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영랑호

삶의 단상 2017. 5. 2. 18:22 |

                         I.

얼마 전에 내 처가 느닷없이 내게 물었다.

“만약에 내가 먼저 세상을 뜨면, 당신 혼자 여기 원암리(내가 사는 동리 이름)에 그냥 살겠어요?”

 

나는 별로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 그럴 생각 없는데. 당신 없이 혼자 농사를 어떻게 져. 떠나야지”

그러자 내 처는,

“그럼, 서울로 되돌아가겠다는 얘기네”

이에 대해 내 대답은 단호했다,

“아니. 내가 왜 서울로 다시 가. 그곳이 진저리나서 내려 왔는데”

그러자 내처는 답답한 듯,

“여기는 떠나겠다. 그런데 서울은 안 가겠다.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라고 재차 물었다.

 

나는 숨을 한번 크게 내 쉰후 ,

“ 만약에, 그럴리 없겠지만 정말 만약에 말이야, 당신이 먼저 죽으면, 나는 영랑호 주변에 한 20평짜리 몇 년 된 아파트 하나를 구해서 거기 혼자 살 거야. 당신 내가 영랑호 좋아 하는 것 잘 알잖아. 경관이 일품이지, 매일 새벽 산책할 수 있지. 시외버스 터미널과 시장 가깝고, 버스 편도 좋잖아, 대형병원도 호숫가에 있고. 그뿐인가. 몇 발자국 이면 바닷가 아냐. 세상에 그런 데가 어디 있어. 특히 나처럼 운전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딱이지.“

 

이렇게 혼자 주절거리다, ‘아차 너무 나간 것 아닌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 처가,

“당신, 이제 보니 나 먼저 보내고 살 궁리 다 해 놓았군. 그러면 벌 받아”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리고는 “당신 좋아하는 거 보기 싫어서라도 좀 더 살아야겠네요.”라고 말을 맺었다. 뒤끝이 만만치 않다.

 

 

사실 나는, 그 며칠 전, 영랑호 주변을 혼자 걷다가, 문득 “만약 내가 혼자된다면”의 가정아래 앞의 시나리오를 한번 스치듯 생각해 보았다. 그랬던 터라 눈치 없이 내 처가 서운할 정도로 대답이 막힘없이 술술 나왔던 것이다.

 

 

                                    II.

나는 속초/고성에 오기 전에는 속초의 청초호는 알았지만 영랑호는 들어 보지도 못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가까이에 영랑호라는 천혜의 보고를 발견하고는 ‘아니 세상에 이런 곳이'’ 하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속초 서북부에 자리한 영랑호는 바다와 맞닿아있는 이른바 석호로 둘레 7.8Km, 약 36만평의 아름다운 자연호수다. 영랑호라는 이름은 신라 화랑인 ‘영랑’이 이 호수를 발견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하고 있단다. 이름난 철새도래지로 백로의 무리인 고니와 청둥오리, 가창오리 등이 늦가을부터 봄까지 월동한다. 고니의 비상하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이다. 때로는 현란한 군무도 펼쳐진다.  봄철 벚꽃과 가을 단풍도 단연 일품이다. 겨울 눈 속에 영랑호는 신비의 설국이다. 영랑정, 범바위 등 이름난 관광명소가 있는가 하면, 카누경기장과 가까이는 옛 화랑 후예들이 마상무예 체험단지도 있다.

 

영랑호를 한 바퀴 돌자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전체 호수가 시야에 들어올 때도 있지만, 구비 구비 돌 때가 많은 데, 눈 앞에 펼쳐지는 장면이 그 때마다 바뀌고, 저마다 특색있는 정경을 선 보인다. 멀리 설악의 연봉과 장엄한 울산바위가 보이는가 하면, 범바위 같은 절경을 만나기도 하고, 때로는 숲속에 감쳐진 신비한 연못에 당도하기도 한다. 해돋이와 해넘이가 모두 장관이다. 호수를 가운데 두고 산과 바다, 꽃과 나무, 철새와 바위가 함께 펼치는 자유변주곡은 네 계절 어느 때도 관객들을 황홀의 경지로 몰고 간다. .

 

11년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영랑호 한 바퀴 도는데, 대체로 1시간 20분 걸렸다. 그 때믄 마치 경보 선수처럼 빠른 속도로 걸었다. 그런데 이제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즐기면서 걷는다. 그러다 보니 1시간 4-50분이 걸린다. 나이 탓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내가 점차 탐미주의적으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호수가 주위의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호홉하고 있어 그 점이 최상의 매력 포인트인데,  최근 주변에 고급아파트가 건축되는 등, 인공화, 세속화, 현대화의 격류가 점차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호수 특유의 '자연미'가 상실될까 우려가 된다.    

 

내 처는 내가 영랑호에 홀딱  반했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호수인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지나치게 거기에 탐닉해 있다는 것이다. 그럴까. 그럴 수도 있겠지. 어떻든 영랑호가 이곳 속초/고성에서의 내 삶을 보다 풍요롭고 사색적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부디, 아니 결단코 내가 이 근처에 아파트를 얻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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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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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아무개 2017.05.03 08:23 Address Modify/Delete Reply

    영랑호 너무 좋죠^^
    제대로 보셨네요^^

  2. 전은경 2017.05.04 07:28 Address Modify/Delete Reply

    지금 출근길 선생님의 '기억속의 보좌신부님'을 읽다가 너무 감명받아 선생님께 꼭 감사의 편지라도 보내야지하면서 현강재가 어딜까 하면 인터넷 쳐보니 이렇게 쉽게 감사의 말을 전할 수있게 되네요. 신기합니다. 이렇게 진실된 좋은글 읽게 해주셔서 감사드리고 다기한번 진실되게 삶을 살아야 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3. 현강 2017.05.05 04:27 Address Modify/Delete Reply

    제 글을 좋게 읽고, 글까지 주시니 고맙습니다.

  4. 손윤식 2017.05.16 14:33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 그리고 사모님, 잘 지내시지요?
    가끔 몰래 현강재에 들어와
    남기신 글, 재미있게 읽곤 합니다.

    얼마전에는 교수님 수필집에서 읽은 연희관 317호실을 보여 주고 싶어서,
    아이들과 연희관 부근을 다녀 왔습니다.

    가끔 현강재에 들어와 교수님이 남기신 흔적을 찾는 것이
    제게는 작은 즐거움입니다.
    교수님, 그리고 사모님, 늘 건강하세요~

  5. 현강 2017.05.17 04:40 Address Modify/Delete Reply

    손윤식 군
    무척 고맙네. 그런데 내가 실제로 자네가 생각하는 만큼 근사한 사람이 아니라서
    미안한 심경이네.
    부인도 안녕하시지. 가내 평강과 행복, 보람을 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