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전적 에세이45

나의 삶, 나의 길 (계간지) 2018년 가을호에 실린 내 글 '나의 삶, 나의 길'을 옮긴다. 2018. 10. 8.
어머니와 함께한 4.19 (재록) 내 기억 속에는 4.19가 아직도 어제 일인 듯 선명한데, 벌써 58년이 지났다. 대학 2학년 화사한 봄날, 싱그러운 젊음들이 순수와 열정으로 하나 되어 민주주의를 외쳤던 그 날은 내 인생 여정에서 가장 찬연한 기록으로 영원히 뇌리에 남아있다. 아래 글은 2011년 4월 19일, 에 한번 실렸던 글이다. 북받치는 감정으로 재록한다. 2018. 4. 18.
속 깊은 사람, 강희일 사장님 다산출판사의 강희일 사장님이 출판인으로서의 자신의 외길 인생을 담은 자전적 회고록을 내신다며, 글을 부탁했다. 내가 보낸 내용을 아래에 담는다. 속 깊은 사람, 강희일 사장님 I. 다산(茶山)의 강희일 사장님을 처음 만난 것은 내가 한국외국어대학 행정학과에 근무하던 1973년경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그와의 교유(交遊)도 어언 45년, 거의 반세기 가까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당시 내가 30대 초반이었고 강희일 님은 아마 20대 말이었으니, 둘 다 정말 꽃 같은 젊은 나이였다. 강희일 님은 그때 에서 대학교재 기획과 영업을 맡고 있었는데, 그의 진실한 성품과 훈훈한 인간미에 반해 사회과학 계열의 젊은 교수들이 그를 무척 좋아했다. 그는 비즈니스를 앞세우기보다는 늘 교수들과 인간적 유대와 신뢰 관계를 쌓는.. 2018. 4. 16.
1.4후퇴와 피난길 (IV) I. 경상북도로 넘어오니 점차 대구에 가까워진다는 생각에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으나 혹한과 과로로 몸은 천근만근이 되었다. 말을 건넬 기력도 없어 그냥 발걸음만 옮겼던 기억이다. 그러다가 조금 뒤처지면 피난대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잰걸음으로 따라가곤 했다. 겨울 해가 짧아 어둠이 일찍 찾아와 아무리 애써 걸어도 하루에 50리를 넘기기 어려웠다. 상주읍은 제법 큰 고을이었다. 옥천 이후 거쳐 온 여느 마을들과는 달리 길도 넓고, 집들도 큼직큼직하고 정돈돼 있어 얼마간 도시풍을 느꼈다. 상주에서 묵은 다음날 새벽, 심기일전을 위해 다른 식구들이 깨기 전에 일찍 일어나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이곳저곳 살폈던 기억이다. 그러면서 훗날 이곳에 한번 들려 오늘 내가 이곳에서 느꼈던 인상을 다시 더듬어 보리라 생각했다.. 2017. 4. 28.
1. 4 후퇴와 피난길 (III) I. 초입에 이르니, 길거리 전신주와 눈에 잘 뜨이는 집벽이나 문짝에 수 없는 알림 글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 , 등의 간단한 메모들이었는데, 피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족과 헤어진 피난민들이 자신의 소식을 알리는 글들이었다. 많은 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는 모습이 눈에 뜨였다. 나도 그 글들을 읽어 볼까 어머니께 여쭈어 보았더니, 어머니는 내게, “그럴 필요 없다. 아버지는 대구로 내려 가셨다. 우리가 그곳으로 가면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잖아도 나는 앞으로 아버지를 어떻게 만날 수 있을지 궁금했기에, 나는 어머니께 아버지와 무슨 말씀이 있으셨는지 재차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 만약 우리도 불가피하게 피난길에 나서게 된다면, 대구로 내려가 어디로 연락해야 되는지 아빠와 미리.. 2017. 3. 10.
1.4 후퇴와 피난길 (II) I. 1월 초의 추위는 살을 에는 듯 매서웠다. 많은 수의 남녀노소가 짐 보따리와 함께 떼 지어 움직이니 피난대열은 혼잡스럽기 그지없었다. 그 북새통에 아이들의 울음소리, 한발이라도 빨리 가려다 서로 얽혀 밀려 넘어지며 내지르는 고함소리, 가족을 잃고 비탄에 젖어 울부짖는 소리가 진동했다. 한마디로 아비규환이었다.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오직 ‘살겠다는’ 의지하나로 큰 물결을 이루며 남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에서 까지는 주로 철로를 따라 갔던 기억이다. 가까이 갔을 때, 멀리 철로 주변에 시체가 두 구(具)가 나동그라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눈에 기차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었다. 어머니가 황급히 손을 뻗혀 내 눈을 가리셨다. 그러나 그 순간 내 뇌리에 마지막 열차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 2017. 2. 25.
1.4 후퇴와 피난길 (1) I. 한 겨울 이맘때면, 지금부터 60여 년 전, 1951년 1. 4 후퇴 때 내가 겪었던 고단한 피난길이 자주 생각난다. 열 한 살짜리 소년이 체험한 그 해 겨울은 무척 혹독했다. 그러나 그 때 그 피난길은 힘겹고 고통스러웠던 아픈 추억 보다는, 철없던 어린 소년의 자의식(自意識)을 크게 키워 준 매우 값지고, 소중한 기억으로 내 뇌리에 남아 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1950년 12월 중순부터 이듬해 1월에 이르기 까지 약 한 달여의 경과가 내 머리에 아직도 비교적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는 일이 있다. 피난길 셋째 날, 충남 소정리에서 나는 지친 다리를 끌고 피난 대열을 따라 가다가, 문득 “먼 훗날 내가 이 극한의 체험을 잊지 않고 되새겨 보려면 일기는 못써도 간단.. 2017. 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