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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190

회색빛 새해맞이 I. 새해를 맞아 몇몇 가까운 친지들과 전화로 의례적인 덕담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마음은 큰 바위에 짓눌린 듯 무겁고 칠흑 어둠에 갇힌 듯 답답하기 짝이 없다. 한 마디로 세상이 온통 회색빛이다. 되돌아보아도 새천년의 동이 튼 후 이처럼 처절하게 울적했던 새해맞이는 기억에 없다. 몇 가지 이 우울함의 원천을 찾아 그 뿌리를 되짚어본다. II. 우선 한 살 더 보탠 내 나이도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요인의 하나가 아닐까, 여든하고 또 둘이라니! 믿기지 않는 나이다. 지난 해 마지막 달인 12월 한달 사이에 내 고등학교 동기 다섯 명이 세상을 떠났다. 그중에는 불과 몇 달 전에 멀쩡한 모습으로 저녁을 함께했던 친구도 있었다. 이젠 친구의 부음을 접해도 그리 놀라지도 않는다. 그저 나보다 몇 걸음 빨랐다는 심경.. 2022. 1. 30.
최종태 작가의 “9순(旬)을 사는 이야기" I. 지난달 12일, 서울 평창동 ‘김종영 미술관’에서 개막된 한국의 대표적 성상(聖像) 조각가인 최종태 선생의 초대전 ‘9순을 사는 이야기’를 다녀왔다. 이번 전시에는 조각 42점을 비롯해 테라코타, 청동, 나무 등을 소재로 한 작품 77점이 출품됐는데, 놀랍게도 그 중 많은 것이 최근작이었다. 작품 마다 노 작가의 연륜과 내공에서 우러나오는 예술혼이 빛났다. 무엇보다 나는 오랜만에 선생님을 직접 뵙고 대화를 나눌 수 있어 무척 좋았다. 그 날도 작품 감상과 대화를 통하여 경건한 구도자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작가의 삶의 궤적과 예술적 통찰력에 크게 감복하고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II. 최종태 작가는 그의 미술수련 과정에서 서울대 은사인 고 김종영 조각가와 고 장욱진 화백, 그리고 프랑스의 종교화가 조르.. 2021. 12. 5.
<인생삼모작> 질의. 응답 인터넷서점(교보)에서 출판사 를 통해 내 새책 에 대한 질문서를 보내왔다. 아래 내용은 그에 대한 나의 답신이다. 인터넷서점 [이슈 도서] 체크포인트 『인생 삼모작』 안병영 / 21세기북스 Q. 한국의 대표적 사회과학자이시고, 김영삼, 노무현 두 정부에서 교육부 수장으로 지내셨는데, 대학 정년을 앞두고 갑자기 강원도 고성으로 귀촌을 하시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아울러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A. 서울태생인 저는 젊은 시절부터 노후에는 시골에 가서 ‘다른 삶’을 살아 보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번잡하고 세속적인 ‘관계의 망’ 속에 얽혀있는 대도시에서 벗어나서, 내가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고 싶은 열망이 컸고, 내 노후를 따스하게 안아 줄 수 있는 자연의 품이 그.. 2021. 10. 15.
멧돼지 소동 I. 한 달 전 쯤이다. 저녁 어스름에 효소 항아리들 근처에서 거뭇한 물체가 보이는 듯 해서 가까이 다가갔더니 웬걸 큰 개 같은 놈 하나가 놀라 나를 스치고 도망을 갔다. 옆구리를 그냥 조금 스쳤는데도 꽤 묵중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깜짝 놀라 도망간 쪽으로 눈을 돌리는데, 뒤를 따라오던 내 처가 큰 소리로 “멧돼지야!”하고 소리쳤다. 이미 저만치 달아난 놈의 뒷모습을 보니 중간 크기의 멧돼지가 틀림없었다. 그 순간 나는 멀쩡하던 다리가 풀려 엉거주춤 그 자리에 반쯤 주저앉았다. II. 이후 일주일간 우리 집 효소 항아리들은 큰 수난을 당했다. 지난 두 해 동안 수확해 담그어 놓은 블루베리, 오디, 보리수, 매실의 효소 항아리(항아리라기 보다 독이라 불러 마땅한 제법 큰 규모의 옹기) 아홉 개 중 다섯을.. 2021. 9. 13.
'인생 삼모작'의 머리글 빠르면 내달 중순쯤 내 새 에세이 집 이 사에서 출간된다. 부제는 '세 못자리에서 거둔 중도주의적 생활철학'이다. 여기 우선 그 머리글인 '글 머리에'를 선 보인다. I. 서울태생인 나는 젊은 시절부터 언젠가 노후에 시골에 가서 ‘다른 삶’을 살아 보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15년 전 정년퇴임에 앞서 마지막 학기가 무섭게 이곳 속초/고성으로 내려왔다. 처음 2년 가까이 속초에 살다가, 이후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로 옮겨 와서, 한여름에는 농사짓고, 겨울에는 글 쓰며, 남들이 다니는 큰 길가에서 얼마간 비켜서서 한적하게 살고 있다. 인공(人工)의 작품인 거대도시를 떠나, 중간단계인 소도시를 거쳐 마침내 자연의 품인 농촌에 연착륙하면서 내 삶의 양식도 많이 변했다. 평생 책.. 2021. 8. 26.
586 운동권과 한국정치 I. 얼마 전 옛 제자 J가 찾아왔다. 그는 86학번으로 당시 내가 개설한 5개 과목을 모두 수강했던 자칭 내 열성팬인데, 그와 지난 얘기를 주고받다가 대화는 1980년대로 돌아갔다. 그는 내 정치적 관점과 관련해서 아래의 질문을 던졌다. 나는 허심탄회하게 그에게 답했다. 그 대화 내용을 가감 없이 여기에 담는다. II. J군: 1980년대는 질풍노도의 시대였습니다. 특히 80년대 중후반 대학에는 급진적 변혁 사상이 풍미하고 있었지요. 저는 86년에 학교에 들어 왔는데, 마음속으로는 사회주의 이상에 끌렸지만, 현실 사회주의는 물음표였습니다. 북한 사회주의는 물론 동구 공산주의도 대안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교수님의 ‘동구공산권체제변동’ 강의를 들으며 생각이 많이 정리되었죠. 그런데, 그때 다른 많은 친.. 2021. 7. 19.
국정(國政)운영의 ‘이어가기’, ‘쌓아가기’ I. 나는 꽤 오래전부터 성공적 국정운영의 진수(眞髓)는 ‘이어가기’와 ‘쌓아가기’라고 주장해 왔다. 절차적 민주주의가 제 궤도에 올라 정권교체가 일상화되면, 이념과 정책기조가 달라도 앞선 정권이 이룩한 긍정적 성과는 다음 정권이 승계하고, 그 위에 새로운 성과를 덧붙여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야 역사가 쌓이고 나라가 발전한다. 물론 때때로 과거를 점검하고, 필요하면 누적된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이어갈 것과 버릴 것을 세심하고 공정하게 가려야 한다. 또한 그 변화의 수위가 체제의 근간을 흔들어서는 안 되고, 지난 정권이 이룩한 긍정적 성과까지 타기(唾棄)하거나 뒤집어서는 안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는 독일이 아닌가 한다. 역사적으로 독일의 정치사.. 2021. 6.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