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단상

두 교장 선생님 이야기

2017. 3. 10. by 현강

                                   I.

1957년 3월 이맘 쯤, 내가 막 경기고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 새 봄을 맞았던 때였다. 학교가 웅성웅성하더니 이내 우리 학교의 조재호 교장선생님과 서울고등학교의 김원규 교장선생님이 서로 자리를 맞바꾸게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모두가 반신반의하면서, 하나 같이 “말도 안 돼”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당시 경기고와 서울고는 서로 자웅을 다투는 천하의 맞수였고, 양교의 두 교장 선생님들 역시 중등교육계에 거목으로 서로 다른 교육철학과 리더십에 따라 학교를 키우고 있었다. 특히 서울고의 김 교장선생님은 스파르타식 엘리트 교육으로 서울고를 급성장시켜 경기고의 입지를 크게 위협하던 분이기에, 우리의 입장에서는 라이벌 학교의 수장을 교장으로 모시게 된다는 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더욱이 근엄한 어버지 이미지로 전교생의 존경을 받던 조재호 교장 선생님이 우리 곁을 떠나신다니 그 점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어떤 학생은 대놓고, “아니 서울고에 목숨을 바치셨다는 분이 왜 이리로 와. 거기서 묻히셔야지”라며 목청을 높였던 기억이다. 그러면서도 많은 학생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김 교장 선생님에 대한 인간적 호기심과 그의 역동적, 쇄신적 리더십에 대한 얼마간의 기대가 일렁이고 있었다.

 

결국 며칠 뒤 어느 따스한 봄 날, 두 교장선생님이 상호 교체되는 흔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장안의 화제였음도 물론이다. 그 날 경기고 학생들은 화동언덕에서 경복궁 돌담 쪽에, 그리고 서울고 학생들은 신문로에서 광화문 쪽에 도열하여 서로 떠나가시는 교장선생님을 배웅하고, 새로 오시는 분을 마중했던 기억이다. 나는 꽤나 착잡한 심경이었다.

 

당시 교장 선생님은 으레 아침 조회에서 훈화를 통해 자신의 세상 보는 관점과 교육관을 피력하고 학생들의 생활지도를 하셨다. 따라서 교장 선생님의 말씀은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나도 경기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극명하게 대비되는 위의 두 분 교장 선생님을 모셨고, 그 분들로부터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물들여 졌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두 종류의 이질적 ‘유전자’가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이후 내 삶의 궤적 곳곳에 영향을 미쳤다.

 

                                     II.

조재호 교장선생님은 경기고 16회 대선배로 도쿄 고등사범을 나와 경복중학교 교장을 거쳐 1954년 경기고 교장으로 부임하여 약 3년간 봉직하셨다. 이후 서울고 교장을 거쳐 서울교대 초대 학장을 지내셨다. 그는 일제 강점기, 방정환, 윤극영, 마해송 등과 더불어 <색동회>를 창설했고, 훗날 그 회장직을 맡으시는 등 시대를 앞서가신 선구적 교육자였다. 그런가 하면 그는 1955년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이라는 실로 간결하고 격조 높은 경기고등학교 교훈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조재호 교장님은 근엄한 성품과 출중한 인격을 갖춘 교육자로 평생 인성교육과 전인교육에 헌신하셨다. 그는 “말을 물가로 데려가도 물까지 먹일 순 없다”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동기부여의 리더십을 강조했고, 당장의 성과를 올리는 일보다 사람의 바탕을 바로 세워 장차 큰일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확고한 교육관을 지니셨다.   

 

한편 김원규 교장 선생님은 실제로 경기고 교장으로보다 서울고 교장으로 역사에 크게 기록된 분이다. 그는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영문과 출신으로 서울고 초대교장(1946)으로 11년간 봉직하면서 스파르타 식 엘리트 교육을 매개로 서울고를 경기고의 맞수로 크게 키우셨다. 또한 그의 투철한 교육관과 수범(垂範)을 통하여 서울고 졸업생들에게 평생 간직할 정신적 유산을 많이 남긴 분이다. 그가 조회 때 마다 가장 자주 훈시했던 말씀은 ‘너희는 어디가서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돼라’였다. 이 어구(語句)는 서초동 서울고 본관 우축 화단에 자연석위에 새겨져 <서울고의 정신>으로 계승되고 있다. 엘리트 교육에 대한 그의 투철한 신념과 열정은 서울고 학생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쳐, 많은 서울고 졸업생들에게 그는 아직도 살아있는 전설이자 기념비적 인물로 남아있다. 그의 이러한 공덕을 기려 2001년에 서울고 교정에 그의 흉상을 세워졌다.

김 교장님은 그가 재직했던 서울고와 경기고를 영국의 ‘이튼(Eaton) 스쿨’로 가꾸겠다는 간절한 꿈을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 영국의 웰링턴이 나톨레옹과의 워털루 전투에서 승전하고 돌아와서 행한 연설 ‘월털루의 승전은 이튼교의 교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를 자주 언급하셨다. 또한 김원규 교장은 특히 바른 생활습관을 강조했고, 그것이 생활화되어야 한다는 점을 자주 일깨웠다. 그는 ‘깨끗하고 부지런하고 책임을 져라'고 말씀을 귀가 아프도록 하셨고, 그 구체적 실천방법까지 제시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게을러진다고 모든 학생들의 바지 주머니를 꿰매도록 한 것이 그 예이다.

 

흥미있는 일은 김원규 교장과 조재호 교장은 여러 가지 점에서 극명하게 서로 대조되는 교육자라는 점이다. 우선 용모부터 크게 다르다. 김 교장은 흰 얼굴에 헌칠한 키, 움푹 파인 눈 등 얼마간 서양신사 같은 인상인데 비해, 조 교장은 기골이 장대하나 얼굴은 촌부(村夫)의 모습이었다. 김 교장님은 얼굴에는 약간의 오만과 신경질적인 빛이 스치는데 비해, 조 교장님은 근엄하면서 후덕한 전형적인 옛 어른의 모습 그대로였다.

두 분은 교육철학에서도 확연히 차이가 났다. 김 교장님은 철저하게 수월성 위주의 엘리트 교육을 지향했다. 다분히 목표지향적이었고, 성과주의에 대한 집착이 컸다. 그가 교장직을 수행하면서 가장 중시했던 교육지표는 ‘서울대학교에 몇 명을 진학시키느냐’ 였다. 그가 우수한 교사의 발탁과 수업평가에 온 정성을 쏟았던 것도 그 때문 이었다. 그래서 암행어사처럼 교실 뒷문으로 잠입하여 수업을 직접 참관하는 경우도 잦았다. 그럴 때면 수업 중이던 선생님들이 크게 긴장하여 목소리가 떨리곤 했다. 이에 반해 조재호 교장은 지식교육 보다 인격형성을 중시했고 단기적, 가시적 결과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기적 교육성과에 더 역점을 두었다.

 

김원규 교장은 일화가 무척 많았다. 서울고 교장시절, 아침 지각생을 잡으려고 쫓아 가다가 발을 다쳐 한 동안 지팡이를 짚고 다녔던 것도 유명한 얘기다. 이에 반해 조재호 교장은 강당 뒷동산을 거닐다가 수업을 빠지고 아카시아 꽃나무 아래서 깊이 잠을 자고 있는 학생을 보고 그냥 지나쳤다가 나중에 교장실로 불러 따듯한 훈화 한마디로 평생 잊지 못할 감명을 남기셨던 후덕한 분이다.

김원규 교장은 매우 열정적, 헌신적으로 교육에 임했고, 그 분의 리더십 아래 학교는 역동적 분위기 속에 변화의 물결이 일렁였다. 그러나 규제가 많았고, 늘 얼마간의 긴장이 감돌았다. 이에 비해, 조 교장 휘하의 학교는 평온하고 넉넉한 분위기 속에서 그가 창안한 교훈처럼 자유, 문화, 평화가 넘실댔다.

                                       

                                         III.

당시 두 교장 선생님에 대한 평가는 학생마다 달랐다. 그런데 나는 원래 조재호 교장선생님의 팬이었고, 그 분이 세상 사는 모습을 존경했다. 그분이 알게 모르게 내게 가르쳐 주신 몇 가지 덕목들, 인성존중, 상생(相生)지향, 포용적 리더십, 장기적 조망, 종합적. 균형적 사고 등은 이후 내 삶의 양식과 사고체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세상을 보는 그의 진지한 태도와 따스한 마음, 그리고 스스로를 내 세우지 않는 겸양지덕(謙讓之德)은 내가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큰 바위 얼굴처럼 나를 정신적으로 압도하는 큰 힘이 있으셨다.

 

이에 반해 나는 김원규 교장 선생님에 대해서는 얼마간 비판적이었고, 다분히 유보적인 입장이었다. 그 분의 교육에 대한 열정에 대해서는 십분 존경스러웠으나, 과도한 경쟁 및 승부의식, 성과주의, 지나친 엘리트 의식과 독선은 언제나 내 마음의 걸렸다. 그런데 나는 살아가면서, 신기하게도 내 사고 속에 깊이 잠복해 있는 ‘김원규 유전자’에 가끔 깜짝 놀라곤 한다. “욕하면서 배운다”고 나는 이미 그에게 크게 물들어 있는 것이다.

나는 집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거실이나 방에서 나오면서 전등을 끄지 않으면, 그 때 마다 호되게 야단을 쳤다. 대학 연구실 조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 김원규 교장 선생님이 아침 조회에서 자주 하셨던 “독일 나치 군인들은 적군인 소련에 포로수용소에 잡혀 있을 때도 결코 쓸 때 없이 전등을 켜지 않았고, 방을 나갈 때면 언제나 솔선해서 전등을 껐다. 절전은 생활화 되어야한다”는 말씀을 회상했다. 절제와 청결, 시간약속 등 일상의 생활습관들에서도 그 분으로부터 학습한 것이 너무나 많다. 또 내가 정부에서 일할 때에 ‘일 벌레’라는 별명을 자주 들었다. 또 겉으로 대범한 척해도 의외로 목표지향적이고, 성과에 집착한다는 비판도 들었다. 그럴 때 마다, 나는 아차하며 내 안에 몰래 숨 쉬고 있는 ‘김원규 유전자’를 발견하곤 했다.

                                     

                                          IV.

 

대체로 볼 때, 나는 인생의 큰 그림을 그리거나 중, 장기 계획을 하는 과정에서는 조재호 교장 선생님으로 부터, 그리고 단기적 목표추구나 일상적 생활습관에서는 김원규 교장 선생님으로 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당시, 두 분 교장 선생님은 50대 초, 중반으로 역량이나 경륜으로 볼 때 인생의 최절정기에 계셨다. 나도 생애주기에서 더없이 중요한 청소년기에 한국 중등 교육계의 큰 별이셨던 이 두 분에게서 사사(師事) 받고, 두 분의 정신세계의 정수(精髓)를 접할 수 있었던 일은 실로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학점 인프레' 유감  (0) 2017.06.26
내 사랑 영랑호  (5) 2017.05.02
새해 새 아침에  (0) 2017.01.01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0) 2016.12.15
65-75세가 '전성기'? 왜  (0) 2016.11.2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