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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40년 만의 해후

2017. 12. 4. by 현강

  내가 30대 중후반 한창 때 (1976-1977년간), 연세대에서 대학신문 <연세춘추> 주간을 했다. 그런데 얼마 전 그 때 고락을 함께 했던 학생기자들 15명과 40년 만에 다시 만났다.

  <연세춘추>는 실로 엄혹했던 유신말기에 대학언론 중 가장 앞장서서 결기 있게 민주화를 외쳤고, 그 때문에 사찰, 배포중지 등 적지 않은 탄압과 고초를 겪었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같이 빼어난 학생들이 대학신문기자를 지망했고, 한, 두해 앞선 선배기자들이 그 중에서 글 잘 쓰고 당차고 기개 있는 새 기자들을 엄선해서 뽑았다. 주간인 나는 인선과정에 개입하지 않고, 그냥 추인만 했다. 그래야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그들은 시대의 양심으로, 또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로서 대학의 명예와 존엄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을 불살랐다. 무엇보다 그들의 순수와 열정이 돋보였다. 당시 나는 수많은 기관원들의 감시와 압박 속에서, 학생기자들을 보호하며 그들의 열망과 용기에 찬물을 끼얹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했다. 그러자니 하루하루가 무척이나 힘겹고 애타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그 어려웠던 시절, 당시에는 하루빨리 그 질곡에서 벗어나고 싶기만 했던, 그 절망과 좌절의 순간들이 늘 내게 가슴 뛰는 낭만으로 다가오니,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들과의 해후 전날부터 가슴이 설랬다.

 

  <교수-학생> 관계라기보다 <가족>과 <동지> 같았던 그들을 40년 만에 다시 만나니, 실로 감개가 무량했다. 곧 40년이라는 아득한 세월의 강을 뛰어 넘어 격의없는 담소를 나누며, 오랜만에 함께 많이 웃었다. 같이 늙어가다보니 모두가 이제 친구가 되어 있었다.

  20대 초 꽃 같던 여학생 기자들이 이제 환갑을 넘은 할머니가 되었고 머리에 이미 힌 서리가 앉았다. 정년을 몇 년 앞둔 몇몇 교수들을 제외하면, 대사, 고위관료, 국회의원, 언론인인 그들의 직함 앞에 전(前)자를 붙여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 중 한 명인 유명 가수 <알리> 아빠가 딸 때문에 인사를 많이 받았다.

 

마지막 사진은 40년 전 1977년 1월 <연세춘추> 설악산 수련회 때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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