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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학점 인프레' 유감

2017. 6. 26. by 현강

                            I.

 한 10년 전 얘기다. 가까운 제자 교수가 내게 대학에서 정년퇴임을 하게 돼서 좋은 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대뜸, “우선 시험성적 매기지 않게 돼서 그 점이 제일 좋은데“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채점한다는 일이 워낙 쉽지 않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게 점점 더 어려워지더군. 그래서 학기말이 되면, 채점할 일이 나를 꽤나 옥죄였네. 그래서 종강하고 시험이 끝나도 성적 제출하기 까지는 실제로 내게 방학이 방학이 아니었지“라고 답했다.

 

 채점은 평가행위의 일종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늘 다른 사람과 주위의 사물, 혹은 정황을 평가하고 그에 따라 대응한다. 그런데 실제로 공정한 평가는 그리 쉽지 않다. 때로는 정보의 부족이나 선입관, 편견 때문에, 혹은 이해타산이나 대세에 눌려 그릇된 평가를 할 때가 적지 않다. 그런데 자신의 오판(誤判) 때문에 자신이 손해를 보게 되면 그건 스스로가 책임질 일이니 어쩔 수 없으나, 채점의 경우는 그 결과가 타자인 학생에게 미치게 되니 이는 예사 일이 아니다. 더욱이 날이 갈수록 학교 성적이 학생들의 취업이나 유학 등에서 주요한 요소로 간주되므로 자칫 잘못된 채점은 당사자에 진로와 생애과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어 채점할 때는 실로 신중에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때문에 나는 40년 가까운 교수생활을 하면서 채점하는 일을 무척이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성적 매길 때, 학생과의 친소(親疏)나 인간관계의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꽤나 신경을 썼다. 그래서 언제나 이름이 가리도록 시험답안지를 철(綴)한 후 채점을 했고, 아무리 수강생이 많아도 채점과정에서 조교나 어느 누구의 도움도 빌리지 않았다. 주위가 정돈된 분위기에서, 가능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채점에 임했고, 평가기준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 가능한 한 채점 도중 자리를 뜨지 않았다. 또 필수적으로 재검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을 해도 부족한 인간의 평가 행위인지라 채점 후 언제나 일말의 회의가 남아있었고 마음이 명경(明鏡)처럼 맑고 편치 못했다. 그래서 채점은 교수가 짊어져야 할 숙명적인 멍에처럼 느낄 때가 많았다.

 

 채점할 때 적정수준의 변별력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수준 차이를 가려서 비교적 엄격하게 점수를 매겼다. 그러다보니 내게 좋은 성적을 받은 학생들은 꽤 자부심을 느꼈던 것 같다. 졸업 후 수 십년 후에 만난 어떤 제자는 ‘그 때 선생님 과목 둘 모두 A 학점을 받아, 친구들이 무척 부러워했습니다“ 라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러가 하면, 다른 제자는 ”성적이 잘 안 나와 재수강을 했는데도 점수가 덜 좋았습니다. 가차 없으시더군요“라고 섭섭했던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내 경우, 엄정한 채점에 집착하다보니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 자제, 혹은 평소에 친근했던 학생들이 좋지 않은 점수를 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 때문에 나를 믿고 내가 속한 학과에 아들을 보냈던 무척 가까운 친구와 관계가 소원해 지기도 했다. 마음이 아팠지만 구구한 변명은 하지 않았다. 공정한 채점은 교수의 자존심이자, 그가 윤리적으로 지켜야 할 마지노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II.

 내가 대학을 다녔던 1950년대 말, 60년대 초에는 대학생들이 점수에 크게 집착하지 않았던 기억이다. 그래서 공부바탕이 뛰어난 친구들 중에도 학점이 형편없던 친구가 많았고 더러는 그것을 마치 훈장처럼 드러내 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교수들도 채점에 크게 고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조교에게 채점을 맡기는 풍조가 만연돼 있었고, 수강생이 많으면 교수가 선풍기를 돌려 시험답안지기 나르는 방향에 따라 점수를 매긴다는 우스개가 이미 그 때에도 회자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학점이 취업이나 진학에서 주요한 몫을 하게 되면서 학생들이 학점에 집착하게 되었고, 교수들도 이에 배전의 신경을 쓰게 되었다. 그러면서 학점 ‘관대화’ 경향이 점차 심화되었다. 돌이켜 보면, 이미 30년 전에도 수강생 대부분에게 A학점을 주어 ‘A 폭격기’라는 별칭을 듣는 교수가 있었던 기억이다. 그러나 이른바 ‘학점 인프레’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부상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 아닌가 한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학점 인프레 현상은 우리 대학사회에서 이미 보편화된 것 같다. 서울 시내 대부분 대학들에서 졸업성적 평균 A학점 이상 취득 졸업생이 반을 넘어서고 있고, 심한 경우는 70%에 이른다고 한다. 이른바 SKY 대학의 경우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라니 딱한 일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외국의 세계적 명문대학의 경우도 유사한 학점 인프레 때문에 골치를 앓는다는 것이다. 도대체 학생 반 이상에게 최고 평점을 준다면, 엘리트 교육의 산실이라는 대학에서 학점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학점 인프레 현상은 대학 스스로 자신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행위이다. 열심히 공부한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 간 차이가 없어진다면 그건 정의로운 일이 아닐뿐더러, 절차탁마(切磋琢磨) 해야 할 학생들의 학력신장에 악영향을 미친다. 또 양질의 강의를 멀리하고 쉽게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는 강의로 학생들이 몰리면 대학의 교육과정이 근본적으로 왜곡된다. 그런가 하면 학점 인프레는 대학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떨어뜨려 종국에는 취업 및 진학 시장에서 학점이 평가요소에서 배제되거나 저평가되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 이 모든 것을 감안할 때, 교수가 후한 점수를 남발하면, 대학 존재의 의미 자체를 위협할 수 있다.

 

                                          III.

 최근 대학들은 상대평가의 강화와 재수강 횟수 제한 등 다양한 제도적 수단을 통하여 학점 인프레를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제도개선에 앞서 공정한 학점 매기기는 교수 윤리의 가장 주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과도한 학점 인프레는 교수가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방기(放棄)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교수가 자신의 직분을 바르고 책임 있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좋은 강의와 더불어 필히 엄정한 평가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교수는 어디 아무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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