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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홈커밍(homecoming)

2013. 5. 2. by 현강

                                                I.

   연세대학교 졸업생들은 졸업 후 25년과 50년이 되는 해 5월(개교 기념일)에 모교를 찾아 옛 친구들과 은사들을 다시 만나는 이른바 재상봉(홈커밍) 행사를 갖는다. 5월의 신록처럼 한창 푸른 나이에 학교를 떠났다가 머리가 희끗 희끗한 50 문턱의 장년으로, 또 거기에 25주년을 보태 70대 중반 가까이 노년에 이르러 모교를 다시 찾는 것이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1988년에 25주년 홈 커밍을 했다. 서울 올림픽이 열렸던 해이다. 그게 실로 어제 같은 데, 세월이 유수처럼 흘러 다음 주 토요일(5월 11일) 50주년 행사를 앞두고 있다. 25주년 때, 저편에 앉았던 50주년 선배들의 모습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우선 그 분들이 수 십 명에 불과해서 그 자리가 무척 허전해 보였다. 하나 같이 파파 할아버지들이셨고 몸을 가누기 어려운 분도 눈에 띠었다. 인생 황혼녘의 처연한 느낌마저 갖게 했다.

   당시 내가 옆에 서 있던 친구에게, “우리가 저 나이까지 살 수 있을까?” 했더니, 그 친구가 “쉬운 일이 아니지” 하며 “그래도 그럴 수 있으면, 성공이지” 라며 빙긋 웃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내가 어느덧 그 나이가 되어, 며칠 후 그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아! 세월이여”라는 탄성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그 때 내 옆에 서 있던 친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II.

  반백년 저 넘어 그 시절, 나는 연세대 정외과에 다녔다. 1959년 입학해서 2학년 때 4.19를 맞았고, 이듬해 5.16을 겪었다. 격동의 시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 졸업할 때 총 60여 명이었는데, 졸업 후 사회 각 부문으로 흩어졌고, 미국 등지로 이민을 간 친구들도 꽤 된다. 여학생이 9명이었으니, 사회과학계열의 다른 학과에 비해 여학생들이 많았던 편이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야무지고 똑똑했는데, 시대적 제약 때문에 제 그릇을 키우지 못하고 모두 누구의 부인이 되어 가정으로 돌아갔다. 아쉬운 일이다. 동기생 중 10여 명이 국내외에서 박사를 받아 박사를 많이 배출한 학번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내 경우, 학교에 묻혀 살다 보니 사람들을 두루 사귀지 못해 늘 접촉했던 몇 명 가까운 친구를 제외하면, 많은 이의 소식은 늘 풍문으로 듣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 대부분 현역을 떠났다. 듣기로는 이미 저 세상으로 간 사람도 적지 않고, 소식이 닿지 않는 사람, 건강이 좋지 않은 이들도 많다고 한다. 그러니 홈 커밍에 몇 명이 올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이번 만남에서 졸업 후 처음 보는 얼굴도 없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III.

  2001/2002년 내가 캐나다 밴쿠버 UBC 대학의 객원교수로 가 있을 때, 그 도시에 대학동창인 K군이 산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대학 2학년 때 군대를 갔고, 그 이후는 본 적이 없는 친구였다. K군과 통화가 되어 밴쿠버 시내 한 한인 음식점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애써도 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의 영상은 내 기억에서 더 멀어졌다. 이러다간 친구 얼굴도 못 알아보지 않을까 조바심마저 났다. 나는 조금 일찍 음식점에 당도해서 출입문 가까이 자리를 잡고 앉아 들어오는 사람들 한명 한명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런데 정각이 되자 초로(初老)의 한국인 한 사람이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들어서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의 얼굴을 보자, 나는 그가 K 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손을 번쩍 들고, 나지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반갑게 내게 다가 와서, “고맙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 어떻게 나를 한 눈에 알아봤지”라고 물었다.

  그때, 내 대답이 “잔영(殘影)이 남아있어서”였다. 그 때로 따지면, 20세 전후에 헤어진 후 40년 만에 만남인데,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던 그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 것은, 역시 그의 얼굴과 몸짓에 남아있는 ‘희미한 옛 그림자’가 아니었을까.

  이번 홈 커밍 때, 졸업 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래서 얼마간 내 기억에서 이미 사라졌던 옛 친구들이 많이 왔으면 좋겠다. 또 그들이 가능하면, 이미 늙고 주름진 얼굴이지만, 자신의 모습 속에 푸르렀던 옛 시절의 ‘잔영’을 많이 간직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반 백년만의 해후에서 내가 그를 한 눈에 알아보고 “누구야”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IV.

  요즈음 나는 평론가 김병익의 산문집 <조용한 걸음으로>를 재미있게 읽고 있다. 무엇보다 노경에 든 평론가의 글 속에 나와 동시대인들, 황동규, 마종기, 정현종, 김광규 등의 이름이 자주 나와 반갑다. 책 머리에 “치수에게 ‘우리들의 남은 젊음을 위하여 건배!’” 라는 문구도 인상적이다. 아마도 그와 가까운 평론가 김치수를 두고 하는 말이겠거니 생각된다.

  이번 홈 커밍에 오는 친구들 모두가 부디 <조용한 걸음으로> 그들의 옛 자리로 왔으면 싶다. 홈 커밍의 진짜 주역은 역시 졸업 25 주년을 맞는 아직 연부역강(年富力强)한 후배들이다. 따라서 그 날의 환희와 축복은 모두 그들에게 돌리고, 우리들 노인들은 조금 떨어져서 그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며, 그냥 우리끼리 잔잔한 미소를 나누었으면 한다.

  괜한 노파심이지만, 부디 우리 <50주년 생> 중에 그날 허세를 부리거나 목소리를 크게 내는 친구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살만하다고 으스대거나 선배랍시고 후배들에 앞서 주인  노릇하는 노추(老醜)는 보이지 않았으면 싶다. 모두가 겸허하게 조용한 걸음으로 옛 보금자리를 찾았으면 싶다.

 

                                           V.

  행사를 주관하는 대표자 모임에서 행사 모금을 결정했다고 한다. 그에 따라 과 대표 이름으로 모금을 독려하는 글이 오고 있다. 오랜만에 모교를 찾으니, 그리고 큰 행사를 해야 하니 빈손으로 될 일이 아닐 것이다. 모금이 불가피하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역시 내 노파심이 발동한다. 돈 모으는 것이 일의 본질을 희석시킬까 걱정된다.  모금 소식 때문에 혹시 그날 홈 커밍 참석 의사를 접는 친구가 한 사람이라도 생길까 두려워서이다. 분명 70대 중반 나이에 생활고로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이 없지 않을 것이고, 이들에게 거듭되는 모금 얘기는 자칫 가슴 저리는 아픔으로, 아니 오지 말라는 얘기로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홈 커밍 행사는 조심스럽게, 그것도 정말 아주 조심스럽게, 가장 형편이 어려운 친구의  심경을  고려하며 세심히  준비하기를 바란다.

 

  같은 맥락에서 이 행사가 부디 세속적으로 잘 나가는 친구들 중심의 축제가 되지 않았으면 한다. 그들은 이러한 기회가 없어도 그들끼리 자주 만나고 잘 어울린다. 나 자신도 그들을 만나기 위해 굳이 그날 그 자리에 갈 생각은 없다. 그들보다는 외국에 살아 오래 보지 못 했던 그리운 얼굴,  문뜩문뜩 생각나는  조용했던 옛 단짝, 굴곡진 인생의 여정에서 고단하게 살아 온 착한 친구, 학창 시절 한 번도 말을 나눠보지 못했던 수즙은 여학생, 그런 온갖 모습의 옛 젊음들을 두루 만나 오랜 만에 손을 맞잡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대표 측은 부디 좀처럼 올 것 같지 않았던 마지막 친구가  가벼운 마음, 밝은 얼굴로  홈 커밍에  편안하게 올 수 있도록, 넓고 푸근한 멍석을 깔아 주었으면 고맙겠다.

                                 

 

                                             VI.

  돌이켜 보면, 강은교 시인의 말대로, 우리는 파란만장한 시대에 ‘꾸역꾸역’ 오래 살았다. 해방 후 첫 한글세대로 한국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그 이후의 때로는 모질고, 때로는 보람찬 긴 세월을 대차게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렀다. 이 나이에 있고  없고가, 이루고 못 이루고가 무슨 대수인가.  홈 커밍에 참석하는 우리 모두가 너나없이 ‘승리자’고 ‘성공한 인생’이다.  그리고 적어도 마음만은 우리 모두 처음 만났던 프릇 프릇한 싱그러운 스무살의 청년들이다.

                                 그날 저녁 우리 모두 함께 외치자.

 

                                “우리들의 남은 젊음을 위하여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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