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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L군, 어디 잘있겠지?"

2013. 3. 12. by 현강

                                   I.

   오래된 일이라 시점이 확실치 않다. 내 기억으로는 유신 말기였던 것 같은데, 그 이후의 경과를 따져보면 1980년대 초 이른바 5공 초기 일인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무척 엄혹했던 권위주의 시절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내가 교수로 일하던 연세대학교 행정학과 학생 한명이 정권을 비판하는 전단을 뿌렸다가 경찰에 잡혀갔다. 얼굴이 희고 귀티 나는 귀공자 타입의 3학년 L군이었는데, 평소에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학생이었다. 혼자 저지른 일이 었다. 그런데 글 내용이 매우 신랄하고 비판수위가 높아 정보기관에서 크게 다룬다는 얘기가 들렸다. 얌전히 학교에 잘 다니던 외아들이 잡혀 들어가니 집안에서도 난리가 났다. 몇 살 위 시집안 간 누나가 사색이 되어 학교로 쫓아왔던 기억이 난다. 결국 제적이 되고 한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몇 년 후, L군이 학교로 나를 찾아왔다. 그 맑고 곱던 얼굴은 사라지고, 까칠한 모습에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다. 감옥에서 나와 몇 년째 노동현장에 있다고 말했다. 그 동안 중졸 출신의 여공을 만나 결혼을 했다는 얘기도 전했다. 나는 그에게 권위주의 시대가 이제 걷히고 있고, 극단적인 체제변혁적 사고는 <세계의 시계>에 거슬리는 것이니 새 길을 찾아보자고 얘기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1986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의 여명이 찾아 왔고, 제적되었던 학생들이 대거 복적이 되어 학교로 돌아왔다. 그 대열에 L군도 끼어 있었다. 다시 찾아 온 그에게서, 색시와 마음이 안 맞아 헤어졌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가슴이 아팠다. 새까만 후배들과 함께 강의을 듣자니 꽤나 편치 않았을 텐데, L군은 조용히 남은 학기를 한 땀 한 땀 채웠다. 그늘진 얼굴로 언제나 느릿느릿 혼자 걸어 다녔다. 얼핏보면 운둔자나 명상가 같은 모습이었다. 혹시 중도에 포기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만날 때 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학업은 맞춰야 한다고 얘기를 했다. 그러면 그는 빙그레 웃으며, “네, 걱정 마세요”라고 대답하곤 했다.

 

  마침내 L군이 졸업을 했다. 1988년 초가 아닐까 한다. 나는 무척 기뻤다.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앞으로의 그의 진로가 문제였다. 그는 어디든 일자리가 있으면, 이제 마음잡고 일을 하겠다는데, 나이도 나이거니와 오래 감옥살이했던 전력이 있으니 취직이 쉬울 리가 없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얼마간 밝은 모습으로 나를 찾아 왔다. 얘기인 즉은, 잘나가는 한 중견업체에서 사람을 뽑는데, 교수 추천서를 중시한다니 추천서를 한 장 써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대뜸, “나는 거짓말은 못 쓴다. 내가 자네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 그러니 다른 분에게 가보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꼭 선생님이 쓰셔야 됩니다. 저를 아시는 대로 그대로 쓰시면 돼요. 저를 기억하는 교수님은 선생님뿐입니다” 라고 답했다. 나는 다음 날 다시 찾아오라며 그를 돌려보냈다.

 

  밤새 고민을 했다. 그리고 어렵게 추천서를 썼다. 대체로 내용은 그가 매우 유능하고, 성실한 청년이라는 것, 그리고 내가 무척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라는 것을 내 느낌대로 썼다. 그리고 크게 망설이다가 끝내 “어두운 지난 시대를 살아가면서, 고뇌를 많이 했던 청년입니다. 몸으로 맞서다가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라는 구절을 넣었다. 추천서를 쓰면서, 피해 갈 수 없는 대목이라고 생각했다. 은유적이지만, 그의 전력(前歷)을 그대로 드러낸 셈이다.

다음 날 아침, L군에게 밀봉하기 전에 내가 쓴 추천서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제출 여부는 본인에게 맡겼다. 그는 “고맙습니다. 그대로 제출하겠습니다”라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II.

  그 후로는 L군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나는 그가 지망했던 회사에 취업이 안 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내가 사장이라도 운동권에다 감옥살이 까지 한 그를 받아 들였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내 추천서가 그의 취업을 돕기 보다는 방해를 했을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다. 1992년쯤으로 기억된다. 내가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저녁 특강을 했다. 대상이 누구였는지, 특강 제목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늦은 시간에 특강을 맞췄는데, 내 강의를 들었던 중년 한 분이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곧장  “교수님, 제자 L군을 기억하시지요?”라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제가 그 회사 사장입니다. 좋은 제자를 보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L군이 제 오른 팔입니다. 요즈음 자주 그가 없었다면 내가 얼마나 힘겨울까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고조되는 흥분 속에 아스라한 반전(反轉)을 느꼈다.

 

  나는 놀라 그의 손을 마주 잡고 그의 뒷말을 재촉했다. 그는 내 추천서를 보고 L군의 전력을 알았지만, 내가 <가슴으로 추천했기에> 교수를 믿고 그를 쓰기로 작정했노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L군과 내 얘기를 여러 번 나누어 나를 잘 알고 있다는 말도 했다. 또 L군이 차일피일 미루다가 제 때에 나를 찾아보지 못해, 미안해서 아직 연락을 하지 못한 것 같다는 얘기도 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벅찬 감회를 느꼈다. 아울러 좀처럼 풀리지 않았던 만성 체증이 사그라지는 후련한 느낌을 가졌다. 나는 L군을 따듯하게 품에 안은 사장에게 진심으로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는 자신도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나와 L군의 선배라며, 자신도 학교 다닐 때 이른바 운동을 많이 해서 선생님들 속께나 태웠다고 털어 놓았다.

 

                                                 III.

  대학교수로 1970년대, 80년대의 권위주의 시대를 보내면서, 정말 모진 세월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는 신문과 잡지에 민주화하자는 글도 많이 썼고, 여러 차례 이른바 교수 서명도 주도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한 번도 잡혀가지 않았다. 그러나 수많은 제자들이 잡혀가고 고문을 당하는 등 말 못할 고초를 겪었다. 그것을 지켜보는 것도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다.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 제자들이 어려울 때 함께 걱정해 주고, 필요할 때 그를 보증해 주는 일이었다. 신원보증은 수 없이 많이 했고, 재정보증도 두 차례 섰다. 괜한 걱정을 할까 우려되어 한 번도 내 처에게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내가 보증을 했다가 어려움을 겪은 일은 한 차례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본질적으로 순수한 친구들이었고  대의를 위해서 열정을 받쳤던 청년들이었기 때문에 사적 동기에서 스승에게 어려움을 주는 일은 없었다. 내가 보증하거나 추천한 제자 들 중 에 대학교수도 여러 명 되었고, 신문사 편집국장, 국회의원도 나왔다. 학생운동의 후유증으로 어려움을 겪는 제자들도 없지 않으나, 대체로 그 고통의 시간을 보내면서 나름의 내공을 쌓아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그들 중 많은 이가 이제 초로(初老)에 접어들어 나와는 친구처럼 지낸다.

 

                                         IV.

   L군에게서는 아직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 따져 보니 그의 사장을 만나 본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시간이 너무 오래 흘렀으니, 이제 뒤늦게 내게 연락하기가 더 어려울 것 같다. "L군! 어디 잘 있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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