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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천하에 아까운 사람, 고(故)김광조 박사

2018. 8. 20. by 현강

 * 작년 이맘때 급서(急逝)한 고 김광조 박사의 서거 1주기 추도모임이 8월 11일 유네스코아시아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에서 있었다. 김 박사는 1955년 경주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하버드대학교에서 교육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0-2008 년간 교육부에 근무했다. 마지막 직책이 교육인적자원부 차관보였다. 이어 그는 2009-2017 년간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지연본부 본부장을 지냈다. 아래 글을 그날 내가 한 추도사다.  


          천하에 아까운 사람, 고(故)김광조 박사


우리 모두가 진정으로 좋아하고, 사랑하며, 또 내심 존경하는 김광조 박사가 우리 곁을 떠난 지 오늘로 만 1년이 되었습니다. 한 해가 지났지만  김광조라는 귀중한 인재를 잃은 충격과 상실감은 여전하고 가슴 시린 안타까움과 그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은 오히려 더 사무치는 느낌입니다.


돌이켜 볼 때, 김광조 박사는 능력과 인품 모두에 있어 탁월한 인재였습니다. 그는 교육부, 월드뱅크, 그리고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본부에서 일하는 동안 어디서나 누구도 감히 따를 수 없는 치밀한 기획력과 강한 추진력, 그리고 창의성으로 큰 족적은 남겼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일에 대한 열정과 헌신은 가히 전설적이었습니다. 

교육부에서 그는 <5.31 교육개혁>의 창안 및 집행과정에서 발굴의 능력을 과시하였고, 교원정책, 고등교육, 직업교육, 평생교육, 그리고 인적자원개발정책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주지하듯이 그는 2006년 <글로벌 인재포럼>의 창설주역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월드뱅크에서  Senior Education Specialist로 일하면서, 중국, 중남미, 인도양, 아라비아 반도에 이르기 까지 세계 곳곳을 누비며 소외지역의 교육발전을 위해 크게 공헌을 하였습니다. 월드뱅크로부터 최상의 평가를 받은 것은 물론입니다. 그런가 하면 유네스코 아태지역본부장이라는 막중한 직책을 수행하는 동안 유네스코 정신을 선양하고 낙후된 지역의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전승, 보존하는 데 앞장을 섰습니다. 그는 몸소 아태지역의 후미진 오지 곳곳을 돌며 현장에서 해답을 찾는 에너지 넘치는 현장답사형 지도자였습니다. 김광조 박사는 이렇듯 해외에서 견문을 넓히고 업적을 쌓으면서 걸출한 세계인으로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우리는 동아일보가 언젠가 그를 <10년 후 세계를 빛낼 100인>의 한 명으로  선정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광조 박사는 능력뿐만 아니라 인품과 인간성에 있어서도 남다른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아랫사람, 동료들, 그리고 윗사람 모두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매우 드문 유형의 인재였습니다. 누구나 그와 더불어 일하고 싶어하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늘 밝게 미소짓는 얼굴과 적절히 깃들인 유머로 그는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서로 어울려 한마음으로 일하도록 고무. 격려 했습니다. 저는 그와 일하는 동안, 한 번도 그의 어둡고 그늘진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지식인 특유의 오만이나 냉소주의도 그에게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풍부한 인간성은 특히 조직이 어렵고 힘들 때, 위기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그가 떠난 후 태국의 유수한 신문인 <Bankok Post>에 실린 김 박사를 기리는 장문의 Special Report에 따르면, 그가 본부장으로 일할 때 한 동안 아태본부는 최악의 재정위기에 허덕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 박사 특유의 포용적 리더십과 열정으로 그 절체절명의 위기를 비교적 단기에 극복했다고 전합니다.


그는 무엇보다 겸손한 인간이었습니다. 하버드에서 박사를 하고 교육부의 고위직을 두루 거쳤지만, 그는 언제, 누구에게나 겸손하고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언필칭 ‘촌놈’이라고 부르기를 즐겨했습니다. 저는 그의 이러한 풍부한 인간성이 그가 이룬 그 많은 업적의 바탕이자 인격적 바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점이 우리가 그에게서 배워야 할 큰 덕목이라고 믿습니다.


그런가 하면 김광조 박사는 예술과 문화에 남다른 감각과 조예, 그리고 능력을 갖췄습니다. 그의 방패연 만들기는 가히 장인 수준이고, 대금과 더불어 뒤늦게 배운 클래식 기타 또한 많은 이들 앞에서 독주 공연하는 실력이었습니다. 저는 그가 늘 자랑하던 자신의 고향, 바로 한국의 문화수도인 ‘경주의 아들’ , ‘혜초의 후예’ 답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듯 리더십, 능력과 인품을 고루 갖춘 세계인, 문화인 김광조 박사는 모든 맥락에서 비단 교육부를 넘어, 한국 공무원의 귀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런 고루 갖춘 빼어난 재목을, 이 아름다운 보석을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김광조 박사가 유네스코 아태본부장을 마치게 되자, 그를 아는 모든 이가 이제 그의 성숙한 리더십과 열정적, 창조적 에너지가 나라를 위해 더 큰 빛을 발할 것이라는 데 누구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의 급서에 우리 모두가 말을 잃고 하늘의 무심함에 가슴을 쳤습니다. 


김광조 박사를 추억하면서 저는 잠시 그의 철학과 정신세계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교육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평생 교육에 헌신하면서 인류의 미래는 교육에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는 특히 소외지역, 그늘진 변방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고, 그러기에 그 아이들에게  보다 밝은 미래를 선사하는 데 온갖 정성과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교육복지의 모범적 실천자였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그의 월드뱅크와 유네스코 아태지역본부에서의 경력과 산 체험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어디서 태어나고 어떤 상황에 처해도 ‘양질의 교육’ a quality education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그의 신념을 자주 피력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들 아이들이 더 낳은 미래를 만들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역설했습니다.

김광조 박사는 특히 행복과 평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그것을 선양하는데 놀라운 열정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모든 이가 배움과 삶의 과정에서 행복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행복의 원천은 바로 가정이라는 점을 자주 설파했습니다. 이는 사랑하는 아내, 두 아들과 더불어 더 없이 모범적인 가정을 꾸며 온 그의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생각합니다.


김광조 박사는 특히 말년에 평화에 몰두하면서 평화의 전도사로 자처하며, 자신을 평화에 봉헌할 뜻을 자주 피력했습니다. 그의 큰 비전은 ‘보다 지속가능하고, 평화롭고, 형평에 걸 맞는 세상’ a more sustainable, peaceful and equitable world'를 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회 있을 때 마다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그의 음악적 자질을 살려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그의 평화의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우리가 진정 평화를 원한다면 교육을 통하여 평화의 씨앗을 모든 이의 마음에 심어야 한다”는 게 그 요지였습니다. <교육을 통한 평화>, 그것이 그가 모든 열정을 다해 추구하였던 자신의 미래 역할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이 유언과 같은 메시지를 특히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Bangkok Post는 그를 가르켜 ‘A True Champion of Education and Peace'라고 명명했습니다.


저는 김광조 박사와 남다른 인연이 있습니다. 1970년대 중반 당시 투옥된 이문영 교수님을 대신해서 고려대학교 행정학과에 강의를 나갔는데, 그 때 74학번인 김 박사를 직접 가르쳤습니다. 이런 연분 때문에 제가 교육부에 있을 때나, 나온 후에도 비교적 격의 없이 그와 사적인 대화를 자주 나눴습니다. 

그런데 바로 작년 5월 말, 그가 아태지역본부장 퇴임을 앞두고 잠시 귀국했을 때,  김영철 당시 강원도 부교육감과 함께 강원도 고성으로 저희 집을 찾아 왔습니다.  5월의 꽃향기 아래 화사한 봄날이었습니다. 그는 무척 건강해 보였고, 귀국을 앞두고 조금 들떠있었습니다. 그 때 김 박사는 저와 함께 제 농사터를 돌면서 한창 익어 가는 체리와 오디, 보리수를 따서 입에 넣으며 자신의 농사지식을 펼쳐 보였습니다. 그런데 10년 농사꾼인 저 보다 아는 게 훨씬 많았습니다. 저는 깜짝 놀라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선생님, 제가 원래 ‘촌놈’ 출신이 아닙니까”라고 대답해서 함께 크게 웃었습니다. 그 때도 그의 관심은 온통 평화였습니다. 그러면서, “완전 귀국하면 제가 클래식 기타를 들고 와서 평화를 연주하겠습니다. 아마 제 기대 이상의 실력에 놀라실 것입니다”라며, 내게 오기 전날 손수 만든 새 방패연 두 개를 선사했습니다. 그 때 받은 방패연은 그가 본부장으로 떠나기 며칠 전 만들어 주었던 두 개의 다른 방패연과 함께 제 거실에서 매일 저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 연들을 볼 때 마다 저는 자랑스러운 내 제자 김광조와 만난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사람, 겉과 속이 모두 아름다운 사람, 그리고 천하에 아까운 사람, 김광조는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날이 갈수록 더 선명한 모습으로, 더 사무치게 그리운 얼굴로 우리를 찾아와 새벽처럼 우리의 영혼을 깨우며,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교육을 통한 평화’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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