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나는 남들이 하는 식으로 똑 같이 행동하거나 한 가지 해답에 집착하기 보다는 열심히 <대안 찾기>를 해 온 편이다. 한 길만을 고집하기 보다는 그 때 그때 선택가능한 다양한 행동경로에 두루  관심을 갖았고, 늘 대안을 모색했다. 그리고 남들과 다른 길, 다른 선택지(選擇肢)를 택할 때 크게 망설이지 않았고 그 때마다 마음이 그리 불편하지도 않았다. 나는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식의 극단론을 배척하며, 일을 처리하는데 일정한 방식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는 이른바 정석(定石)적 사고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정관념이나 상투어 같은 <클리쉐(Cliche)>를 무척 싫어했다. 그러다 보니 내 인생은 줄곧 <새길 찾기>, <대안 찾기> 여행이었다.

    

                       II.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몸이 무척 아팠다. 그래서 5월 이후 학교에 가지 못하고 내내 집에서 앓았다. 이후 학교에는 중간, 말기 시험을 치기위해 출석했던 게 고작이었다. 그러던 중 그 해 여름에 연세대학교가 입학시험 없이 학교성적만으로 뽑는 특차선발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학교성적은 그런대로 여유있게 갈 만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별로 망설이지 않고 연세대로 가기로 마음먹고, 담임선생님을 찾아뵙고 그리 말씀드렸다. 당시 내가 다녔던 K 고등학교에서는 매년 졸업생 중 절반을  넘는 숫자가 서울대학교 주요 학과에 합격을 했기에, 서울대학교 이외에 다른 대학교를 지망하는 일은 그리 흔치 않았다. 내 얘기를 들으시고, 전형적인 KS표 신봉자이신 담임선생님께서는 꽤나 마뜩잖아 하셨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심신을 추슬러 서울대학교 시험을 볼 것을 강하게 권유하셨다. 그 때 나는, “ 연세대학교가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져요. 자유롭고 개방적인 학풍도 좋고요. 제가 가고 싶어서 지망하는 것이니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했던 기억이다. 나는 지금도 그 때, 그 결정을 잘 했다고 생각한다. 우선 연세대학교에서 나는 K 고등학교나 그 연장선이 아닌 다른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대학이 훗날 나를  30여년 간 교수로서 품에 안아 주었으니 말이다.  

 

                         III

    대학원에 다니면서, 학문을 하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유학을 생각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유학 하면 미국유학을 생각할 정도로 모두가 미국을 선망했다. 그런데 나는 남들이 다 가는 미국에 마음이 크게 내키지 않았다. 대학원에서 이미 미국의 자유주의적 학문풍토는 많이 접했으니, 이제 다른 세계, 다른 문화를 찾아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오스트리아 장학생 선발 소식을 듣고, “그래, 이곳이다”라고 마음을 정했다. 서유럽 변방 소국이지만 문화대국이고 냉전의 핵(核)지대에서 중립을 선포한 나라에 가면 무언가 눈앞에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 같았다. 오스트리아 유학을 간다니 모두가 의아해 했다. “아니, 음악이라면 모를까”, “미국 세상인데, 그곳에 다녀와서 어쩌려고”가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나 당시 나는 그들의 대국(大國)주의와 시류(時流)편승을 냉소적으로 받아 들였던 것 같다. 그러면서  내 대안이 언젠가 제 값을 치를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IV.

     1971년 귀국해서 행정학과에 정착한 이후에도 내 지적 관심은 행정학을 넘어 정치학과 다른 사회과학의 여러 분야를 늘 넘나들었다. 우리나라에서 꼭 해야 할 연구인데, 아니면 적어도 지금 시작해야 할 분야인데, 다른 이들이 관심을 갖지 않으면 전공에 개의치 않고 개척적 연구를 했다. 1970년대 초, 중반 북한연구, 1970년대 후반-1980년대 초반 동구 및 공산주의 비교연구, 1980년대 초 이후 조직내 민주주의 연구와 복지국가 연구 등이 그것이었다. 첫걸음이라 힘겨웠지만, 미답(未踏)의 땅을 내 디디는 기쁨도 컸다. 그러다보니 “저 사람, 전공이 뭐야”라는 애기도 자주 들었다. 당초부터 칸막이 전공 연구보다 통섭과 융복합 연구에 관심이 컸다. 그래서 누가 나를 그냥 ‘사회과학자’라고 부를 때, ‘그 게 맞는 말이지’라고 생각했다.

 

 

                            V,

     두 번(1995/12-1977/8 및 2003.12/1005/1) 교육부 장관을 하면서 꽤 많은 사업들을 새로 벌렸다. 그 중 기억에 크게 남는 것이 EBS 수능 방송/ 인터넷 강의 와 대안학교 지원사업이다. 1995년 말 처음 장관으로 발탁되어 <5, 31 교육개혁>의 주요 방안들을 정책으로 바꾸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세계화, 자유화라는 당시 시대적 사조 때문에 정책적 역점이 교육의 수월성에 지나치게 주어졌고, 형평성을 제고하는 프로그램이 너무 빈약했다. 수월성과 형평성의 조화와 균형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종의 장관 프로젝트로 시작한 것이 위의 두 가지 사업이었다. 그러면서 사상 처음으로 ‘교육복지’라는 개념을 보편화시키기 시작했다.

 

    EBS 수능방송은 교육기회의 평등을 위해 마련한 프로그램이다. 국가가 나서서 뒤진 지역이나 없는 집안의 청소년에게 최고의 과외를 해보자는 것이 내 복안이었다. 첫 번째 장관 때 방송을 시작했고, 두 번째 장관 때 천신만고 끝에 인터넷 강의로 바꿨다.

 

    해마다 중고등학교에서 수 만명씩 중도탈락자가 생기는 것을 목도하고, 제도권 교육의 한계를 절감했다. 그래서 학교부적응, 위기, 소외 청소년을 위한 대안교육 지원을 결심하고, 특성화 학교라는 명칭으로 대안학교를 제도권 교육 안으로 끌어 들이는 노력을 시작했다. 그 때 어렵사리 문을 열었던 몇몇 대안학교는 이제 어엿한 ‘일류학교’가 되었고, 다양한 종류의 대안학교들이 교육적 실험을 계속하며, 제도권 교육에 활력을 불어 넣고 있다.

 

   두 사업 모두 무한경쟁이라는 시대적 격류에 거슬러 과감하게 시도했던 교육정책의 대안 찾기 운동이었다. 

  

                                      VI.

     오스트리아 빈(Wien)에 유학할 때, 내가 오래 살았던 곳이 이른바 빈 숲(Wiener Wald) 근방의 전형적인 서양 시골 동네였다. 나는 그곳에 살면서 무척 행복했다. 귀국 후에 우이동 손병희 선생 묘소 근처에 비들기집 만한 작은 집을 짓고 그곳에 여러 해를 살았다. 그 집이 아마추어 건축가이자 시공자인 내 처의 첫 번째 작품이다. 주위는 허허벌판이었고, 온통 북한산이 우리 집 정원 같았다. 매일 새벽 산행을 했다. 이후 몇 해 아파트에 살아 보았는데, 도시 답답해 견딜 수가 없어 마음고생이 컸다. 끝내 학교근처 연희동에 새 집을 짓고 25년 살았다. 새벽에 안산(鞍山)에 오르고 걸어서 출퇴근했다. 그러면서 강남에서 매일 장거리 여행을 하면서 집값 올랐다고 좋아 하는 동료들을 내심 딱하게 생각했다.

 

      2006년 정년퇴임하기 한발 앞서 나는 서울을 떠나 아무 연고도 없는 속초로 왔다. 10여년 전 부터 꿈꾸어 오던 ‘탈(脫) 서울’에 성공한 것이다. 서울을 떠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스스로의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였다. 서울에 살자면 이런 저런 연고 때문에 체면이나 챙기며 늘 쫓기듯 살 게 뻔해 일찌감치 멀리 도망쳐 나온 셈이다. 난생 처음 내가 이제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생각했다. 속초에 작은 아파트에서 한 2년 살아 보니, 이곳도 내가 꿈꿨던 자연의 품이 아니었다. 끝내 4년 전에 이곳 시골(고성)로 옮겨 새 집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1년 여(餘) 후, 집 앞에 땅 400평을 사서 농사를 시작했다. 농번기에는 농사에 전념하고, 농한기에는 글을 쓰며 단순하게 살고 있다. 창문을 열면 멀리 울산바위가 보이고, 동해 바닷가도 집에서 멀지 않다. 여생이 얼마 남았는지 모르나 <자연 회귀>, <자아 찾기>의 요즈음 내 생활에 만족한다.

 

 

                                 VII.

     나의 <대안 찾기> 순례는  대체로 스스로와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이루어 졌고, 얼마간의 내적 고뇌와 결의를 바탕으로 이루어 졌다. 따라서 대안을 모색해 온 그간의 인생 여정에 대해 크게 후회한 적은 없다. 대체로 보아 나는 균형과 중용(中庸),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고, 양극 보다는 <제3의 길>을 추구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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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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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영평 2013.04.08 21:08 Address Modify/Delete Reply

    선생님의 사적인 스토리텔링이 저의 삶에 많은 귀감이 됩니다.
    학자로서 중용의 길을 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닌것 같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이미 그렇게 진화되어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중용이나, 제3의 길이라는 것이, 새로운 도전과 방법론적 회의를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에게 허락된 것이 아닐까합니다.

    '자유로운 삶의 방식'은 제게도 와 있지만, 선생님의 '우아함'과는 다른
    것이어서, 많이 부끄럽네요. ㅎㅎㅎ

    선생님이 잘 보니기 시작합니다. 감사합니다.

  2. 현강 2013.04.09 10:03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전 교수께

    모두가 다수자에 영합하는데 '소수자 권리'를 걱정하는 전 교수의 연구 자세에 늘 박수를 보내왔습니다. 또 많은 이들이 제 구실도 못하며 '꾸역 꾸역' 정년 때까지 모질게 버티는데, 정년을 여러 해 앞두고 교수직을 떨치고 나와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전 교수의 용기에 놀랐습니다. 일탈 수위로 말하자면, 전 교수가 내게 선배가 되지 않을까요. 대안 찾기와 아름다운 일탈은 창조와 혁신의 샘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건강히 정진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