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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에필로그

2018. 4. 16. by 현강

당초 3월로 예정했던 <복지국가와 사회복지정책>(다산출판사)의 출간이 다소 늦어지고 있다.  5월에나 나올 것 같다.  그간 내용을 좀 더 다듬고, 책 말미에 <에필로그>를 덧붙였다. <에필로그>에는 이 책이 쓰게 된 의도와 한국 복지국가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간략히 서술했다. 아래에 <에필로그>를 담는다.

 

 

                                       에필로그

 

 

                                     I.

복지국가의 등장으로 서구사회의 시민들은 이미 성취한 공민권(civil rights)과 정치권(political rights)에 이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권(social rights)을 보장받게 된다. 그러나 복지국가로의 도정은 어느 나라에서나 그리 평탄한 길이 아니었다. 복지국가의 역사는 나라마다 그 나라 특유의 역사문화적 유산과 사회경제적 형편, 그리고 정치제도적 틀 속에서 어렵사리 한 걸음씩 보다 인간다운 사회를 지향하며 가시밭길을 헤쳐 온 결과이다. 아직 불완전하지만 시나브로 복지국가는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현대 복지국가는 한결같이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경제적 역동성과 사회적 결속을 함께 이루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념적으로 따지자면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혁명적 체제변화를 추구하기보다 점진적, 합의적 개혁을 통하여 시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 과도한 사회적 불평등을 줄이는 데 역점을 둔다. 성공적 복지국가들은 하나같이 이념적 편향이나 교조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이상을 추구하되 차디찬 현실과 마주하며 민생정치의 관점에서 합의적, 실용주의적으로 문제에 접근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현대 복지국가의 대명사인 스웨덴의 대표적 사민당 이론가인 비그포로스는 복지국가의 길을 잠정적 유토피아를 향하여 작업가설(working hypothesis)을 세우고 이를 실천ㆍ검증하는 작업이라고 명명했다. 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도 한국이라는 시()와 공()을 바탕으로 우리의 문제해결을 위해 냉철하게 현실을 분석하고 상황에 맞는 작업가설을 세우고 이를 효율적으로 실천ㆍ검증하며 깊은 성찰 속에 우리의 유토피아를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따라서 교조적 유토피아에 집착하거나 서구 선진국가의 복지국가의 시스템이나 정책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삼가야 할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형편은 어떠한가. 복지국가나 사회복지정책이 쟁점으로 부상하면 으레 이념적으로 편이 갈리어 결렬한 대결적 양상을 연출하기가 일쑤이다. 그런 과정에서 정제되지 못한 이데올로기를 앞 세워, 이슈를 시장 대 반()시장의 관점으로 환원하거나 심지어는 체제유지 대 체제변혁의 문제로 비화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이념적 양극화 현상은 한국형 복지국가를 보다 합리적, 사회합의적으로 모색하는 데 결정적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 사회복지정책에서 규범적 고려는 필요하나 그것은 기능적 필요와 경제사회적 여건과 연계되어 논의되어야 한다. 이 책은 복지국가 담론을 좌, 우의 설익은 교조주의에서 해방시켜 논의의 기본적 축을 실용주의적 접근과 정책분석의 차원으로 옮겨 보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 책을 집필한 네 명의 필자는 아래의 논점에 대해 관점을 같이 한다.

 

1) 사회복지는 국가, 시장, 가족, 비영리조직 등 다양한 복지제공주체들이 수행하는 복지활동의 총합이다. 국가가 국민 전체의 복지증진을 위해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으나, 복지혼합(welfare mix)의 관점에서 개별 주체 간의 적절한 역할분담에 대한 합리적 논의가 중요하다.

 

2) 사회복지정책은 경제정책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사회투자적 관점에서 사회복지정책을 합리적으로 설계하면 경제발전과 고용성장에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 경제정책과 사회복지정책의 선순환이 가능함으로 경제와 사회의 통합적 인식이 필요하다.

 

3) 사회복지정책은 실용주의와 점진개혁에 중심축을 두고 정책혼합(policy mix)을 구성해야 한다. 보편주의 대 선별주의, 공공부문 대 민간부문, 평등 대 효율 간의 날 세운 이념적 논박보다는 개별 정책영역과 전체적 복지지형을 고려하여 실용적이고 지속가능한 사회복지 정책수단을 찾아가야 한다.

 

4) 한국 복지국가는 발전의 역사가 짧고 아직 내용도 미흡하며, 제도적 기반도 정치적 지지도 취약하다. 그런 가운데 나날이 늘고 있는 사회적 위험과 복지수요에 대응하여 복지국가로의 도정은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그것이 이념이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추구되어서는 안 되며, 현실의 증거에 기반한 열린 토론과 합리적인 정책분석, 그리고 사회적 합의를 거쳐야 한다.

 

                                       II.

 

한국사회는 이제 1인당 국민소득 3만불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총체적 경제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성장의 뒤안길에는 짙은 그늘이 길게 깔려있다. 우선 해마다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있으며 안정적 중산층의 비율이 줄어들고 있다. 이와 더불어 사회적 이동성의 저하로 사회계층구조가 고착화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러한 경제적 양극화와 사회적 이동성 저하는 우리사회의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사회적 활력을 낮춰 한국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저해가 될 뿐만 아니라, 이 나라 국민으로서의 자부심과 행복지수를 크게 떨어뜨린다. 아마도 거시적, 종합적 정책개혁 없이는 이러한 부정적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선 복지국가와 사회복지정책의 차원에서 우리가 크게 고려할 사항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사회는 가속화되는 고령화와 지식사회로의 전이 속에서 신ㆍ구 사회적 위험 모두에 맞서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속적 고용(sustainable employment)을 유지하는 가운데 국민 복지를 증진하기 위해서는 유연안정성(flexicurity)'과 평생학습의 개념을 슬기롭게 적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결합이 필수적이며, 아울러 견고한 사회보장체제가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해 줄 필요가 있다. 이와 더불어 생애주기에 걸친 평생학습체제의 구축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하지만 이들 모든 정책분야에서 본질적 개혁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 중 사회보장체제, 특히 소득보장 분야만 하더라도 빈틈이 많고 소득대체율이 너무 낮다. 기초보장제도의 사각지대가 광범하게 존재할 뿐만 아니라, 쌍용차 사태 등에서 보듯이 중산층 근로자들조차도 실업과 노령으로 인한 소득상실의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따라서 우선 기초보장 사각지대의 해소와 중산층도 의지할 수 있는 탄탄한 소득보장제도를 확립하는 가운데 노동시장의 유연화 조치와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결합해 나가야 한다.

 

둘째, 우리 사회의 가속화되는 소득격차와 사회적 이동성의 저하를 막아야 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능력과 성과에 따른 보상과 이에 따른 시장의 불평등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차이 때문에 타고난 능력을 계발하지 못하고 계층의 사다리를 올라가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부정의하고 지속적 성장을 이룰 수 없다. 따라서 국가는 소득보장의 강화와 더불어 시민들이 변화하는 노동시장의 수요에 부응할 수 있게 성인기 평생교육과 훈련을 제공해 지속적 고용을 위한 직업능력 배양에 힘써야 한다. 인지능력이 형성되고 자아와 성취동기가 발달하는 유아와 초등학교 시기도 매우 중요하다. 특히 저소득계층과 낙후지역의 아동들도 중산층이 누리는 교육기회를 공적으로 제공받을 수 있게 해 출발선의 평준화를 이루어야 한다. 공보육과 공교육의 역할 강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다.

 

셋째, 사회보장제도의 지속가능성과 효율성 제고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친복지 진영에서는 보장율만 높이려하고, 재정적 지속가능성과 효율성에 대한 강조는 우파적 시각 혹은 시장논리로 여기고 터부시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회보장제도의 보장율을 높이게 되면, 이에 부응하는 재원을 확보해야 한다. 퇴직()금 시장으로 흘러들어가는 복지자원을 국민연금의 보장성강화를 위한 재원으로 활용하고, 정치적 부담이 있더라도 사회보험료 인상 등 증세에 대한 국민적 동의를 구하는 노력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재정적 지속가능성을 확보해야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얻고 미래 세대의 부담도 덜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복지증세를 하더라도 예산 제약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따라서 동일 재원으로 최대의 사회복지 효과를 보도록 사회보장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특히, 사회복지서비스 전달체계의 비효율성을 최소화하고 지역사회의 특성에 맞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분권화 및 경쟁방식 도입, 민관협력, 복지수급자의 선택권 확대 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와 함께 지역주민에 대한 책임성을 확보하기 위해 주민참여 및 사회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기관에 대한 내실 있는 관리감독도 필요하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안정된 재정적 기반위에 양질의 서비스가 제공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복지국가의 물질적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 경제의 활력과 혁신을 도모해야 한다. 경제와 복지를 상충관계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경제발전이 복지국가 발전의 충분조건은 아닐지라도, 가장 중요한 필요조건이다. 경제발전 없이는 고용도 복지를 위한 재원확보도 어렵다. 시대에 뒤떨어진 규제를 없애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 혁신과 창업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 혁신은 경쟁과 창조적 파괴를 의미한다. 앞서 지적했듯이, 구조조정의 낙오자들에 대한 소득보장과 전직 훈련이 충분하게 공적으로 주어져야 할 것이다. 복지와 경제의 선순환은 혁신과 사회적 안전망의 결합 속에 꽃을 피울 것이다.

 

한국복지국가는 발전의 기로에 서 있다. 이제 복지를 좌우의 문제도 이념의 문제도 아닌, 우리사회의 시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유용한 수단의 하나로 바라보자. 작업가설을 세우고, 현실의 증거에 기반해 한국형 유토피아를 만들어 가자. 이 책이 유용한 작업가설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마지 않는다.

 

20184

 

안병영, 정무권, 신동면, 양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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