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단상

대화 I

2012. 7. 27. by 현강

                          I.

  세월이 화살처럼 흘러 1970년대 초 내게 배운 제자들도 이미 60줄에 들어섰다. 그러니 그들과 같이 늙어간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얼마 전 그 중 한 친구인 A군과 만나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길게 나눴다. 아래의 대화는 기억을 더듬어 그때 그와 나눈 얘기를 옮겨 본 것이다.

 

                        II.

A군: 제가 지난 40년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선생님의 글과 삶을 추적했는데, 그동안 많이 보수화되신 것 같아요. 70년대에는 이념적으로 분명 <중도 좌>라고 느꼈는데, 80년대 중반 이후는 <중도>, 그리고 최근에는 오히려 <중도 우>가 아니신가 싶어요. 제가 잘못 본 것일까요. 그런데 선생님 자신은 언제나 <중도 개혁주의자>를 자처하셨어요. 그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죠.

나: 글쎄. 나는 기본적으로 같은 입장인데, 세상이 바뀌니 그렇게 비춰지는 게 아닐까. 물론 바뀌는 세상에 따라 내 입장도 얼마간 새로 조율되는 측면도 없지 않을 터이고. 여하튼 양자가 항상 상호작용하니까. 그러나 나는 영원한 <중도 개혁>이네.

 

A군: 그렇다면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중도개혁>은 어떤 입장이세요.

나: 내가 1992년에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이라는 책을 썼는데, 기본적으로 그런 관점이지. 자유와 평등, 어느 쪽에 크게 편중되지 않고, 양자를 조화롭게 가꾸자는 얘기지. 그러면서 항상 현재보다는 내일을 지향해 개혁, 개선하자는 생각이고.

 

A군: 우리 사회에서 중도는 자칫 기회주의로 매도당하지 않습니까. 또 실제로 중도는 양비론(兩非論)에 치우치는 경향이 많고요.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입장이라 입장도 불분명하고, 또 좌, 우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쉽지 않습니까.

나: 그런 점이 있지. 그러나 진정한 중도는 시시비시를 바르게 가리고, 제3의 대안을 내 놓는 역동적인 입장이지. 그런 의미에서 기하학적으로 양극의 중간점이 아니라 양극을 한 단계 높은 수준에서 <지양>(止揚, aufheben)하는 입장이라고 보네. 유신시대처럼, 민주화냐 아니냐의 양자로 첨예하게 갈릴 때는, 중도를 표장한다는 일이 기회주의자의 위장전술이거나 반민주세력이 조종하는 <트로이의 목마>일 수 있지. 그러나 민주화되고 사회가 성숙해 질수록, 극좌나 극우는 사회적 갈등과 비통합을 유발하기 때문에 진정한 대안이라고 말하기 어렵네. 생각해 보게나. 한쪽 끝에 자리를 정하면 반대 편 끝은 까마득해서 잘 보이지도 않네. 그러나 중도에 터하면 좌, 우가 다 보이고 양쪽과의 이념적 거리가 그리 멀지 않기 때문에 그들과 이해와 소통도 용이하네. 중도의 관점은 균형과 조화, 사회적 공존과 상생을 추구하기 때문에 정치세력들 간의 극단적 대결이나 양극화를 피할 수 있고, 사회적 합의에 바탕을 둔 대안을 창출하는데 크게 유리하네.

 

A군: 그렇다면 중도주의자가 생각하는 개혁은 어떤 것인가요.

나: 우선 중도주의자는 한방에 세상을 뒤집는 식의 대변혁이나 극단적 처방을 추구하기 않네. 더욱이 사회가 성숙할수록 정치 및 경제의 구조를 통째로 바꾸는 식의 극단적 변혁은 필요치 않을뿐더러, 그것을 엄청난 희생과 새로운 갈등을 유발하기 때문에 취할 바가 아니네. 그런데 극단적 우파나 극단적 좌파는 바로 그러한 변혁이나 혁명을 추구하지 않나. 시대착오적 접근이지. 중도주의자가 생각하는 개혁은 점진개혁, 합의개혁이네. 그리고 그 방향은 어떤 계층이나 세력의 이익이나 이념적 지향이 아니라, 국리민복이네.

 

A군: 제가 보기에 중도적 입장은 대체로 변화에 대해 소극적이고, 정태적으로 느껴져요. 또 그러다 보면 결국 기득권 옹호적 입장으로 기울게 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요.

나: 진정한 중도는 장기적 관점에서 국가와 국민의 장래를 사려 깊게 걱정하고 소통과 합의를 통하여 그 대안을 추구하는 입장이네. 그런 의미에서 미래지향적이고, 개혁적, 역동적 입장이네. 참 중도는 당연히 사회개혁의 꿈을 지니며, 사회발전을 지향하네. 다만 그들은 체제의 기본적 질서의 틀 안에서 실현가능한 대안을 점진적, 합의적으로 추구하네. 그런 의미에서 체제의 기본적 질서를 통째로 바꾸어 보려는  좌, 우의 변혁세력들과 차이가 있네.

 

A군: 선생님의 글 속에서 교조주의에 대한 거부, 비판이 많았는데, 그 생각은 여전하시지요.

나: 물론이네. 중도는 진리독점을 거부하고, 유연한 사고, 소통과 합의, 공존과 협력을 중시하네. 반면 교조주의는 자신이 표방하는 가치를 절대선, 신성불가침의 진리로 정의하고, 다른 모든 가치 및 그를 지향하는 세력을 악(惡)으로, 또 사(邪)로 규정하고 적대시하네. 따라서 사고의 폐쇄회로, 대결적 자세, 완승(完勝) 추구가 특징적이네. 그들에게 독백은 있으되 대화나 타협은 없네. 따라서 교조주의는 다원적 민주주의의 공적이네. 유럽을 예로 할 때, 극우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포퓰리스트 정당이나, 공산당 등이 그 예이네. 우리나라의 통합진보당 구 당권파도 그 부류로 보아야 할 것이네. 나는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에 동의하지 않는 반체제적, 교조주의 정당에 대해서는 국민과 민주정당들이 단호하게 ‘방역선’(防疫線, cordon sanitaire)를 처서, 그들을 정치사회에서 밀어내야 한다고 보네.

 

A군: 우리나라의 현 정치상황은 어떻게 보십니까. 흔히 이념적 양극화 경향이 지적되는데, 이는 우려되는 현상이 아닙니까.

나: 최근 여야 간의 이념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게 사실이네. 해서 주요 쟁점에 대해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되고, 정치적 합의를 이루지 못하네. 그러다보니 여야 간에 불신은 깊어지고 합의적 체제개선이 점점 더 어려워지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실제로 우리나라 국민의 다수가 좌, 우 양극이 아니라, 폭넓게 중도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네. 국민의 마음은 중원에 있는데, 정작 그 생각을 바르게 담아야 할 여, 야가 양극에 치우쳐 국민들을 그 구석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형국이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쾌도난마식으로 찬, 반 간에 하나를 택하기 좋아하는 우리네 정치성향도 작용하지만, 편향적 언론과 무책임한 일부 지식인들의 책임도 만만치 않다고 보네. 그러다보니 중도적, 합리적 정치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선거 때나 주요 쟁점이 의제화될 때, 마땅한 선택지(選擇肢)가 없어 울며겨자먹기식으로 차선(次善)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네. 얼마나 딱한 일인가. 안철수 현상도 이와 무관하지 않네.

 

A군: 우리가 흔히, 저 사람은 보수다, 혹은 진보다 아니면 우파다 혹은 좌파다 라고 정치성향에 따라 이름 붙이기(naming)를 하는 습성이 있는데, 이런 것은 어떻게 보십니까.

나: 이해가 되지만, 매우 조심해야 된다고 생각하네. 어떤 이의 이념적 성향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니까. 사람의 이념이나 세계관은 다차원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한마디로 규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네. 예컨대 어떤 이는 경제사회적 관점에서는 비교적 진보적인 입장인데, 안보 및 남북관계의 차원에 있어서는 매우 보수적인 경우가 적지 않다네. 이런 경우, 그 당사자를 한마디로 진보다 아니면 보수다 라고 지칭하기가 어렵지 않나. 자네도 내가 보수화되었다고 지적했는데, 실제로 당사자인 나는 동의하기가 어렵다고 하지 않나. 많은 이가 실제로 자신의 눈에 맞춰 이념의 안경을 쓰고 상대방을 자의적으로 구분하는 경향이 있네.

 

A군: 한 가지만 더 여쭈어 보겠습니다. 이른바 ‘강남 좌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 강남에 사는 고학력, 고소득의 부르주아가 좌파적 정치성향을 표출하는 경우인데, 실제로 어느 시대나 있던 현상이지. 해방정국에서도 부르주아 출신들 중 적지 않은 이가 프로레타리아 계급의식을 지녔었고, 그 들 중 얼마는 아예 남로당 활동을 하던가 북한행을 감행하지 않았나. 프로레타리아에 대한 부르주아의 부채의식도 여기 작용한다고 보네. 그런데 나는 삶의 양식과 의식 간에 괴리가 큰 ‘강남 좌파’는 별로 좋아하지 않네. 개인적으로 호사스런 생활을 다하면서, 다시 말해 세속적으로 부르주아가 누릴 수 있는 것은 다 누리면서, 말과 글로만 ‘좌파’인 사람에 대해서는 믿음이 가지 않는 다는 얘기네. 그들이 삶 속에서 얼마간의 절제와 나눔을 실천하고 자신이 표방하는 정책에 의해 스스로가 계급적 불이익을 감수할 자세가 되어 있다면, 그런 ‘강남 좌파’야 누가 뭐라나. 요새 말로 ‘개념’있는 행동이지.

 

* 대화는 앞으로 계속됩니다.

'삶의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동하는 능력에 대하여  (1) 2012.09.13
대화 2  (3) 2012.08.28
잡초와의 전쟁  (7) 2012.07.11
수면 이야기 몇 가지 더  (2) 2012.06.19
머릿속 자명종  (0) 2012.06.0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