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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190

가을 여정(旅情) I. 나이가 들수록 농사짓는 일이 힘겨워 무덥고 길었던 여름철이 지나자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었다. 지난 몇 년 동안 자주 아팠던 내 처도 그런대로 건강이 얼마간 회복되어 오랜만에 가을 여행 얘기를 꺼냈다. 그래서 합의한 것이 유럽여행이었다. 이런 저런 궁리를 하다가 결국 여행사 를 따라가기로 마음을 정했다. 다행히 천안 사돈 내외와 속초 K형 내외가 함께 가기로 해서 힘을 얻었다. 그래서 지난 9월 19일부터 30일까지의 11박 12일의 이른바 을 다녀왔다. 일행이 23명이었는데, 중, 장년 층 여성이 다수였고, 거기에 평균 나이 의 6명의 우리 노인그룹이 끼었다. 여행은 강행군이었다. 불과 11일 동안에 7개국을 돌았으니, 정말 식, 식 여행이었다. 어떤 날은 국경을 세 번이나 넘나들며, 명소 중심으.. 2017. 10. 12.
딸과의 약속 I. 1995년 12월 20일, 벌써 20년 저 너머의 오래된 얘기다. 그날 저녁을 먹고 서재에 앉았는데, SBS에서 교양 PD를 하는 딸애가 노크했다. 내 방을 찾은 일이 흔한 일이 아니기에 나는 그녀를 반겨 맞았다. 그랬더니 불쑥 “아빠, 만약에, 정말 만약에 말이야, 아빠에게 장관을 하라고 하면 하실꺼야”라고 묻는 게 아닌가. 의외였다. 평소에 말 수가 많지 않고 그런 류의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니, 결코 그런 일이 없겠지만,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걸, 뭐가 아쉬워서 이제 와서 장관을 하겠니”. 그랬더니, 딸애는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그럼 나하고 약속해. 절대 안 하신다고.”라고 다그쳤다. 나는 분명히 답했다. “물론, 그거야 어렵지 않지, 절대 안 .. 2017. 8. 22.
'학점 인프레' 유감 I. 한 10년 전 얘기다. 가까운 제자 교수가 내게 대학에서 정년퇴임을 하게 돼서 좋은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대뜸, “우선 시험성적 매기지 않게 돼서 그 점이 제일 좋은데“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채점한다는 일이 워낙 쉽지 않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게 점점 더 어려워지더군. 그래서 학기말이 되면, 채점할 일이 나를 꽤나 옥죄였네. 그래서 종강하고 시험이 끝나도 성적 제출하기 까지는 실제로 내게 방학이 방학이 아니었지“라고 답했다. 채점은 평가행위의 일종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늘 다른 사람과 주위의 사물, 혹은 정황을 평가하고 그에 따라 대응한다. 그런데 실제로 공정한 평가는 그리 쉽지 않다. 때로는 정보의 부족이나 선입관, 편견 때문에, 혹은 이해타산이나 대세에 눌려 그릇된 평가를 할.. 2017. 6. 26.
내 사랑 영랑호 I. 얼마 전에 내 처가 느닷없이 내게 물었다. “만약에 내가 먼저 세상을 뜨면, 당신 혼자 여기 원암리(내가 사는 동리 이름)에 그냥 살겠어요?” 나는 별로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 그럴 생각 없는데. 당신 없이 혼자 농사를 어떻게 져. 떠나야지” 그러자 내 처는, “그럼, 서울로 되돌아가겠다는 얘기네” 이에 대해 내 대답은 단호했다, “아니. 내가 왜 서울로 다시 가. 그곳이 진저리나서 내려 왔는데” 그러자 내처는 답답한 듯, “여기는 떠나겠다. 그런데 서울은 안 가겠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라고 재차 물었다. 나는 숨을 한번 크게 내 쉰후 , “ 만약에, 그럴리 없겠지만 정말 만약에 말이야, 당신이 먼저 죽으면, 나는 영랑호 주변에 한 20평짜리 몇 년 된 아파트 하나를 구해서 거.. 2017. 5. 2.
두 교장 선생님 이야기 I. 1957년 3월 이맘 쯤, 내가 막 경기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 새 봄을 맞았던 때였다. 학교가 웅성웅성하더니 이내 우리 학교의 조재호 교장선생님과 서울고등학교의 김원규 교장선생님이 서로 자리를 맞바꾸게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모두가 반신반의하면서, 하나 같이 “말도 안 돼”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당시 경기고와 서울고는 서로 자웅을 다투는 천하의 맞수였고, 양교의 두 교장 선생님들 역시 중등교육계에 거목으로 서로 다른 교육철학과 리더십에 따라 학교를 키우고 있었다. 특히 서울고의 김 교장선생님은 스파르타식 엘리트 교육으로 서울고를 급성장시켜 경기고의 입지를 크게 위협하던 분이기에, 우리의 입장에서는 라이벌 학교의 수장을 교장으로 모시게 된다는 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욱이 근엄한 .. 2017. 3. 10.
새해 새 아침에 새해 첫날이다. 새벽 이른 시간, 하루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다. 곧 새 아침이 밝아올 것이다. 젊은 시절에 느꼈던 설렘과 세찬 박동, 결의와 다짐은 이제 일렁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냥 조용히 기도하고 싶은 심경이다. 우선 나라 걱정이 크다. 변화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우려가 착종한다. 나를 포함해 시민, 정치인, 언론, 검찰과 판관들 모두 새해 새 아침에 묵념하는 자세로 치열하게 자기 성찰을 했으면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내면 속의 깊이 숨어있는 온갖 부정의하고 떳떳치 못한 요소들을 과감히 걸러내고, 오직 본질 추구와 나라사랑, 그리고 사회통합의 정신으로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함께 난국을 돌파하기를 희원한다. 다음 우리 국민 모두가 보다 절제하는 덕성을 생활화 .. 2017. 1. 1.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I. 나는 자주 자신이 한 말을 잊고 산다. 아니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다. 오랜 만에 만난 제자가 내게 “그 때 선생님이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라고 옛 이야기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나 자신은 그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할 때가 적지 않다. 더구나 그가 진지한 얼굴로, “그 때 그 말씀이 제가 유학시절 몇 번 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라고 말할 때는 무척이나 당황스럽다. 그러면서 내심 미안하고 고맙기 그지없다. 아마 교직에 오래 있었던 다른 분들도 이런 경험이 꽤 있었을 듯싶다. II. 얼마 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어떤 자리에서 전에 교육부에 함께 있었던 K 국장을 만났다. 그와 이런 저런 대화를 하던 도중, 그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교수님을 장.. 2016. 1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