장과 양양 5일장을 가자고 종용하게 된 것이나, 어쩌다 서울에 가면 가까운 이들에게 속초/고성 자랑에 열을 올리는 것도 그런 변화의 모습이었다. 아내는 오래된 <강원도 짝사랑>이 발동했다며, 자칭 <속초/고성 홍보대사>라고 놀린다.

 
 
무엇보다 TV 뉴스를 보면서 이제는 전국 뉴스를 대충 듣고, 이곳 지방 뉴스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서울과 중앙, 전국은 점차 멀리 느껴지고 그에 대한 관심도 엷어졌다. 그러면서 이곳, 이 지역의 구체적 삶의 세계에 차츰 빠져 들어가고 있는 자신을 느낀다. 그런데 이런 것이 전혀 애써 노력하지 않은 채, 또 스스로 의식하지 않는 사이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게 얼마간 신기하고 흥미롭다. 아니 스스로 놀랄 때도 없지 않다.

 
 
의식의 <지방화>가 진행되면서 걱정도 함께 는다. 요즈음 내 심기를 가장 불편하게 하는 것은  이곳 고성의 가장 큰 자랑인 명품 소나무들이 끊임없이 바깥으로 반출되고 있는 것이다. 각종 명목으로 허가를 맡아 합법적으로 소나무 반출을 진행하는 모양인데, 식목의 달이라는 지난 4월 이후 내 집 앞 먼 길로 줄지어 실어 나른 아름드리 소나무만 해도 수백 그루는 족히 될 것이다. 소나무를 무리로 패간 뻘건 산등성이는 을씨년스럽게 그대로 방치되어 있는데 장마철은 이미 시작되었으니 걱정이 안 될 수 없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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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년퇴직을 하기 훨씬 전부터 마음으로 정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년을 하면’, 이러 저러하게 살겠다는 상상을 많이 했다. 그런데 그럴 때면 언제나 ‘서울을 떠나자’라는 생각이 마치 강박관념처럼 내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정년을 하면, 세상 번잡을 피해 보다 단순하게 살고 싶고, 내키는 일만 하고 싶고, 자연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데 그 모든 것이 서울을 떠나야 이룰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탈()서울’을 지상과제처럼 생각했다. 다행히 아내도 동의했다.  

 

 그렇다면 어디로 갈까. 그래도 서울에서 멀리 달아나야지. 실은 아무도 잡는 사람이 없는데 멀리 도망갈 생각부터 했다. 서귀포가 어떨까. 남해도 좋던데, 이런 저런 궁리 끝에 강원도 속초로 정했다. 전혀 연고가 없지만 눈여겨보아 둔 곳이다. 그래서 작년 2월 대학을 정년하자마자 이곳으로 내려 왔고, 벌써 여기 온지 1년을 훌쩍 넘겼다.  

 

 이곳에서 스스로 가장 대견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직 온전치는 않으나 내가 점차 내 생활에 주인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돌이켜 보면, 서울에서 나는 언제나 사회적 약속의 연쇄 속에서 허덕이며 살았고, 항상 스케줄에 쫓기고, 데드라인에 목매였다. 체면 때문에, 남과 척지지 않으려고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내 삶의 주인인 적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요즈음 나는 여기서 비교적 내가 하고 싶은 일, 마음에 내키는 일을 내 의지대로 즐겨서 하고 산다. 알량한 체면이나, 하찮은 명예는 상관할 필요가 없고, 뿌리치기 어려운 연고의 늪에서도 꽤 해방된 느낌이다. 내 시간은 내가 직접 요리한다. 게다가 여기서 내 유일한 취미인 산행이 언제라도 가능하니 그런 것이 좋다. 서울에 산다면 이 모든 것이 가능했을까.  

 

 지인(知人)들이 내게 흔히 던지는 질문은 외롭지 않느냐는 것이다. 밤낮 그 산, 그 바다를 보면 지루하지 않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 나는 거의 외로움을 느끼지 않고 잘 지낸다. 현대인들은 명동 한가운데서도 외롭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그런 실존적인 얘기가 아니다. 우선 이곳의 일상이 그런대로 바쁘다. 그간 하고 싶은데 못했던 일이 그리 많을 줄 몰랐다. 주변에 가고 싶은 산행 코스만 해도 끝이 없고, 알량한 전공 공부에 쫓겨 못 읽고 밀어 두었던 역사책, 철학책, 소설과 시들도 그리 많을 줄 몰랐다. 어쭙잖은 사색하기, 음악듣기, 자신과 대화하기도 바쁘다. 올해부터는 조금씩 텃밭을 가꾸려 한다. 더 바빠질 것이다. 그래서 이곳 생활이 외로움을 반추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또 가끔 밀려오는 약간의 외로움은 아련한 향수를 자아내기 때문에 얼마간 감미롭기도 하다. 그런데 바빠도 전혀 쫓기는 기분이 없다. 그리고 산과 바다는 전혀 지루하지 않다. 특히 산은 계절 따라, 아니 시시각각으로, 또 보는 곳과 각도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바뀐다. 천의 모습을 연출하는 자연의 신비 속에 빨려 들어가면 쉽게 자신을 잃고 거기에 동화된다.  

 

 어쩔 수 없이 서울을 가끔 간다. 그런데 서울을 가도 가능하면 일만 보고 그냥 돌아오려고 애쓴다. 마치 자칫하면, 다시 옛날로 돌아갈 것 같아서 괜히 불안하다. 서울의 분답(紛沓) 속에서 다시 나 자신을 잃으면, 그 때는 다시 이 작은 나만의 행복한 시간으로 영영 되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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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기의 사색

삶의 단상 2010. 4. 3. 17:24 |


성숙의 불꽃  2008.1.18

정권변동을 앞두고 변화의 물살이 매우 거칠고 세차다. 시장, 경쟁, 자율이 시대정신으로 대두되면서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의 역사가 통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그와 연관된 주요 사회가치들이 크게 폄하되고 있다. 지난 10년간의 좌편향의 역사가 그랬듯이, 새로운 역사의 반전(反轉)도 급격히, 또 다분히 이념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역사는 되풀이 되는가.

  인수위의 조직개편 작업에서 특히 큰 변화가 예고되는 부문이 교육이다. 처음에는 아예 교육부 해체론까지 등장했었다. 지금도 교육부의 ‘교육’ 기능은 대폭 축소하고, 초중등 교육은 시도 교육청에, 대학교육은 대교협 등 자율기관에 이양 또는 위임하겠다는 기조는 그대로 이어갈듯 하다. 이러한 엄청난 변화가 모두 자율과 분권의 명분아래 진행되고 있다.

  자율은 실로 아름다운 말이고 시민민주주의의 기본철학이다. 그러나 그것은 ‘빛과 그림자’를 함께 함축한다. 문제는 자율이 아무런 준비 없이 졸속으로  추진될 때 자칫 엄청난 혼란과 파국을 동반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가까운 예를 들어 보자. 1990년대 중반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를 크게 외치면서 무분별한 경제자유화와 금융규제완화를 단행했고, 이는 금융위기를 유도, 마침내 치욕적인 IMF 구제금융시대를 열었다. 따지고 보면, 외환위기는 자율적이며 합리적인 시장의 작동기제가 제도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랫동안 경제를 감독하고 규제해 오던 <발전국가>의 역할을 급격히 무장해제 시켜 버린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무릇 자율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제도적 하부구조가 마련되고 권한을 위양 받는 자의 능력과 책임의식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제가 성립되지 않고 결행되는 급격한 역사의 반전은 실패를 자초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자율과 분권의 이름으로 새로이 부상하는 시도 교육청과 대교협이 교육이라는 전국민적, 역사적 과제를 책임 있게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책임의식을 갖추고, 공공성과 사회적 형평을 고르게 고려하기에 손색이 없는 존재인가, 또 현재 그들이 제대로 기능할 만한 제반 사회경제적, 제도적 조건이 마련되어 있는가, 깊이 고민하고 진지하게 따져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만약 자율화의 기수가 될 시도교육청이 입시교육 경쟁에 <올인>하고, 대교협이 대학(그것도 몇몇 상위권 대학)의 이기적 욕구를 채우는데 급급하게 되면, 사교육비, 양극화의 문제, 그리고 무엇보다 공교육 정상화의 문제는 어떻게 될 것인가. 게다가 교육부마저 무력화 된다면 공교육에 대한 국가적 책무는 어디서 구할 것인가.    
      
  변혁의 시대일수록 생각을 가다듬어 시대정신이라는 신기루에 현혹되기 보다는 역사의 현장의 살아있는 실제를 직시하고, 긴 호흡으로 먼 역사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통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환기에 깊은 사색과 고뇌를 요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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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의 불씨 2007.12.06

대부분의 공, 사조직에는 일의 분업체계가 있고, 그에 따라 자리와 직책이 있다. 대통령이나 대학총장, 큰 회사 사장이나 영향력 있는 시민단체의 대표 등은 중요한 자리이고 그에 따른 책임도 막중하다. 그런가 하면 정보기관이나 검찰, 경찰 등 이른바 권력기관의 장은 그 직책 때문에 위협적 느낌을 던져주고, 교육, 봉사기관이나 종교단체의 장은 보다 친근하고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다보면 우리 주변의 많은 자리는 그 일을 수행하는 사람에 따라 그 실제의 역할체계 이상으로‘권력화’되기도 하고, ‘인간화’되기도 한다. 같은 왕의 자리라도 연산군 같이 희대의 폭군으로 역사에 남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세종처럼 인간적 향기가 넘치는 성군(聖君)도 있다. 종교지도자나 학교장 중에도 권력과 세속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인사가 있는가 하면, 권력기관의 수장 중에도 봉사정신으로 충만한 가운데 수도자의 경건을 느끼게 하는 이들이 없지 않다.

우리 주변에는 알량한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는 곧장 그 자리를 관료화, 권력화, 비인간화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마땅히 봉사와 헌신의 자리이어야 할 정부공직이나 대학보직 등도 자칫 권력과 권위의 상징이 되고 그들과 관계하는 많은  이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안겨주는 경우가 허다하다.

성숙한 사회는 인간화된 사회이다. 우리 사회가 보다 인간화되기 위해서는 크고 작은 공, 사의 모든 자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권력, 위계, 규제, 차별에 대한 관심 대신에 인간적 배려, 의사소통, 자율, 사회적 통합 등의 ‘인간화’ 가치를 추구할 때 가능하다고 본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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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의 불씨 2007.07.31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은 정말 불완전한 존재라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특히 최근 들어 이념과 연관하여 그런 느낌을 많이 가진다. 누구나, 특히 배운 사람들이면, 일정한 이념적 지향이 있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얼마간의 이념적 편향성을 보일 수가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어져 사리를 분간하지 못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런데 점차 우리사회에서 건강한 토론이 사라지고 있다. 일정 주제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논의하기에 앞서 미리 입장을 정하고 제 주장만 앞세운다. 그러니 온통 독백만 난무하고 진정한 대화는 실종한다. 경청, 숙고, 심의, 합의 등의 개념이 무의미해 진지 오래다. 언필칭 중도를 얘기하고 합리를 앞세우는 사람들과도 몇 마디 나누다 보면, 그가 이미 이념의 수렁에 깊숙이 빠져 있음을 절감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념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중 하나의 방법은 일정 쟁점이 제기되었을 때, 우선 그것이 던져주는 정치적 상징이나 이념적 함의에 현혹되어 섣부른 결론을 내리는 것을 삼가는 일이다. 그 보다는 일단 판단을 유예하고, 사실과 분석에 바탕을 두어 생각을 바탕부터 다시 정리해 보는 노력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이때 사실과 정보를 가능한 한 폭넓게, 다양한 연원에서, 치우치지 않게 수집해야 하며, 실증적 분석과 더불어 질적 분석을 함께 병행해야 한다. 쟁점을 역사적으로 되짚어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우리 주변에는 일생 한 신문만 본다고 자랑삼거나, 마음에 맞는 무리들과만 교류한다고 내세우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 경우, 같은 관점만 보강하기 때문에 생각의 판도를 넓이는 데는 오히려 장애가 된다. 폐쇄회로에서 벗어나기 위한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

결론도 쾌도난마식으로 찬, 반 양 갈래로 내릴 일도 아니다. 문제해결을 획일적으로 할 것이냐 다양하게 할 것이냐, 시기적으로 장, 단기적으로 혹은 몇 단계로 나누어 할 것이냐, 아니면 일거에 할 것이냐, 강도는 어떻게 할 것이냐 등에 따라 매우 다양한 대안이 존재한다. 하나하나 따져 보며 심도 있는 토론을 통해 합의수준을 높여야 한다.

성숙한 사회는 열린 마음, 합리적 토론, 사회적 합의가 가능한 사회다. 성숙사회를 이루기 위한 지식인들의 성찰과 분발이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대이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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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학기도 저물고 내 경우 종강도 했다. 이번 학기가 정년을 앞둔 마지막 학기이니 대학강단 에서의 내 역할은 사실상 끝난 것이다. 처음 시간강사로 대학 강단에 선지 42년, 전임교수 생활 35년의 긴 여정이 이제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 얼마간의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그 보다는 홀가분한 마음이 앞선다. 이제 정말 자유로운 영혼으로 얼마 남지 않은 <내 시간>을 갖게 되었다는 생각에 교수 초년병일 때처럼 가슴이 부푼다.

이 지면을 통해 행정학과 학생들에게 마지막 강의삼아 학창생활을 하는데 유의해야 할 몇 가지 당부를 하고자 한다. 그래서 제목도 종강록이라 정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은 데 다섯 가지로 줄였다.

첫 번째 부탁은 <초심을 잃지 말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처음처럼> 살라는 얘기다. 큰 맘 먹고 처음 시작했을 때의 꿈, 목표, 희망, 열정, 의욕을 잃지 말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무엇보다 긴장과 결의가 있다. 그것은 새벽 창문을 열고 처음 느끼는 신선한 찬 공기처럼, 우리를 무섭게 흔들어 새로 깨우는 힘이 있다. 초심에서 멀어져 가는 자신을 다그치며, 초심으로 회귀하는 노력을 줄기차게 계속해야 한다. 그것 없이는 우리는 일상의 늪에 빠져 <그날이 그날>인 삶을 살게 된다.

두 번째 부탁은 <deep play를 하라>는 것이다. 매사에서 피상적인 것, 겉치레하는 것, 상투적인 것을 피하고, 가능하면 본질에 접근하는 노력과 진지함, 의미 찾기, 파고들기를 얼마간 내면화할 필요가 있다. 요새 많이 쓰는 말로 진정성이 배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좋은 게 좋은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사회는 <deep player>들에게 사회적 신뢰로 보상한다.

세 번째 부탁은 <가까이에서 행복을 찾자>는 것이다. 바로 내 주위에 행복의 값진 실마리들이 곳곳에 있다. 내 가족과 이웃들, 집근처, 통학 길, 친구들이 모두 내 행복의 보금자리들이다. 그것들을 그냥 스쳐가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연세대학교가 제공하는 수많은 기회들을 고르게 <착취>하자. 자과(自科)중심의 강의나 교육과정에 파묻히기 보다는 폭넓은 강의선택을 하고, 교내에서 일년 내내 진행되는 각종 국제회의, 세미나, 특강에 관심을 기울이고, 도서관의 각종 프로그램, 서클활동, 연구모임에도 선택적으로 참여하자. 아직도 꽤 남아있는 연세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자신만의 산책로를 개척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네 번째 부탁은 <시간을 관리하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자기 시간의 관리사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을 어차피 <시간싸움>이다. 지나치게 촘촘한 미시적 시간계획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든다. 가끔 시간의 여백을 마련하고 정신적 이완을 취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큰 줄거리의 시간계획은 꼭 필요하다. 중장기, 그리고 하루의 시간의 배열, 우선순위의 설정,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참고로 나는 전형적인 <새벽형>이다. 대체로 늦어도 새벽 5시에 일어나 7시 반까지는 공부를 한다. 그 시간에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절대 시간>이다. 그러면 그 날 다른 일로 쫓겨 다시 책상 앞에 앉지 않아도 네트(net)로 최소한 몇 시간은 챙길 수 있다. <틈새 시간>을 이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내가 정부에 있을 때, 항상 잠이 부족했다. 그래서 차로 이동할 때는 언제나 잠시나마 <조각잠>을 잤다. 그게 얼마나 달콤했던지. 내 제자 한 사람은 먼 곳에서 통학을 했는데, 붐비는 버스 간에서 항상 리시버를 귀에 꽂고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면서 어학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는 지금 유엔 차석대사를 일 하고 있다.

다섯 번째의 당부는 <미래를 낙관하라>는 것이다. 비관적 미래조망, 자포자기, 쉬운 포기는 금물이다. 미래에 대한 낙관은 일의 성취를 위해서도 필수적이지만, 우리의 정신건장을 위해서도 최상의 묘약이다. 미래를 지나치게 낙관하고 준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지만, 미리 지나치게 걱정하고, 안되거니 생각하면 정말 될 일도 안 된다. 만사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빛을 최대한으로 키우고, 그림자를 줄이는 노력을 열심히 하면 점차 성취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무엇보다 인간은 엄청난 발전잠재력을 갖고 있다. 정체절명의 위기를 인생최대의 기회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미래에 대한 낙관적 확신을 가지고 최선을 다 할 때, 여러분은 모두가 <성공사례>가 될 수 있다.

쓰다보니 할 얘기가 너무 많다. 한 가지만 더 보태자. 행정학이 실용적 학문이라, 좋은 점도 많지만, 걱정도 많이 된다. 여러분들은 인생의 여정에서 지나치게 <이(利), 불리(不利)>를 따지기 보다는 <의(義), 불의(不義)>를 가리는 노력도 함께 했으면 한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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