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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감동하는 능력에 대하여

2012. 9. 13. by 현강

                I

  아주 오래전 우리 집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무렵 얘기다. 두 살 터울인 남매와 동네에서 함께 산보를 나갔다. 마침 서편 하늘을 보니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노을이 무척 아름다웠다. 장엄하고 신비로웠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에게, “저걸 봐라 얼마나 아름답니, 놀랍잖니‘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그 쪽을 흘깃 처다 보더니, 그냥 눈을 돌렸다. 별로 감흥이 없어 보였다. 나는 재차 ”정말 멋있지“하고 다그치듯 다시 물었다. 그랬더니 마지못해, ”응, 근사해“라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눈길은 이미 거기서 떠나 있었다. 감동한 눈빛이 아니었다.

 

  나는 속으로 화가 났다. 아니 한창 감수성이 뛰어나야 할 그 나이에 저 자연의 신비, 오묘한 절경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다니. 도시아이들이라 그럴까. 내가 잘못 키워 그런가. 내가 어렸을 때는, ‘쌍무지개 뜨는 언덕‘이라는 김내성의 책 제목만 보고도 가슴이 뛰었는데.

 

                II.

  나는 자주 감동한다. 바다위로 힘차게 치솟는 붉은 아침 해를 보고 감동하고, 깊은 주름의 9순 시골할머니의 인자한 눈빛에 감동한다. 헬렌켈러, 간디, 슈바이처, 장기려선생, 테레사 수녀, 김수환추기경에  감동하고, 모차르트, 샤갈, 가우디, 윤동주에 감동한다. 며칠 전에 끝난 런던 장애인올림픽에서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을 보고 또 크게 감동했다.

 

  감동을 느낄 때, 나는 내가 정화(淨化)되고 치유(治癒)되는 느낌을 받는다. 내 심신에 배어 있는 온갖 거짓과 위선, 허욕과 교만, 내상과 트라우마, 묵은 때와 잡티가 제거되고. 말갛게 씻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러한 재탄생의 희열 속에 새 삶에 대한 의욕이 샘솟는다.

  감동은 또한 내게 행복감을 선사한다. 아니 내가 이런 체험을 할 수 있다니, 인간이, 그리고 세상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등의 감흥이 그것이다. 감동을 통하여 우리는 어두운 세상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하고 실존의 의미와 기쁨을 체득할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감동할 줄 모르는 사람을 보면 딱하고 화가 난다. 현대를 사는 많은 기능적 인간들은 감동을 외면하고 살고 있다.  매사에 지나치게 예민하고 너무 쉽게 감응하는 것도 문제지만, 세상만사에 무덤덤하고 온갖 감동에 면역되어 있는 밀랍인형(蜜蠟人形)이나 조화(造花)같은 사람에게는 도시 정이 가지 않는다. 그런데 겉으로는 ‘쿨(cool)'해 보이는데, 속이 따듯하고 일렁이는 감동의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있다. 온갖 연고와 패 가르기, 불공정이 판치는 우리네 세상에서 이런 사람은 오히려 믿음직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나는 감동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고, 감동할 수 있는 능력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일깨워 주는 소중한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유. 초등학교 교육과정에서 아이들의 감동능력을 키워주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올바른 독서지도, 체험학습, 인성 및 예술교육 등을 통하여 이 어린 싹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감동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도록 인도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III.

  아름다운 자연과 예술,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 온갖 간난을 극복하고 목표를 성취한 인간승리의 주인공,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 용서와 화해, 구원의 이야기, 모두가 하나가 되는 장면 등은 우리를 감동으로 몰고 간다. 이 감동의 소용돌이 속에는 아름다움, 사랑, 초월성, 용기, 연민, 배려, 화해, 그리고 공동체 등의 정신이 서려있다.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주제어는 아름다움과 사랑이 아닐까 한다.

 

  자연은 모든 아름다움의 원천이자 교과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연을 능가하는 인공(人工)은 없다고 본다. 나는 자연 속에서 신의 숨결을 느낀다. 예술은 아름다음을 추구하는 인간의 창조력의 결정체이다. 그 안에 인간의 희로애락이 미적 감정으로 용해되어 흐느끼듯 우리를 감싸 안는다. 아기를 어르는 엄마의 모습과 그에 응답하는 아기의 웃음은 언제나 티없이 아름답다. “I am Blind, yet I see, I am Deaf, yet I hear"는 헬렌켈러의 말이다. 그녀의 극적인 인생여정은 우리에게 놀라움과  부끄러움, 영감과 용기를 함께 불러일으킨다.  또  홀로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졌던 이태석 신부의 치열한 삶, 유태인 희생자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은 빌리 브란트의 용기, 한국 영화계의 이단아 김기덕이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부른 아리랑, 그리고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피에타상 앞에서 슬픔의 극치 속에서 승화된 절정의 아름다움에 깊이 감동한다.

 

   그런데 나는 권력과 재력, 그리고 폭력이 서식하는 동네에서 이룩한 업적에 대해서는 덜 감동하는 편이다. 긴 역사의 눈으로 볼 때, 혁명가, 큰 구경(口徑)의  정치가, 재벌 중에 위대한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개중에는 인류의 삶의 조건을 크게 개선한 걸출한 인물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이 왜 내 마음을 깊숙히 흔들어 놓지 못하는가.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이룩한 성취의 배경에 거대한 ‘힘’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힘을 좋은 일을 위해, 바르게 사용했는데, 또 그것이 많은 이들을 이롭게 했는데 무엇이 문제라는 말이냐 라고 따진다면, 나도 크게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그 ‘거인’들의 막강한 힘이 가동하는 과정에서, 그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서 희생된 숱한 ‘난쟁이’들의 힘없이 무너지는 모습이 눈에 밟혀 가슴이 아프다. 그래서 마음이 크게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거인들의 ‘큰’ 업적보다 난쟁이가 온몸을 던져 이룩한 ‘작은’ 성취에 더 크게 감동한다. 거기에는 그들의 각박하고 고단한 삶, 그리고(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용(凡庸)을 거부하는 초월적 의지와 치열성이 함께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를 전율케 하는 감동 뒤에는 얼마간의 슬픔을 머금은 애잔한 가락와 그것을 압도하는 힘찬 행진곡이 함께 흐를 때가 많다.

 

  나는 삶의 주변에서 감동의 바구니에 줏어 담을 수 있는 작은  행복의 조각들을  귀히 여긴다. 스쳐가는 일상 속에 한겹  살포시 숨겨진 아름다움, 그 반짝이는 보석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참 감동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본사에서 제주도로 밀려가 마음 아파하다가  바닷가 풍정과  한라산 들꽃에 빠져  그곳에 그냥 머물겠다고 청원한 내 제자 K의 탐미안과 감동능력에 깊이 공감한다.  

 

                                  IV.

  최근 학교폭력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청소년 자살도 급증하는 추세다. 나는 이들 새싹들이 감동하는 능력을 키운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감동할 줄 아는 사람, 아름다움과 사랑을 가슴에 담고 사는 사람은 나쁜 짓이나 어긋난 행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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