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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혜화동 연가(戀歌) (1)

2018. 10. 27. by 현강

                           I.

지난 6월 초여름 햇살이 유난히 따가웠던 날이었다. 병원약속이 있어 오랜만에 서울에 갔다. 그런데 예상보다 일이 일찍 끝나 다음 약속까지 두 시간이 비었다. 서울에 갈 때면 으레 그곳에 머무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스케줄을 촘촘히 짜는 데 그날은 예상치 않게 시간 여유가 생긴 것이다. 두 시간 동안 무엇들 할까 곰곰이 생각하며 병원 문 앞을 나오는데, 문득 섬광처럼 혜화동이 떠 올랐다. 순간 나는 옳지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아무 망설임 없이 택시를 잡았다. 혜화동은 내 어린 시절과 20대 중반까지의 청년기에 많은 추억과 낭만이 깃들어 있는, 마치 옛사랑의 그림자와 같은 곳이다.

 

혜화동으로 가는 동안 오늘은 잊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네. 내일이면 멀리 떠나간다고..’ TV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배경음악으로 인기를 끌었던 리메이크 된 노래 혜화동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운 옛친구들의 얼굴과 그들과 어울리던 혜화동 골목길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지막으로 혜화동을 스치듯 지나간 것도 10여 년 전이니, 그곳을 잊고 살았던 기간이 너무 길었다. 그런데 여유시간이 두 시간이니 택시로 오가는 시간을 빼면 막상 그곳을 둘러 볼 시간은 고작 1시간 남짓이다. 마음이 급했다. 나는 택시 운전사에게 명륜동 성대 입구에서 내려 달라고 청했다.

 

                          II.

나는 돈암동에서 태어나서 20대 중반까지 그곳에 살았지만, 바로 동소문 고개 너머의 혜화동/명륜동과 인연이 무척 깊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혜화동은 대체로 혜화동과 명륜동의 통칭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혜화동 성당을 다녔고, 그 부속 혜화유치원 출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내 어린 시절의 많은 추억과 사연들이 혜화동성당과 이어진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거치는 동안에도 많은 친구들이 혜화동에 살아 그들과 그곳에서 어울리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내 유년기, 사춘기, 청년기의 추억과 낭만, 희비애환의 큰 부분이 혜화동 일대와 깊이 얽혀있다. 그래서 빛바랜 사진 같은 1950, 60년대 혜화동의 풍경을 머리에 떠올리면, 곧장 내 내면에서 아련한 그리움과 설레임, 그리고 애잔한 서정(抒情)일렁인다.

 

혜화동, 명륜동 일대는 원래 조선시대 성균관에 물자를 대는 상업의 공간이었으나, 1920년대 이후 조선인 중산층, 지식인의 새로운 주거공간으로 급부상,  격조와 세련미를 갖춘 서울의 대표적인 중산층 동네로 발전했다. 이후 그곳은 전통과 현대가 사이좋게 공생하면서 특유의 그윽한 지적, 문화적 향기를 풍겼다. 1950, 60년대를 돌아보면, 그곳에 특히 문화, 예술계 인사들이 많이 살았다. 마해송, 장욱진, 조병화, 한무숙, 장발이대원 등 당대의 기라성같은 문인, 예술가들이 일찍부터 거기에 둥지를 틀었다. 인근의 성북동에도 김광섭, 김기창, 조지훈, 최순우, 김환기, 윤효중 등이 살았고, 한용운의 심우장, 전형필의 간송미술관, 이태준고가도 바로 거기에 있다. 가히 혜화동-성북동 문화벨트라 칭해 전혀 손색이 없지 않은가. 그리  넓지 않은 지역에 이처럼 한국의 대표적 문화계 인사들이 모여 살았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정말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이 밖에 유홍열, 이해남, 이가원 등 유명 교수들, 그리고 장면, 오위영김상협, 나용균, 홍종인, 오재경, 조영식 등 정치인, 언론인, 교육가들도 여기에 살았다. 재계, 금융계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우리 세대 중에는 이수성 전총리, 이인호 전 러시아 대사, 정근모 전 과기처 장관, 마종기 시인 등이 그 당시 혜화동, 명륜동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던 내 몇 살 위 선배들이다.

 

많은 시인, 음악가들이 혜화동을 시제와 악상의 주제로 삼았다. 혜화동에 오래 살았던 조병화는 이곳을 나의 터미널이라 명명했고, 역시 그곳 출신인 강은교는 황혼이 유난히 아름다운 곳으로 추억했다. 그런가 하면 피아노맨(김세정)참 눈이 부셨어 혜화동 거리에서 너를 본 날을 노래했다.

 

혜화동에 가까워지면서 내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곳 저곳 골목에서 옛친구들이 장난기 서린 웃음 띤 얼굴로 뛰쳐나오면서, 당장 내 이름을 부를 것 같은 환상에 젖는다. 그 중에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친구들이 적지 않았다.

 

                             III.

명륜동 큰길가에서 택시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성균관대학교 쪽으로 접어들었다. 주위가 크게 달라졌지만 양쪽에 상가들이 즐비한 것은 예전이나 다를 바 없었다. 성균관대학교가 크게 변해 있었다. 정문은 없어지고 학교 앞이 크게 트였다. 옛것을 지키면서 세계화에 발맞춰 개방체제를 지향한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듯 했다. 한번 기웃거리면서 학교의 변한 모습도 살펴보고, 명륜당의 그윽한 정취도 맛보고 싶었다. 그러나 꾹 참고 그냥 지나쳤다. 거기서 혜화동으로 넘어가는 윗길은 제법 멀어 시간이 한참 걸렸다. 내 기억 속에 옛날에는 이곳에 너른 앵두밭이 있었는데, 상전벽해(桑田碧海), 이제 모두 사라졌고, 새로 조성된 복잡한 주택가 속에 내 추억의 실마리를 더듬을 수 있는 곳은 별로 없었다.

 

옛 보성중고등학교도 자취를 감췄다. 눈에 선한 너른 운동장과 붉은 벽돌건물 대신 거기에는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이라는 생소한 건물과 과학고등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명문사학으로 혜화동 깊숙이 터줏대감처럼 자리했던 보성학교가 없어졌다는 게 마음을 허전하게 만들었다. 다만 그 건너에  경신학교는 아직 건재한 듯 해서 작은 위안이 되었다.

혜화초등학교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무척 반가웠다. 혜화초등학교는 왕년에 혜화동, 명륜동은 물론 성북동, 돈암동 일대를 통틀어 최고의 명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할 때, 기대했던 혜화가 아닌 창경초등학교로 배정되자 우리 부모님이 무척이나 안타까워하시던 기억이 새롭다. 19509.28 수복 후에 나는 결국 부모님의 성화로 결국 혜화초등학교로 전학을 했으나, 1.4 후퇴 때 다시 피난을 가게 되는 바람에 실제로 한 두 달 혜화에 다녔던 것 같다. 이렇게 혜화초등학교와의 인연은 짧았지만, 고모, 누나, 그리고 대부분의 성당친구들이 다 그곳을 다녀 혜화 얘기는 늘 귀에 달고 다녔다. 지금도 생각나는 얘기가 혜화가 소풍을 가려면 꼭 비가 온다는 속설이다. 혜화초등학교 주변에는 골목마다 많은 중. 고등학교 친구들이 살았고, 내 처도 혜화 뒷담 근처에 살았다. 20년전 쯤인가, 내 처와 함께 그녀의 옛집을 찾았더니 놀랍게도 고풍스러운 기와집 한옥이 거의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놀랍고 반가웠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골목길을 따라 잠시 그 집을 다시 찾아볼까 생각했으나 곧 포기했다. 시간도 없었거니와 그 보다는 십중 팔구 이미 자취를 감췄거나 크게 바뀌었을 오늘의 그 집 모습을 보고 내 스스로 실망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주마간산식으로 스쳐 가는데 한, 두 군데 전시장과 공연장의 모습도 보였다. 작은 박물관도 있었다. 혜화동, 명륜동 특유의 예술과 문화의 향기가 전승되는 듯 느껴져서 반가웠다. 이 일대는 지난 반세기 동안 크게 변했다. 그러나 신식건물 사이에 비록 개조된 모습이지만 아직 기와지붕의 옛 한옥들이 제법 많이 남아있고, 곳곳에 골목길들이 살아있어 크게 낯설지 않았고, 여기저기서 반세기 저 너머의 옛 풍정을 아련히 되새길 수 있었다. 골목으로 접어들수록 한옥도 많이 남아있고, 혜화동 고유의 특성과 정취가 더 진하게 우러날 게 분명한데, 시간에 쫓겨 그럴 수 없는 게 못내 아쉽고 안타까웠다. 몇 발자국만 더 가면 진짜배기 속살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을 외면하고 큰 길가 겉껍데기 파사드(facade)만 스쳐보니 크게 잘못된 게 분명했다. 그래서 혼자 다짐했다. 다음에는 꼭 충분한 시간을 갖고 여유있게 다시 찾아와야지. 그 때는 옛 추억을 공유하는 혜화동 친구 한, 두명을 불러 함께 오면 더 좋겠지. 아니면 내 처와 함께.

 

혜화초등학교에서 로타리 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뒤에 복개한 개천 옆에 국무총리를 역임한 장면박사(1899-1966)의 집이 있었다. 겉모습이 옛 그대로였다. 문이 조금 열려있어 다가가 보니 <장면 가옥>이라는 팻말과 함께 문화재로 등록되어 집안이 시민들에게 공개되어 있었다. 아무리 바빠도 이곳을 지나칠 수 없어 집안으로 발을 옮겼다.

 

운석(雲石) 장면(1899-1966) 박사는 이 집이  1937년에 건립된 이래 쭉 여기 살았다. 교육자, 종교인, 외교관, 정치가로 일세를 풍미했던 그는 현대 한국정치사에서 매우 드물게 깨끗하고, 청렴한 정치인으로 대한민국 건국에 공로가 컸고, 특히 초대 주미대사로 한국전쟁 발발 직후, 유엔군의 참전을 이끄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불행히도 5.16 구테타로 물러나는 바람에 역사적으로 저평가되었으나, 그는 한줄기 청신한 빛처럼 한국민주주의 역사에서 잊지 못할 정치인이다.

장면가옥은 그리 크지 않은 규모로 아담한 느낌을 주었다. 한식, 일식, 서양식이 혼합된 주거양식이어서 마치 한국의 근. 현대사를 집약해 놓은 것 같았다. 옛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 안채와 사랑채를 둘러보니 한 올의 사치나 허식(虛飾)이 없이 정갈하고 단정했다. 마치 생전의 장면박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장면가옥에서 조금 더 내려오니 왼편에 국내 최초의 한옥 동주민센터인 혜화동주민센터가 있었다. 겉모습으로도 한옥의 멋과 품격, 그리고 정겨움이 풍겨 보기 좋았다. 이곳도 한번 기웃거리고 싶었으나, 시계를 보니 혜화동 일대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포기했다. 그리고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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