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나는 가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가다 차창에 비친 도시 풍경이나 한국인의 생활상을 보며, “만약 외국인이 저 모습을 보면 무어라고 말할까”라는 상상을 할 때가 많다. 그러면서 내가 잠시 외국 관광객이 되어 그들의 눈을 빌려 차창에 스쳐가는 정경을 유심히 관찰하고 가능한 한 그것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애써 보기도 한다. 그럴 때면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이나 모습들이 간혹 자랑스럽고, 흐뭇할 때도 있으나, 적지 않은 경우 부끄럽고 안쓰러워 얼굴이 붉어질 때가 없지 않다.

 

  이처럼 타인의 눈을 빌려 내 자신을 비쳐보는 일은 자신을 보다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깊이 있게 내적 성찰을 하는데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요즘처럼 ’글로벌 관점‘(global perspective)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에는 이처럼 ’제3자의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나 그럴 수 있는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II.

   우리는 17세기 후반 제주도 해협에 표류되어 13년간 한국에 억류되었던 헨드릭 하멜의 눈을 통해(‘하멜 표류기’), 그리고 19세기말 우리나라를 찾았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눈을 빌려(‘코리아와 그 이웃들’) 그 시대의 한국의 정치와 사회, 문화와 풍습을 재구성하고, 당시의 한국인의 삶과 생각을 되짚어 본다. 그런가 하면 일찍이 외국을 방문하였던 우리 선인들의 눈을 통해 그들의 겪은 문화적 충격을 되새겨 보기도 한다. 18세기 후반 북경 사행길에 올랐던 박지원(1738-1805)이 청나라의 경제. 문화의 발전상에 충격을 받고 북학론의 입장에서 집필한 ‘열하일기’(1780)나, 구한말 개화사상가인 유길준(1856-1914)이 구미를 다녀 온 후 한국의 근대화를 논의한 ‘서유견문’(1895)이 그 좋은 예이다. 이 책들은 당시 아직 세계에 눈을 뜨지 못한 우리에게 큰 세상에 대한 개안(開眼)의 계기를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인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가 세 차례 해외여행 후 ‘서양사정’(1866)을 집필하여 일본인의 개화 계몽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들 선각자들은 타인의 모습을 통해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영감과 교훈을 얻었고, 인식의 지평을 크게 넓혔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국 국민들에게 새로운 개혁과 변화의 이정표를 제시했다. 이렇듯 ‘타자의 눈’은 우리의 길들여진 일상의 한계를 극복하고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새로운 세계를 향해 자신을 여는데 큰 몫을 한다.

 

                     III.

   간혹 “외국유학이 꼭 필요 합니까”라고 묻는 제자들이 있다. 그러면 나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긴 어렵지만, 갈 수 있으면 가야지”라고 대답한다. 또 어떨 때는 “한국에서 공부를 마친 후라도, 나중에 한번 갔다 오면 크게 도움이 되지”라고 답한다. 이렇게 말할 때, 나는 유학을 통해 선진학문과 전문지식을 더 많이 접할 수 있다는 점 못지않게, 그가 다른 문화와의 만남을 통해 세계를 보는 눈과 학문을 대하는 태도를 한 단계 더 성숙시킬 수 있다는 점을 기대하며 답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새로운 문화나 문물에 접하면, 부지불식간에 그것을 자신의 것과 비교하게 된다. 초기에는 그 반응은 다분히 감정적이다. 상대 문화가 우리 보다 선진적일 때는 얼마간의 부러움과 함께 자괴감, 모방심리 등이 작용할 것이고, 그것이 후진적일 때는 어줍잖은 우월감과 더불어 상대를 폄하하는 감정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그 단계를 넘어 상대 문화에 더 가까이 다가가면, 그 문화가 지닌 빛과 그림자, 또 그 안에 깊숙이 담겨져 있는 섬세한 단면까지 점차 눈에 들어오게 된다. 대체로 이 단계에 이르면 자신의 문화와 타 문화를 보다 객관적, 분석적으로 비교, 평가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활양식, 삶의 자세, 사고방식을 성찰적 입장에서 되짚어 보게 되고, 그런 과정을 통하여 앞으로 자신이 추구해야 할 새로운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게 된다. 이렇듯 우리는 다른 문화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을 재발견하고, 결국은 두 문화를 뛰어넘는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새로운 세계를 변증법적으로 지향하게 된다.

 

                            IV.

  ‘타자의 눈’은 이렇듯 자신을 바르게 가꾸고 발전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그런데 나는 이 ‘타자’의 자리에 자신이 존경하는 ‘롤 모델’ 혹은 ‘돌아가신 부모님’, 아니면 좀 불경스러운 얘기지만 아예 ‘하느님’을 대입하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 본다. 말하자면,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을, 내가 사는 모습을 ‘하느님의 눈’으로 살펴보자는 얘기다. 그러면 하느님이 좋아 하실까. 섭섭해 하실까, 아니 분노하실 지도 모르지 하는 식의 상념이 그것이다.

 

   ‘타자의 눈’의 눈높이를 높이면 높일수록, 우리의 행동과 삶은 더 정갈해 지고 바람직해 질 것이다. 그런데 이 눈높이를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수준으로 일거에 무리하게 높이기보다는 한 단계 씩 높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나 이외의 ‘불특정 다수’의 수준에서, ‘외국인’의 수준으로, 또 거기서 내가 존경하는 ‘그 어른’의 수준으로, 한 단계 씩 더 높은 수준으로 옮겨 가면 자기관리와 자아발전을 위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글을 쓰며, 나는 “ ‘하느님이 늘 나를 내려다보고 계시다’ 라는 생각을 하며 옷깃을 여민다”라고 말했던 돌아가신 한 선배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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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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