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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딸과의 약속

2017. 8. 22. by 현강

                          I.

  1995년 12월 20일, 벌써 20년 저 너머의 오래된 얘기다. 그날 저녁을 먹고 서재에 앉았는데, SBS에서 교양 PD를 하는 딸애가 노크했다. 내 방을 찾은 일이 흔한 일이 아니기에 나는 그녀를 반겨 맞았다. 그랬더니 불쑥

  “아빠, 만약에, 정말 만약에 말이야, 아빠에게 장관을 하라고 하면 하실꺼야”라고 묻는 게 아닌가.

의외였다. 평소에 말 수가 많지 않고 그런 류의 대화를 나눠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아니, 결코 그런 일이 없겠지만,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걸, 뭐가 아쉬워서 이제 와서 장관을 하겠니”.

그랬더니, 딸애는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그럼 나하고 약속해. 절대 안 하신다고.”라고 다그쳤다.

나는 분명히 답했다.

  “물론, 그거야 어렵지 않지, 절대 안 할게.”

 

                               II.

  그런데 정말 세상일은 알 수가 없다. 그 이튿날,  오전 11시 개각 발표에 앞서 9시 40분경,  나는 김영삼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고, 20분 가까운 설왕설래 끝에 교육부장관직을 수락했다. 당시 나는 언론에 자주 정치평론을 썼으나, 실제 정치권과는 아무런 교류가 없었고 더구나 한 번도 장관직 하마평에 오른 적도 없었다. 그런 나에게 대통령이 개각 발표 직전에 장관직을 청했다는 것 자체가 아직도 이해가 안 되는 일이거니와 대통령이 강권한다고 그 청을 받아들인 나 자신도 분명 평소에 내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날 나는 일면식도 없었던 대통령으로부터 불쑥 전화를 받고 무척 당황해서 막무가내로 못하겠다는 말만 되풀이 했는데, 김영삼 대통령은 시간에 쫓기면서도 여유가 있었고 무척이나 집요했다. 마침내 그의 청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꽤나  참담한 심경이었다. 그 순간

  “지금 너는 일생일대에 실수를 하는 거야”라고 스스로를 모질게 힐책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전날 했던 ‘딸과의 약속’이 떠올랐다. 하루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큰 소리를 친 내가 부끄러웠다.  돌덩이를 품에 안은 듯 가슴이 먹먹했다.

 

  그날은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다. 여기저기서 전화가 끊이지 않았다. 축하보다는 걱정하는 소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가까운 이들 눈에도 천생 백면서생인 내게 장관직은 전혀 걸맞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오후에는 내 연구실에서 간단한 기자회견이 있었다. 저녁에는 김준엽 전 고대총장님이 베푸시는 망년 만찬이 있었다. 망설이다가 어른과의 약속이라 참석을 했다. 당시 연말이면 김 총장님께서 20명 쯤 가까운 사람들을 불러 저녁을 하셨는데, 참석하신 분 대부분이 내게는 선배들이셨다. 이구동성으로 “의외였다”는 말씀이셨고,  내가 느끼기에도 모두 걱정스런 눈빛이었다.

  그날, 하루 종일 바삐 움직이면서도 문득 문득 딸과의 약속이 뇌리를 스쳤다. 그 때마다, “그 애를 무슨 낯으로 보나” 하는 무척이나 불편한 심경이었다.

  밤, 조금 늦은 시간에 딸이 회사에서 돌아왔다. 딸애는 굳은 얼굴로 고개만 까딱하고 이층 제 방으로 올라갔다.

 

  다음날 이른 아침, 내가 잠에서 깼는데, 마루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나서 귀를 기울였다. 아내와 딸의 대화였다. 들어 보니,

  딸애는 “아빠가 그동안 언론에 민주화하자고 글도 많이 쓰고, 교수 서명에 앞장서고, 시민운동에도 관여했는데, 그게 모두 결국 이러자고 그런 것 아니야”라며 제 애비에 대해 강한 실망을 토로했고, 내 처는 “왜 그러니, 네 아빠는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지, 네 아빠는 평생 정치나 관직에는 추호의 뜻이 없던 사람이다. 그 근처에 가본 적도 없는 거 너도 잘 알잖니. 그러잖아도 힘들어 하는데, 너까지 이러면 어떡하니”라며 다독거리고 있었다. 난감했다.

  나는 선뜻 나가기가 민망해서, 일찍 출근하는 딸애가 직장에 갈 때까지 죄지은 사람처럼 안방에서 머뭇거렸다. 그 후에도, 딸애와의 냉전은 한 두 주(週) 계속 되었던 것 같다. 내겐 꽤나 마음이 무거운 시간이었다.

 

                                  III.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문득 생각이 나서 작년에 이미 나이가 50 턱밑에 닿은 딸애에게 물었다.

  “너 생각나지, 네가 20년 전에 장관 발표나기 전 날, 내방에 찾아와서 내게 ‘장관하면 안 된다’고 엄포 놓았던 거”

그러나 딸애는 의외에 답변을 했다.

  “그랬었나. 그날 내가 왜 그랬지. 아! 그런 것 같기는 하네”

내가 재차 물었다.

  “장관된 다음에는 네가 나를 꽤나 괴롭혔는데, 그건 또 왜 그랬니”

그에 대한 대답도 내 예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거야 아빠가 교수하는 게 더 좋아서 그랬겠지. 장관하고 아빠는 어울리지도 않고. 이것저것 걱정스러워서 그랬지.”

딸애는 마치 남에 얘기하듯 주워섬겼다.

 

아니, 이건 반전(反轉)이 아닌가.

 

  나는 생각했다. 세월 탓에 딸애의 결기와 감성이 무디어 져서 그런가. 그럴 수도 있겠지.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아. 아니면 그 때 그 애가 그리 심각하지 않게 말한 것을 내가 너무 무겁게 받아 들였던 것인가. 아니, 분명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생각 같아서는 “에끼, 애비 속을 그렇게 태우고 이제 와서 고작 한데는 소리가 그것이냐” 라고 한 마디 호되게 쏘아 붙이고 싶었지만, 그냥 꾹 눌러 참았다.

 

  돌이켜 보면, 당시 주변의 그런 걱정스런 눈빛과 언사(言辭)가 나를 더 긴장하게, 그리고 스스로를 바로 세우게 만들었고, 이 땅에서 장관직이 선망의 직책이 아니라, 얼마간 부끄러운 ‘혐오직’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었던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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