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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미리 적는 발문(跋文)

2011. 12. 21. by 현강

            I.
   어제 제자 한 사람이 내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는, “가끔 선생님 블로그를 들리는데, 왜 요즘 글이 뜸하세요? 전에는 일주일에 한편씩은 올리시더니, 요즘은 글이 늦어지고, 이번에는 20일이 가까워지는데도 소식이 없어 걱정되네요. 혹 어디 편찮으시든가, 심기 불편한 일이라도 있으신 것은 아니시죠?”라고 물었다. 나는 황급히 “아니, 나는 별일 없네, 단지 요즘 내가 뭐 따로 전념하는 일이 있어 블로그에 소홀히 했네. 앞으로 좀 더 자주 글을 올리겠네.”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그 친구가 “전념하시는 일이 무엇이신데요? 속 시원하게 털어놓으시지요.”라고 재차 물었다.

               II.
  
요즘 나는 책을 쓰고 있다. 책 제목은 가칭 <오스트리아 모델 연구>이다. 이 책은 내가 지난여름 유럽 여행을 가기 전부터 구상한 것인데, 몇 달 전부터 바짝 매달리고 있다. 생각보다 글의 진척이 늦어 마음고생이 크지만, 그런대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내 근황도 알릴 겸 이 책에 대해 몇 마디 하려 한다.
  <스웨덴 모델>, <핀란드 모델>, <네덜란드 모델>이라는 말은 이제 우리에게도 익숙하지만 사실 <오스트리아 모델>이라는 개념은 생소하고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내가 그 주제에 매달리는지, 또 도대체 거기서 무엇을 다루려 하는지 밝히고자 한다..
  
그 이유는 <오스트리아>의 현대사가 우리에게 너무 많은 얘기를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스웨덴>, <핀란드>, <네덜란드> 등 이른바 유럽의 잘 나라는 강소국들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지만, 내 생각으로는 오스트리아만큼 오늘날 우리 문제를 풀어 가는데 유용한 준거 틀이 되고 아울러 유익한 교훈을 줄 수 있는 나라는 없다고 본다. 그런데 한국에서 오스트리아에 대한 관심이나 연구수준이 매우 낮아, 이 나라는 그냥 <숨겨진 보물>로 남아 있다. 그런데 내가 예전에 이 나라에 유학을 했기에 이 나라에 대해 남들보다 좀 더 아는 편이다. 그래서 이 나라를 주제로 글을 쓰게 된 것이다.

               III.
  
오스트리아의 현대사는 실로 파란만장한 드라마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거대 제국에서 알프스 산간의 작은 약소국으로 전락한다. 오스트리아인들은 독일과의 합병을 원했으나, <생 제르맹>조약에서 전승국들이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깊은 좌절에 빠진다. 그런 의미에서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1919-1938)은 <누구도 원치 않는 나라>이었으며, 경제적으로도 많은 이가 그 생존 가능성에 회의를 가졌다. 국가가 제구실을 못하는 상황에서 이념의 양극화가 첨예화된다. 가톨릭 보수주의자들의 <검은 진영>과 오스트로 마르크시스트인 <붉은 진영>으로 크게 갈라져, 치열한 다툼을 벌이다가 끝내 1934년 시민전쟁으로까지 치닫는다. 이후 권위주의적 파시스트 정권(1934-1938)을 거쳐 1938년 히틀러에 의해 독일제국에 합병되고 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오스트리아는 연합국에 의해 분할 점령된다. 이후 10년간에 걸친 끈질긴 협상을 통하여 1955년 역사적인 <중립화 통일>을 성취하고 주권을 회복한다. 또한, 이 나라의 정치지도자들은 제1공화국 실패를 교훈 삼아 과거의 이념 갈등에서 벗어나 좌. 우가 협력하여 국정을 관리하는 <합의제 민주주의>와 노. 사. 정이 사회적 협의를 통하여 경제 및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이른바 <사회적 파트너십>을 발전시킨다. 이러한 공동의 노력을 통하여 1970 중반 이후 유럽을 휩쓴 경제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놀라운 경제성장과 더불어, 유럽의 대표적인 복지국가로 발돋움하였다. 지난 4반세기 동안 오스트리아는 동구의 붕괴, 세계화의 격류, 복지국가 위기  등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범적으로 제반 갈등을 조정하고 체제를 관리하여 지속적으로 발전해 <축복의 섬>이라는 찬사를 듣는다. 그러는 가운데, 오스트리아인들은 제1공화국에서 결여됐던 국민적 정체성을 확립하고, 1995년 유럽연합에 가입함으로써 소극적 중립을 넘어 유럽과 세계를 향해 새로운 역사적 지평을 열고 있다.

  오스트리아는 현재 GDP $43.723(2010년)로 세계 굴지의 부국이면서, 경제성장률, 사회보장수준, 고용률, 물가안정, 사회평화 등에 있어 모두 OECD 국가 중 최상위권에 있다. 그런가 하면 예술 및 문화, 학술부문의 세계기여도 괄목할 만하다.

  나는 지난 60여 년간 오스트리아가 성취한 역사적 기념비들, 즉 <중립화 통일>, <합의제 민주주의>, <사회적 파트너십>, <복지국가>. <국민적 정체성>을 자세히 살펴보고, 아울러 유럽의 한낮 변방 국가였던 이 나라가 이처럼 세계의 대표적 강소국으로 발전하게 된 성공적 체제관리의 원천은 무엇인가, 그 성공 원인을 이 나라의 역사. 문화적 유산으로부터 전후 새 나라 건설에 앞장섰던 정치지도자의 리더십, 국가발전 전략, 주요 제도와 갈등조정 방식 등에서 찾아보고, 이들의 지혜와 경험을 나누고 싶다.

              IV.
 
나는 오스트리아의 현대사를 쓰면서, 이를 지나치게 미화할 생각은 없다. 그들이 그 과정에서 겪었던 수많은 시행착오, 크고 작은 실패, 집단적 이기심과 위선, 모순과 역설을 함께 파헤치려 한다. 그래야 균형 잡힌 큰 그림이 그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오스트리아의 현대사를 재조명하려는 가장 큰 의도는, 오스트리아 제2공화국이 합의와 상생의 역사였고, 그것이 오늘 우리가 겨냥해야 할 지향점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것이 이념적 갈등과 양극화, 정치적 극한 대결과 공멸로 점철되었던 이 나라 제1공화국의 대실패 위에 이룩한 성과이기 때문에, 더 값지고 보람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역사 속에서 교훈을 찾는다는 일은 실제로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V.
  
책을 다 쓰지도 않고 미리 떠벌리는 것은 미련하고 성숙되지 못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이러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밖으로 공표하고 약속을 해서 나 스스로를 묶어놓고 움치고 뛰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다. 큰 소리 쳐 놓고 책을 제때에 끝내지 못하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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