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코리아'의 창간에 즈음하여 김수환 추기경님은 내가 청한 인터뷰에 기꺼이 응해 주셨다. 추기경님의 오랜 만의 언론 인터뷰이어서 그 내용이 전 일간 신문에 실렸다. 여기서 추기경님은 속내를 숨김헚이 드러내셨다. .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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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보다 문화적 코드로 승부걸겠다"
리버럴한 중도매체 표방, 인터넷신문 업코리아 창간
 
심재석

▲업코리아 메인페이지     ©업코리아홈페이지
중도의 목소리를 대변하겠다는 인터넷 신문이 등장했다. 인터넷신문 업코리아(http://upkorea.net/)는 27일 공식 창간을 선언하고 “우리는 좌우간 보혁간의 극단적 이념대립과 국론분열을 극복하는데 앞장선다”고 밝혔다. 업코리아는 창간사를 통해 ▲최소강령적 체제가치로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추구 ▲열린 민족주의와 자주적 세계화를 지향 ▲합리적 개혁과 실사구시를 추구 ▲정치적 중립과 경제적 독립을 견지 ▲중도와 균형을 표방이라는 큰 목표를 밝혔다.

업코리아는 안병영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를 대표로 박세일 서울대 교수, 서경석 경실련 상임집행위원장, 강원일 변호사, 박은정 이화여대 교수, 이삼열 숭실대 교수, 임현진 서울대 교수가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외에 김수환 추기경, 소설가 박완서씨 등 사회 각 분야의 명망가 620여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해 창간부터 주목을 받고 있다.

Upkorea는 27일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창간기념행사를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날 행사에는 박관용 국회의장, 박진, 박범진, 김영선, 권오을 등 한나라당 의원, 이부영, 김부겸 통합연대 의원 등의 현직 의원과 이명박 서울시장,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박권상 전 KBS사장 등 유명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관심을 끌었다.

박관용 국회의장은 축사를 통해 “(업코리아 창간이) 어둠을 밝히는 한줄기 빛”이라며 “이념갈등이 심한 한 상황에서 (중도매체를) 학수고대 했다”고 말했다.

▲ 안병영 업코리아대표의 창간사 모습    
©대자보
안병영 대표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업코리아는 좌우라는 이념적 잣대가 아닌 리버럴이라는 문화적 코드로 네티즌에게 접근할 것”이라며 “사안의 본질을 찾아 들어서 전문적인 이야기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업코리아의 기사는 사실에 대한 전달보다 사안에 대한 분석과 전문가들의 기고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허욱 편집장은 밝혔다. 그는 “사실에 대한 보도는 연합통신이나 다른 신문에서 하고 있는데 우리까지 할 필요는 없다”며 “우리는 하나의 관점으로 보고 그것을 어떻게 정책화시킬 것인가에 깊이있는 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업코리아의 창간은 긍정적으로 볼 만하다. 현재 인터넷 매체들에게 중도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프레시안 정도의 매체가 세계적 조류로 볼 때 중도에 속하겠지만 사회전체가 우향우를 하고 있는 한국의 상황에서 프레시안 정도도 엄청난 진보 축에 속한다.

그러나 한국 내부의 상황에서만 보자면 중도 매체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뉴스앤뉴스라는 매체가 중도를 표방하고 지난 5월 창간했지만 아직 활발한 활동을 보이지 않고 있고 논조도 극우까지는 아닐지라도 상당히 오른쪽에 치우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영향력 있는 중도매체의 출현은 반가운 일이다.

▲ 창간식에 참석한 사회각층 인사들    ©대자보
그러나 중도라는 노선은 상당한 위험성을 안고 있다는 사실도 직시해야 한다. 정치적으로 중도라는 노선은 양비론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사회적 논란이 일어나는 문제에 무조건 논란의 가운데에 서려고 하면 무의미한 비판만 일삼게 될 수 있다. 중도라는 노선아래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명확히 판단해야 진정한 중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업코리아가 중도의 역할을 표방하고 나섰지만 실질적으로는 합리적 우파의 역할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우편향 된 사회에서의 중도란 중도우파가 되기 때문이다. 건전한 우파의 목소리가 없고 극우가 우파를 대변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업코리아가 합리적이고 온건한 우파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을 지 귀추가 주목된다.

아래는 창간기념행사에서 만난 업코리아 대표와 허욱 편집국장과의 미니인터뷰이다.


▲안병영 업코리아대표 ©대자보
안병영 대표

▼ 인테넷은 젊은 세대가 주도하고 있다. 참석한 인사들의 연령대가 높은데 젊은세대를 어떻게 공략할 것인가
이념적으로는 좌우가 있고 중도가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liberal쪽이 있고 authoritative한 쪽이 있다. 우리는 liberal한 쪽이다. 우리는 열린 마음, 열린 대화, 열린 문화를 가지고 젊은이들에게 다가설 생각이다.

▼ 조회수는 어느정도 예상하나?
많으면 좋겠지만, 크게 연연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여론 주도층이나 뜻있는 젊은이들이 많이 들어온다면 그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인터넷의 개혁적인 매체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우리 특색은 얘기할 수 있지만 다른 매체를 얘기하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중도적이란 입장이고 젊은 지식인들, 시민운동가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다. 정책전문성과 개혁성이 잘 조화를 이룰 것이다.

▼ 업코리아는 중도를 표방하고 나섰는데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에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나?
우리나라가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이념이 거품이 있다. 진보, 보수를 많이 얘기하지만 우리 실생활에서 그런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을 때가 많이 있다.  우리는 사안의 본질을 찾아 들어서 전문적인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 인터넷 매체의 특성상 욕설 등이 올라올 수 있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너무 편향된 지나친 욕설이나 비방, 다른 신문을 퍼오는 것은 내부적인 토론을 통해 관리할 생각이다. 신문을 건강하게 만들고 싶다. 좌우를 따지기 보다 건강한 목소리와 문화를 강조하고 싶다.

▼ 인터넷 독립신문을 아는가? 최근 우파들이 인공기를 소각하는 등의 시위를 벌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독립신문은 안다. 그러나 오늘은 우리 잔칫날인데 남의 얘기를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다.

▲허욱 업코리아 편집장     ©대자보
허욱 편집국장

▼ 편직국 인원은 몇 명인가?
처음에는 8명이었으나 지금은 6명이다. 2명은 처음부터 오프라인과 온라인 매체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 편집국은 어떻게 운영되나?
오마이뉴스처럼 시민기자 중심으로 갈 것인가 프레시안처럼 전문기사로 승부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우리 편집국 기자는 글을 받고, 필진들을 연결시키는 일을 할 것이다. 내부 기자들은 편집기자 역할과 외부 전문가들의 기고가 충당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제한적인 취재를 할 것이다.

▼ 그렇다면 사실에 대한 보도가 아닌 주장, 칼럼을 중심으로 컨텐츠를 제공한다는 것인가?
그렇다. 사실에 대한 보도는 연합통신이나 다른 신문에서 하고 있는데 우리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우리는 하나의 관점으로 보고 그것을 어떻게 정책화시킬 것인가에 깊이있는 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150여명 정도의 필진이 이미 준비하고 있다.

▼ 업코리아의 발전 방향은 무엇인가?
그것은 차후 3개월쯤 지난 시점에서 논의를 할 것이다. 인터넷 매체의 특징이 진화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 의제설정 중심이라면 노선이 중요한데 어떤 노선으로 갈 것인가?
프레시안 근처에 있지 않을까? 개혁적인 성향의 중도로 갈 것이다. 우리는 이념적 잣대보다 문화적 관점으로 접근할 것이다. 젊은층에게는 진보냐 보수냐가 문제가 아니다. 노사모가 진보는 아니지 않는가? 우리가 중요시 여기는 것은 리버럴이다.

▼ 중도라는 노선이 양비론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다는 문제제기가 있는데..
형식논리로 보자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중도는 시작부터 중도를 정해놓고 가자는 것이 아니라, 논의와 토론 끝에 결과적으로 중도로 결정되는 것이다. 최종목표가 중도이지 중도를 정해놓고 fact를 끌어 맞추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현실의 문제에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기사입력: 2003/08/28 [13:36]  최종편집: ⓒ 대자보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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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4월 1일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심경으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던 <EBS 수능방송>이  마침내 출범했다. 그 얼마 후 <신동아>(2004년 5월호/ 통권 536호)와 긴 인터뷰(306-314 면)를  했다. 인터뷰의 표제는 "무차별 특목고 설립 반대, '교육기회 평등화 실현할 터'" 였다. 여기에 내 교육철학이 많이 담겨졌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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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영 전 교육부총리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육부 수장을 두번이나 역임했다. 이 자리를 두 번 거쳐간 사람은 초대 안호상 장관부터 현재의 김신일 부총리(50대)에 이르기까지 박정희 정부 시절 권오병 전 장관과 안 전부총리 두 명 뿐이다. 장관 재직기간은 30개월에 이른다.

YS 정부 이후 임명된 장관들 가운데 가장 장수한 인물이다.
사교육비 절감을 위한 EBS 수능 강의,학교 민주화를 위한 학교운영위원회, 교사들의 경쟁력 강화를 목적으로 한 교원평가제,교육 소외자들을 위한 대안학교 정책 등이 그의 재직시절 수립됐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2008 입시안’도 안 전부총리 재직시절인 2004년에 마련된 것이다.

그가 수립한 정책들을 보면 두드러진 특징이 한 가지 있다. 자유주의적 흐름인 ‘경쟁’이나 ‘자율’의 개념이 강한 정책과 ‘형평’에 무게가 있는 정책이 반반씩이라는 점이다.중도개혁주의로서 그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중도개혁주의자 안병영’은 현 정부에서 설 자리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요즘 장관 재직시절을 빼곤 거의 평생 몸 담았던 연세대를 정년퇴임 한 뒤 낙향(落鄕)한 상태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강원도 속초시의 33평짜리 아파트에서 부인과 단 둘이 설악산과 영랑호를 벗삼아 산행과 산책,집필을 하고 있다.절반은 은둔 생활이다.

자연에 귀의해 지내면 마음과 몸이 편할 듯 하지만 요즘 벌어지고 있는 교육주체들간의 갈등을 바라보면 마음이 무겁다.무엇보다 성공할 수도 있었던 2008 입시안이 추진과정에서의 준비소홀로 기우뚱거리고 있는 탓이 크다.안 전부총리는 처음에는 중앙 SUNDAY의 인터뷰 요청에 대해 손사래를 쳤다. “교육부나 대학,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줄 순 없다”는 이유였다.사실 요즘 ‘뒤돌아서면 바로 남이 되서 공격하는’ 염량세태(炎凉世態)가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그는 중앙 SUNDAY의 간곡한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였다. ‘교육이 위기’라는 절박함이 더 컸던 듯 하다.

인터뷰는 지난달 21일 안 전부총리의 속초 자택에서 이뤄졌다.노무현 대통령이 대학 총장들을 불러 오찬을 하기 5일전이다.

그는 이날 중앙 SUNDAY와의 인터뷰에서 “2004년에 입시안이 성공하기 위한 전제로 ‘교육발전협의회’와 ‘입학사정관제’의 도입을 제시했으나 퇴임후 교육발전 협의회는 식물화 과정을 밟았고 입학사정관제도 불발이었다”며 “퇴임전 20명으로 구성된 교육발전 협의회를 출범시켰는데 이 협의회가 2년이상 꾸준히 활동을 했다면 올해 쯤 2008 입시개혁이 꽤 쓸모있는 준거틀로 정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교육부는 이 협의체를 전혀 가동하지 않았다”고 안 전부총리는 안타까워 했다.
교육 발전협의회는 2008입시안’에 관한 주요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고교와 대학,학부모, 시민사회, 언론, 그리고 정부 인사가 참여하는 협의체다.입학사정관제는 대학이 전문가를 채용해 학생의 성적, 개인환경, 잠재력 및 소질 등을 종합판단케 하는 제도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엇갈린 사안인 만큼 이런 중도통합 기구에서 갈등을 ‘용광로’처럼 녹여 냈어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2008 입시개혁안이 전제했던 두가지 방안중 지금 어느 하나도 제도화된 것이 없다”는 게 안 전부총리의 지적이다.

그러면서 안 전부총리는 “교육부는 이제 위계적 압력이나 제재라는 방식을 통해 대학을 강제할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이라며 “교육부는 지시자가 아니라 조정자,주재자가 아닌 조력자가 돼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고 안 전부총리가 대학의 손을 번쩍 들어준 것은 아니다.

안 전부총리는 “주요 대학들은 양질의 학생들을 선발하기 위해 스스로 연구하고 노력하기 보다 나라가 순위를 정해주면 손쉽게 이들을 걷어갈 생각만 해왔다”며 “고교교육정상화에도 배전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비판했다.



다음은 안 전부총리와의 일문일답.

-드물게 두번이나 교육수장이 됐는데,그 과정과 재직시 있었던 일을 먼저 들려주시죠.

“제가 처음 교육부장관에 임명된 것은 1995년말 문민정부 때였고 두번째는 2003년말 참여정부때였습니다.

첫번째 발탁은 전혀 의외의 일이었습니다.그해 12월20일 개각발표 예정시간인 11시보다 한시간 여 앞서 청와대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장관직을 청했습니다.‘해라, 못하겠다’ 한동안 승강이를 거쳐 장관직을 수락한 것은 10시 넘어서였어요.
당시 TV화면에 11시 가까이 까지 교육부장관 예정자로 이명현 교수 이름이 뜨다가 발표직전에 내 이름이 올랐어요.

훗날 들으니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이수성 신임총리가 교육부장관 경질문제와 관련해 이견이 있었던 듯 해요.이수성 총리는 강력하게 경질을 요구했고 김영삼 대통령은 유임을 주장하다가 마지막에 총리 뜻을 수용했다는 것이죠.경질로 결판나자 김대통령이 제가 어떻겠느냐고 물었고 이총리가 좋다고 대답했다는 거예요.

때문에 당시 나는 전혀 준비된 장관이 아니었어요.따라서 내가 수행할 미션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나 의지도 마련되지 않았죠.그러나 어렴풋이 그해 5월31일 교육개혁위원회가 발표한 1차교육개혁방안을 착실하게 프로그램화하는 일이 내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서 취임 기자회견때도 그렇게 대답했지요.

임명되자마자 나는 마치 입시준비하는 학생처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그러면서 세계화 민주화의 시대정신을 담은 교육개혁방안이 기존 교육제도 관행과 비교할 때 패러다임적 변화를 추구하는 일대 혁신안이라는 사실을 알고 엄청난 개혁전도사가 되어야 하겠다는 결의를 다졌습니다.

1차교육개혁안에 이어 임기중 2,3,4차 교육개혁안이 발표됐고 그 과정에서 교육부는 더 바빠졌어요.이들 교육개혁방안은 당시 풍미했던 세계화와 민주화라는 두 사조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그러나 다른 한편 나는 청와대가 주도하는 자유주의적 교육개혁의 흐름과 별도로 제도권 교육의 그늘진 곳을 치유하기 위해 교육복지 프로그램을 개발해야할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것이 96년 12월 교육복지 종합대책으로 문서화 됐죠.이렇게 마련된 교육복지 종합대책은 당시 교육부에서 장관프로젝트라고 불려졌고 이후 교육복지라는 개념이 점차 보편화됐습니다.
나는 청와대 주연 교욱부 조연의 1~4차 교육개혁 사업을 정책화하는 일과 이른바 ‘장관프로젝트’인 교육복지 사업을 실천하는 일을 핵심미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2003년 상황은 많이 달라요.11월 하순 노무현 대통령이 나를 청와대 오찬에 초청했습니다.직접 대면해 말씀을 나눈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오찬내내 그분은 나에게 교육에 관해서 많은 것을 물었고 나는 나대로 내 생각을 전했어요.약 한달후 neis문제로 교육부가 온통 혼란에 빠져들게 되자 개각과정에서 다시 교육부 수장으로 발탁됐습니다.아마 11월 오찬모임과 그날의 대화가 발탁계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동안 밖에 있는 몸이었으나 한국교육의 흐름과 정책의 변화를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어 내가 수행해야할 미션을 처음처럼 생소하게 느끼진 않았습니다.취임하자마자 이미 준비중이던 사교육비 경감대책을 정밀하게 다듬고 그 핵심과제의 하나인 EBS 수능강의, 인터넷서비스의 출범을 준비했어요.여기서 강조해야할 것은 지난 10년에 동안 정권이 바뀌었으나 이 나라 교육정책의 골격은 아직도 문민정부의 5ㆍ31교육개혁안에 준거하고 있었으며 정권 고위층들도 그 점을 스스럼없이 인정해왔다는 사실이에요.

그러나 그동안 너무 자주 장관이 바뀌는 과정에서 교육개혁 사업은 전체적 틀속에서 유기적으로 전개되기 보다도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단기적 대증적으로 추진됐어요.아마 노대통령이 나를 발탁한 것도 1년 8개월동안 5ㆍ31교육개혁안의 초기제도화 과정에 주역이었던 내가 이 일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청와대 ‘실패’우려 속 EBS 수능강의 인터넷 서비스 성공시켜
교사자질 향상 위한 ‘교원평가제’ 드라이브 걸기전 장관서 물러나


-현 정부에서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하려 했던 일은 뭔가요.

“내가 가장 핵심적 미션으로 생각했던 것은 하나는 이러닝(e-learning)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원개혁이었어요.

2003년말 교육부총리로 취임하자마자 서둘러서 사교육비경감대책을 마련했는데 핵심사업은 EBS 수능강의 및 인터넷 서비스였습니다.나는 2004년초 올해는 이러닝의 해라고 선포했어요.2004년 4월1일,세계적 수준의 정보통신 인프라와 이러닝 준비도를 갖춘 우리나라는 10만명 이상이 동여상에 동시접속할 수 있는 세계적으로 유래없는 대규모 교육정보화 사업인 EBS 수능강의 및 인터넷 서비스에 성공했습니다.이로써 이러닝 대중화가 촉발됐죠.이후 이러닝 대중화는 교육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측면에서 다양한 파급효과를 불러 일으켰어요.

사실 EBS 인터넷 강의에 대한 대통령과 청와대,그리고 총리실의 관심은 지대한 편이었는데 대체적인 분위기는 매우 우려스럽다는 것이었습니다. 3월2일 교육부 종합대책을 통해 정식으로 보고를 받은 노무현 대통령은 깊은 우려를 표명하면서 인터넷 대란 대비책을 철저하게 강구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대통령은 실제로 그 전날 3월1일 이미 민정비서실로부터 시스템구축에 소요되는 기간(통상 2개월)을 감안할 때 4월1일 인터넷 동영상 서비스는 불가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은바 있었기에 회의가 더 컸을 거예요.

청와대뿐만 아니라 정보통신부조차도 4월1일 개통에 매우 회의적이었어요.이러한 분위기는 총리실도 마찬가지였죠.고건총리는 비상합동상황실의 가동과 3개월간의 시험기간 설정을 권고했어요.교육부가 당초 예상되는 동영상 최대 동시접속자수를 5만명으로 산정했다가 10만명으로 늘린 것도 이러한 주위의 분위기와 권고에 따른 것이에요.

이 사업은 관심이 기술적 성패에 집중되었죠.따라서 여야나 교직단체들간 첨예한 정치적 가치론적 갈등은 별로 없었어요.모든 관심은 이른바 인터넷 대란에 모였죠.EBS인터넷 서비스가 개통되던 시점에 대통령은 탄핵으로 직무정지 상태에 있었습니다.성공직후 대통령의 대응은 접할수 없었는데,고건총리는 국무회의에서 치하의 말씀을 했습니다.

이 인터넷 강의는 우리나라 이러닝의 출발점이 아닌가 합니다.이러닝 활성화는 관련 산업군의 확장과 더불어 복합적이고 연쇄적인 산업 경제확장성을 내포하고 있었어요.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의 이러닝이 이 수준에 오른 것은 10년에 걸친 IT교육에 대한 지속적 투자의 결과였습니다.

나는 2004년초엔 그간 금기시돼왔던 교원평가 문제를 들고 나왔어요.적잖은 저항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한국교육의 질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그래서 교원평가와 더불어 교원양성체제와 교원연수체제를 한몫에 함께 개혁할 채비를 했습니다.2004년 내내 정책연구를 계속했죠.세 가지는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되며 가능한 함께 풀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내 계획으로는 2005년 1월 어느 때쯤 그해를 교원개혁의 해라고 선포할 예정이었습니다.그러나 그에 앞서 부총리직을 물러나게 됐습니다.이러닝 발전과 교원평가는 우리 교육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절호의 인프라 구축사업이에요.이념적 편향성이 없는 두 사업은 한국교육 백년대계를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학력 세습화는 곧 가난 대물림, 사회통합 심각히 저해할수 있어

-지금 한국 교육현실은 어떻게 보십니까.

“한국 교육은 국내에선 온갖 비난과 질타의 대상이 되지만 신기한 것은 외국에 나가면 상찬과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는 점입니다.외국인들은 한국 교육이 지난 수십년간 성취한 산업화와 민주화의 원동력이었다는 점을 크게 주목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육의 두드러진 성과는 초중등학생들의 뛰어난 학업성취도에서도 나타납니다.특히 중교교생들의 학업성취능력은 OECD기준으로 최상급랭킹입니다.외국이 부러워하는 한국교육의 또다른 강점은 세계최정상의 교육정보화 기반입니다.한국은 명실공히 세계의 이러닝(e-learning) 선도국가입니다. 이밖에도 우리 사회에는 전통적으로 교육과 학습을 중요시하는 사회문화적 뿌리가 깊습니다.다른 나라에 비해 우수한 교원들이 교육현장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육은 이러한 빛과 더불어 오히려 그를 압도하는 그림자를 갖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가장 치열하게 직면하는 교육의 문제점은 과열 입시경쟁과 이와 연관된 엄청난 사교육비의 무게입니다.이것이 주체하기 어려운 가계 압박,증가일로의 조기유학대열,심지어는 저출산의 주요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입시위주의 교육은 인성교육과 창의성 교육을 뒷전으로 몰아내며 학생들의 심신을 피폐하게 만듭니다.우리 교육현장은 점차 청소년들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옭죄는 창살 없는 감옥이 되고 있습니다.한국교육의 어두운 단면은 이외에도 적지 않지요. 그중 심각한 것이 학력의 세습화와 가난의 대물림입니다.계층간 지역간 교육격차는 이미 우리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학벌주의,학력주의와 맞물려 사회통합을 심각하게 저해합니다.

아울러 크게 걱정되는 부문이 고등교육입니다.

우리나라 고등교육의 국제경쟁력은 대체로 그리 높게 평가되지 못합니다.그간 양적성장에만 힘을 쏟고 적절한 투자와 질관리에 소홀했던 것이 주원인입니다.무엇보다 산업계 현장의 수요를 대학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자못 높습니다.이러한 인적 자원수급의 불일치로 인해 대졸자는 과잉배출되는 가운데, 정작 쓸만한 고급핵심인력은 크게 부족한 이른바 풍요속의 빈곤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인적자원정책이 풀어야 할 중차대한 과제가 아닐수 없죠.

대체로 우리는 우리 교육에 대해 자기비하적 내지는 자학적 평가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그러나 한국교육에는 한국의 미래를 담보할 엄청난 발전잠재력이 내재해 있다고 봅니다.문제는 우리교육의 빛과 그림자를 바르게 가려 그 밝은 면은 열심히 키우고 가꾸고, 어두운 면은 그 뿌리를 찾아 문제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일입니다.”

극단적 신자유주의자,시대착오전 민중주의자 사이에서 절대고독 반추

-말씀하신 대로 우리 교육에서 뿌리를 찾아 내야할 가장 어두운 면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국민의 교육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전지구적으로 유례가 없죠.전설적인 한국인의 교육열은 우리나라의 교육발전 원동력인 동시에 자칫 감당하기 어려운 큰 짐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은 많은 한구인들이 교육과 연관해서 얼마간 한이 맺혀있다는 것입니다.사실 많은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유교적 입신양명에 젖어 못배운 한을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그러다보니 전 국민이 일류대학병에 감염이 됐고 아울러 심각한 학벌주의의 노예가 됐습니다.이런 사회적 환경은 교육문제 해결에 큰 장애가 되고 있어요.

또하나, 교육당국이 교육정책의 형성과 관리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의 큰 원천은 우리사회에 뿌리하고 있는 이념적 갈등이에요.

얼핏 보기에 교육문제는 탈이데올로기의 영역인 듯 하나 실은 거기에 이념적 갈등이 첨예하게 도사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대부분의 교육쟁점의 경우 여론이 반반씩 갈리는 경우가 많고 그때문에 사회적 합의를 이루어내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닙니다.

이념의 여울에 빠지게 되면 만사를 정(正)과 사(邪)의 문제로 인식하게 되죠.문제해결에 나서면 나설수록 사회적 갈등의 수렁에 깊이 빠져들기 일쑤입니다.

현재 우리사회도 시장과 경쟁을 우상시하는 극단적 신자유주의자와 평등에 목을 매는 시대착오적 민중주의자간의 대결양상이 두드러집니다.2004년 국회 교육위원회이는 약 반수의 386전사들과 또다른 반수의 신자유주의 기수들이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중도주의자인 나는 그 가운데서 절대고독을 반추할 때가 많았어요.그런 가운데 중도개혁을 지행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언론도 크게 둘로 갈려져 있지 않은가요?

현재 쟁점화되고 있는 이른바 3불이나 고교평준화 사립학교법 등도 다 그런 예들이죠.

교육의 경우 수월성과 보편성, 경쟁력과 사회적 형평이 충돌할 때가 많습니다.그러나 많은 경우 양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조합과 조화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두 가지 가치는 함께 존중해야 하며 문제는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양자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논의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자주 쟁점화하는 평준화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평준화는 고수되어야 한다’라던가 ‘평준화는 절대로 해제되어야 한다’는 입장은 이념적 집착이에요.

바른 입장은 ‘평준화는 보완,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평준화의 기본 틀을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다양화, 특성화, 자율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함으로써 내적 역동성과 경쟁력을 확보하자는 입장이 그것입니다.

수준별 이동수업, 선지원 후추첨, 학교별 프로그램의 다양화, 특목고 운영개선, 영재교육 프로그램의 활성화 등이 주요한 보완책이죠.

말하자면 대중교육의 견실한 보편구조위에 수월성 구조를 효과적으로 접목하자는 접근입니다.

다시말해, 가능한한 사회통합을 해치지 않으면서 경쟁력을 키우자는 것이에요.
내 기본적 입장은 교육에 있어서도 자유와 평등의 변증법을 실천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나친 신자유주의 편향이나 과도한 평등주의적 접근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양자의 균형과 조합이 필요합니다.교육문제 해결은 사회적 파트너십과 사회협약을 통해 이뤄져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평준화는 고수되어야’ ‘평준화는 절대로 해제되어야’ 모두 이념적 집착
‘평준화는 보완,개선되어야’가 정답


-개별 교육현안에 대해 질문하겠습니다.3불과 내신비중,수능변별력,논술,특목고 등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요.

”결론 부터 말하면 이른바 3불은 현 단계로서는 고교교육정상화와 우리사회의 사회통합적 가치실현을 위해 그 기본틀이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적지 않은 이들이 3불은 거의 모든 대학들이 다 원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으나 실제로 따져보면 상황은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기여입학제를 진정으로 갈망하는 학교들이 있다면 아마 몇몇 일류사립대일 것입니다.그 외에 적지 않은 다른 사립대학들은 기여입학제가 가져올 부익부 빈익빈 때문에 내심으로는 오히려 반대하는 입장일게 분명해요.사회통합적 관점에서 볼때 앞으로 혹시 우파 자유주의 정권이 들어선다 해도 기여입학제를 명시적으로 제도화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봐요.
대학별 본고사를 실시하고자 하는 대학 내지 이를 실시할 수 있는 대학 또한 손꼽을 정도고 거의 대부분의 대학은 이에 크게 집착하지 않고 있어요.또 실제 일본을 제외하면 OECD국가중 대학별 고사를 치르는 나라는 없구요.

OECD 모든 나라가 학생 선발때 참고하는 학생평가는 고교성적이에요.과거의 두차례 경험을 바탕으로 평가할 때 우리의 경우 본고사는 사교육비 증가,양극화 심화를 가져올 개연성이 무척 크고 고교교육정상화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거예요.

고교등급제의 경우 우리처럼 학교선택권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학교차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자기모순이기도 합니다.

또 오늘과 같이 입시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고교등급제가 용인되는 경우 고교서열화가 촉진돼 우수고교로의 진학경쟁이 과열되고 사교육열풍이 더욱 무섭게 불어닥칠 것입니다.실제로 고교간 평균적 학력격차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 격차를 개인의 학력격차로 환원한다는 것은, 더욱이 그것도 선배의 성적이 후배에게 대물림된다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죠.
더욱이 우리의 경우 학교간의 학력격차를 엄정하게 평가할 수 없는 상황이 아니지 않나요?
많은 이들은 3불은 시대에 맞지 않는 평등주의적 발상이라고 폄하합니다.그러나 그 보다는 현단계에서 우리 사회가 아직은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한 토양이 아니라는 대답이 오히려 바른 대답일 거예요.

그러나 장기적으로 볼때 상황변화에 따라 3불정책이 보다 유연하게 운영될 가능성은 있다고 봐요.

예컨데 특별전형제도가 보다 확대되면 그 연장선속에서 기여입학제가 좀 뒤지는 대학의 문을 통해 보다 그럴 듯한 외관을 갖추고 슬며시 자리잡을 수 있을지 몰라요.
고교등급제의 경우도 주요 대학들이 앞에 말한 입학사정관제를 장기간 정착시킨 뒤에 일정고교의 특정교육과정과 입학생들의 입학후의 성적 등의 상관관계를 실증적으로 도출하고 이에 근거해 고교간 차별화를 시도하는 경우 제한적으로 유사 고교등급제의 도입가능성은 있으리라고 봅니다.”

2008 입시안 전제는 ‘교육발전 협의회’와 ‘입학사정관제’
그러나 장관 퇴임후 협의회는 식물화되고 사정관제는 불발


-요즘 내신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어떻게 보십니까.

“요즘 논란이 되고 이는 2008 입시개혁안은 2004년 10월 내가 장관으로 있을 때 마련된 것입니다.그 기본취지는 고교교육의 중심축을 사교육시장에서 학교안으로 옮겨보자는 것이었어요. 이를 위해 수능비중을 상대적으로 줄이고 대신 내신비중을 높여보려는 것이었죠.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으나 당시 언론은 대체로 그 취지를 받아들이는 입장이었습니다.

나는 입시안을 발표하면서 이것이 성공하기 위한 전제로서 두가지 제도의 도입을 제시했습니다.

그 하나는 ‘교육발전협의회’이고 또하나는 ‘입학사정관제’입니다.전자는 고교와 대학을 주축으로 학부모, 시민사회,언론, 그리고 교육부 인사가 참여하는 협의체로서 입시개혁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추구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실제로 우리나라에서는 대입시험이나 고교 교육과정과 연관해 양당사자인 대학과 고교가 서로 협의하는 기회가 전혀 없어요.그러다보니 자칫 공익을 외면하고 자신의 눈앞에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고교와 대학간에 대화의 통로가 없으면 우수학생의 선발에 일차적 관심이 큰 대학과 그 보다는 고교교육의 정상화에 집착하는 고교들 간에 이해관계가 어긋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고교 대학 학부모 등이 함께 모여 입시개혁안의 근본정신을 바탕으로 내신 수능 논술 등의 적정 비중이나 내신의 신뢰도 강화방안,논술의 출제수위,고교 교육과정의 정상화 등을 함꼐 고민하고 심도 있게 협의해 합리적인 가이드 라인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어요.
여기서 아예 3불정책도 논의할 수 있겠죠.

말하자면 다수 당사자간의 사회적 협약을 통해서 공익에 걸맞는 합의안을 마련하고 개별 당사자의 일탈을 방지하자는 것이었습니다.또 이과정에서 교육인적자원부는 성의있는 조정자, 사회적 합의의 도출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2004년말 20명으로 구성되는 교육발전 협의회를 출범시키고 구체적인 운영방안도 제시했습니다.내 생각으로는 이 협의회가 출범이후 2년이상 꾸준히 활동을 하면, 2007년도에 진입할 시점이면 2008입시개혁이 꽤 쓸모있는 준거틀로 정착할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장관직으로 물러난 후 교육발전 협의회는 이른바 식물화 과정을 밟았습니다.지난 2년간 교육부는 이협의체를 가동하지 않았습니다.안타까운 일입니다. 얼마전 논술파동을 볼 때도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입학사전관제도 불발이었어요.오늘 대부분의 대학은 양질의 학생들을 선발하기 위해 스스로 연구하고 집중적이고 상시적인 노력을 경주하기 보다는 나라가 순위를 정해주면 관료적 절차를 거쳐 손쉽게 이들을 걷어갈 생각만 해왔어요.

적어도 우리나라의 주요대학은 이제 입학과정의 내실화와 고교 교육과정의 정상화를 위해 학생충원문제를 전업으로 연구하는 직제를 갖춰야 합니다.그런데 그 노력을 하기 보다는 편법만을 쫓아요.이처럼 2008입시개혁안이 전제했던 두가지 방안중 어느 것도 제도화되지 못했어요.

이제 교육인적자원부는 위계적 압력이나 제재라는 방식을 통해 대학을 강제할 생각을 버려야해요. 계속적 대화와 협의,그리고 여러 당사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사회적 협약을 통해 제도개혁의 결실을 추구해야할 것입니다.

사회적 파트너십의 형성과 사회협약의 체결은 실제로 중도개혁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중도통합 전략의 하나예요.노사정위원회도 그런 거죠.”

-특목고 문제도 쟁점 현안중의 하나인데요.

“우리사회의 다양한 교육욕구를 생각할 때 전체교육을 평준화의 틀로 묶어둘수는 없다고 봅니다.건강한 특목고 자사고는 당연히 필요하죠.그러나 현재 우리의 경우 외고 등 특목고나 자사고가 원래의 취지대로 운영되지 않고 입시명문고로 기능하고 있고 이 학교 졸업생들이 대학측의 편법으로 다양하게 우대되고 있는 현실, 그리고 학부모들이 경쟁우위 유지를 위한 사교육비를 집중할 효과적인 투자경로로 이들 학교들을 집중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오늘의 모습은 문제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와 연관해 근본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봅니다.이들 학교의 적정비중,수와 학생수 등과 이들 학교들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제도적 개혁방안 등에 관해 보다 치열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제목; 청와대,갈등 현장에 모습 드러내지 말아야

-요즘 대학과 교육부,청와대의 갈등이 불거져 있는데요.

“갈등은 어느 사회에나 있고 그것 자체가 보다 본질적인 문제해결의 단초가 된다면 유용할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오늘 드러나는 이들간의 갈등은 앞서 말한 교육발전협의회가 일찍부터 제 구실을 했다면 얼마간 미리 예방할수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실존하는 제도를 활용하지 않은 것도 문제거니와 지나치게 잦은 장관교체,정책일관성의 결여 등도 갈등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교육인적자원부는 이제 지시자, 주재자가 아닌 조정자 조력자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해야합니다.대학들도 눈앞의 이기심을 발동하기 보다는 공익과 한국교육의 미래에 대해 성찰해야합니다.

주요한 정책결정과정에서 부처는 청와대와 직간접적으로 협의를 하게 됩니다.그러나 청와대는 갈등현장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정치적 슬기를 발휘할 필요가 있습니다.”

엘리트 중심교육이냐… 뒤진 계급에 대한 교육기회 제고냐…
어렵지만 둘 다 하는 게 옳아


-교육정책에 대한 제언을 하신다면.

“교육개혁을 위한 접근은 대체로 세 가지가 두드러집니다.본질주의적 접근이 있고 경제주의적 접근이 있습니다. 마지막이 평등주의적 접근입니다.

본질주의적 접근은 교육의 본령, 즉 그 본연의 목적을 강조하는 입장이죠.지적능력이나 학력신장 보다 오히려 인성 함양, 인격적 성숙이 더 강조되죠. 경제주의적 접근은 시장주의 관점에서 경쟁력 강화를 강조하고 엘리트 교육에 역점을 두는 입장이에요.평등주의적 입장은 보다 대중적 관점에서 교육기회의 평등과 뒤진자에 대한 정책적 배려,그리고 교육을 통한 사회통합을 강조하는 관점이고요.

많은 이들은 심정적으로는 본질주의적 접근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강조합니다.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수사적 차원에 그치는 경우가 많고 정작 논란이 빚어지면 이념적으로 치우쳐 경제주의와 평등주의로 갈라지는 경우가 많아요.

나는 교육에 대한 세가지 관점 모두 중요한 사회적 가치며 그 어느것도 폄해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어요.교육개혁이 균형과 조화를 바탕으로 한다면 해답은 이들 세가지 가치중 어느 것을 선택해야하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간의 적절한 조화와 조합의 문제라고 판단했습니다.그런 의미에서 나는 교육단계마다 이들 세가치의 우선순위를 다르게 배열해 전체적으로 최상의 교육적 성과를 기대하는 것이 슬기로운 접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유아 및 초등학교의 경우 본질주의적 접근을 우선으로,중고등학교 교육에서는 평등주의와 경제주의를 조화롭게 배합하는데 역점을 두고 대학교육에 와서는 경제주의에 우선적 가치를 부여하자는 것이죠.

중등과정를 예로 할때 아직도 자주 쟁점화되고 있는 고전적 주제가 이른바 고교평준화 문제예요.

경제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평준화 이후 우리 중등교육이 하향평준화됐다는 실증적 논거가 그리 뚜렷하지 않아요.평준화 해체라는 혁명적인 꿈은 일단 접는 것이 현명해요.그렇다면 평준화틀과 내용을 그대로 갖고 갈 것이냐.그렇진 않아요.

2004년 4월 출범한 EBS 수능방송 인터넷 서비스도 실제 경쟁력과 평등성을 함께 추구하는 프로그램입니다.그것은 나라가 앞장서서 수준별로 최고급의 수능과외를 실시함으로써 고교생들의 전반적 학력신장과 사교육비 경감에 기여하려는 목적과 함께 교육소외지역의 학생들에게 서울 강남에 못지않은 교육기회를 제공하려는 교육격차 해소의 뜻이 함께 담겨 있어요.거듭 강조하지만 중등교육과정을 경제주의나 평등주의, 어느 한가지 접근법으로 다가간다는 것은 무리한 일입니다.따라서 양자의 장점을 보완할수 있는 실용주의적 방도를 강구하는 게 최선의 해결책입니다.

경제주의자는 엘리트 중심교육을 주창하고 평등주의자들은 뒤진계급의 교육기회 제고에 온 정성을 쏟습니다.그러면서 상대방의 입장은 반대하죠.그런데 답은 한가지입니다.어렵지만 두 가지 다 해야한다는 것이죠.영재도 세계적인 재목으로 키우고 조금 능력이 뒤지는 친구도 그 수준에서 자신의 잠재력을 극대화할수 있도록 정성껏 키워야 합니다.그렇게 되면 경쟁력도 키우고 사회통합도 달성할 수 있습니다.크게 멀리 보면 사회통합은 국가경쟁력의 가장 큰 원천이죠.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은 모든 학습자의 발전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키우는 것입니다.

세계에서 이것을 제일 잘하는 나라가 핀란드예요.이 나라는 영재교육도 열심히 하고 학습부진아 대책도 세계에서 가장 철저해요.추호의 인력유실을 허용하지 않죠.500만 조금 넘는 인구를 가진 아니라의 교육관은 나라 안에 모든 인력이 사회에서 제몫을 최대한으로 발휘할수 있도록 하는 것이에요.그러다보니 아니라의 교육성과는 실로 괄목할 정도예요.OECD의 국제교육 비교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교 1년생의 학업성취수준이 세계 1위죠.이 나라의 대표적 글로벌 기업인 노키아가 세계에서 가장 큰 디지털 휴대전화 제조회사로 성장한 이유도 바로 이나라 교육에서 찾을수 있을 것입니다.”

일 하면서 외로울 때 많았다
장관때 생각하면 자다가 벌떡 일어나


-2008입시안을 놓고 청와대와 갈등이 심각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꽤 고집을 부리셨던 것 같습니다. 그간 장관을 하시면서 정책환경속에 있는 다른 엑터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조정, 관리하셨습니까. 학자이시기 때문에 쉽지 않으셨을 듯 한데요.

“정책형성과정에서 대통령의 신임과 정책적 지원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대통령의 인격적 연장인 청와대 스탭진의 지원도 무척 중요한게 사실입니다.나는 명색이 정치학자이고 세상돌아가는데 둔감하지 않아 정치적 감수성은 별로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역동적으로 변하는 정책환경이나 정책과정에 대한 인지능력이나 대통령, 청와대, 국회 언론 등 다양한 정치적 액터들에게 어떻게 접근해 어떤 식으로 설득하느게 효율적인지에 대한 전략적 사고도 제법 할줄안다고 자부합니다.그러나 정책성공을 위해 전통적 스타일의 정치관리기술을 구사하는데는 능숙하지 못해요.특히 지연 학연과 같은 다양한 연고나 인연을 동원한다든가 골프모임이나 술자리 등을 해 친숙한 관계를 형성하는 전통적 정치기술은 낙제점에 속합니다. 인적 정서적 접근은 삼가는 편이었는데,그 때문에 일하면서 외로울 때가 많았죠.장관직은 저에게 지금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게 할 정도로 힘겨운 멍애였습니다.그 때 생각하면 요즈음 저는 천국을 거닐고 있지요.”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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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2월 17일 발표된 사교육비경감대책은 국민으로 부터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EBS 인터넷 강의, 수준별 보충학습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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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9. 16:14 http://cafe.daum.net/knuegoe/cyms/3

안병영 장관이 1996년 영산성지학교를 방문하면서 대안학교에 새로운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듬해인 1997년 '교육복지 종합대책'에서 대안학교의 설립 운영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곧 이어서 '대안학교의 법제화와 60억원의 재정지원'이라는 후속 조치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그 당시 교육부 관료들의 대안학교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들은 안병영 장관의 표현 대로 대안교육이 '교육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운동'이라는 것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대안교육은 대안학교 학생, 학부모, 교사 등 구성원들의 감동과 교감, 열정과 헌신, 사랑이 중요합니다. 여기에 그들은 촉매 역할을 했다고 생각됩니다. 그 결과 영산성지학교, 간디학교, 양업고등학교, 화랑고등학교가 인가를 받고 제도권 정규학교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인가를 받으려는 대안학교 설립자나 교육청 공무원들도 모두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토론자도 2002년 이우학교의 인가를 취급하면서 똑같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안병영 장관의 서한문에서도 언급된 학교부지라든가 무엇보다 설립 운영을 위한 재정 확보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가 컸습니다. 또 하나는 교사자격증 문제입니다. 반면에 이우학교는 참여하고 있는 교원들이 준비한 교육이념과 교육과정, 학교운영체제 등을 보고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미인가 대안학교들도 똑같은 어려움을 안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제도권 안에서 보는 시각입니다.

대안학교들이 설립할 때 의도한 대안적 역할을 안정적, 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재정의 자립과 우수교사의 체계적인 수급, 그리고 교육과정 콘텐츠의 개발이 중요하다는데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여기서 재정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문제가 제기되지만 결국은 당국의 재정결함보조 등의 방안으로 풀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교사 수급과 교육과정에 대해서는 대안학교가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소통하고 공유하면서 협력하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한문에서 제시한 '대안교육연구센터'와 관련해서 이우학교에서 설립 운영하고 있는 '함께여는교육' 연구소의 홈페이지를 알려드립니다. 이우학교 홈페이지와 함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우학교 http://www.2woo.net

함께여는교육 http://www.ceri.re.kr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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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개혁의 기치를 앞 세우고 인터넷 신문 창간에 참여했다. 벌써 7년전 일이다. 내가 초창기에 대표로 일했다.
그러나 이 매체는 이후 우여곡절을 거쳐 당초의 꿈을 접고 보수화의 길을 걷는다. 출범 당시 주간한국과 가진 인터뷰(2003/9/19)를 게재한다.

[석학에게 듣는다] 안병영 연세대 교수 업코리아대표

"이념의 이분법적 잣대 사라져야"

없이도 잘 지내오던 안병영(62ㆍ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선생이 드디어 부인 윤정자(62)씨의 휴대폰을 뺏어 온 것은 8월 중순께. 차는 못 몰아도 이제 그것만은 꼭 필요하게 됐다. 대표라는 직함이 요구하는 일의 분량도 분량이려니와, 하나의 언론 매체를 탄생시킨다는 것은 총력을 투여해도 부족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달라진 세상의 최신 매체가 아닌가.

자칭 ‘백면서생’이라지만, 선생의 경우는 그 말이 시대를 호흡하는 지식인의 책무를 저버릴 수 없다는 의기의 또 다른 표현으로 다가온다. 서울 충정로 ‘업코리아’ 편집국에는 허욱 편집국장 아래 5명의 젊은 기자가 쏟는 열정의 총체가 홈 페이지(www.upkorea.net)에 나날이 업 데이트 되고 있다.

9월 4일 현재. ‘김두관 행자부장관 해임 건의안 가결에 따른 대치 정국’이라는 머릿기사 아래 사회ㆍ생활ㆍ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기사가 배치돼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 재추대 기사 바로 밑에는 이홍규 한국정보통신대 교수가 기고한 ‘노무현 정부의 3대 모순’이 게재돼 있다.

IT 세상의 문화적 현상, 연극 리뷰 등이 읽는 맛을 돋우는 기획 기사다. 자살의 늪에 빠진 한국을 정신 심리학적으로 분석한 칼럼은 독자의 지적 욕구에 답한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인터넷 언론

발간일인 8월 27일을 전후해 주요 언론은 선생과의 인터뷰 등으로 이 신문의 출범을 축하했다. 추기경의 동참은 과연 화룡점정이었다. 8월 5일 혜화동 추기경 집무실에서 1시간 20분간 펼쳐졌던 인터뷰 도중, 선생이 추기경에게 했던 제안이 받아들여졌던 것.

이 소식이 알려지자 109명이었던 발의자 수는 650명으로 급증, 이 인터넷 신문이 도약하는 데 결정적 힘이 됐다. 5~60대가 주축이었던 발의자가 40대 교수진으로 확충된 것은 기존 네티즌의 정서와는 다른, 새로운 가능성을 내비친 부분이었다.

연세대 교수, 교육부 장관 등 공식적 부문에서의 활동으로 진작부터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던 선생은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 같은 행동의 기저에는 현시점을 “정서 과잉과 이념 과잉이 역기능으로 부쩍 불거지고 있는 젊은 세대, 이념적 양극화, 집단 갈등 상황”으로 보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합리성, 이성, 상식의 바다로 그들을 데려가기 위한 효율적 공간으로서 인터넷에 주목하게 된 거죠.” 대학교수로 재직중이던 1990년대 초부터 생활속에서 절감해 온 인터넷의 유용성을 이 시대에 올바르게 뿌리내리게 하자는 결심이었다. 무분별한 포퓰리즘과 사이버 테러의 텃밭으로 변질될 수도 있지만, 이 시대 젊은이들과의 공감 면적을 넓혀야 겠다는 결심에는 못 미쳤다.

오마이뉴스ㆍ프레시안ㆍ서프라이즈 등 진보 진영, 독립신문ㆍ뉴스 & 뉴스 등 보수 진영으로 나뉘어진 국내 인터넷 신문들을 일일이 클릭해 가며 속내를 탐색했던 것은 그래서다. 그 같은 수작업을 마다 않은 사람들이 그를 포함, 모두 7명. 강원일 변호사, 전 청와대 정책 기획수석 비서관 박세일 서울대 교수, 박은정 이화여대 교수, 서경석 경실련 상임집행위원장, 이삼열 숭실대 교수, 임현진 서울대 교수 등은 6월 19일 그를 정점으로 ‘발의자 대회’를 열어 언론과 면을 텄다.

‘지성, 전문성, 중도 균형성’을 내건 늦동이 인터넷 신문이 탄생한 것이다. “우리시대가 진정 필요로 하는 것은 사회 통합과 민생 개혁이라는 믿음이죠.”


지성, 전문성, 중도균형성 지향

승산 있는가? 성마른 질문에 선생은 “발기인으로 참여한 교수님들의 지원만 계속 따른다면 ‘격조 높은 대안 매체’로 우뚝 솟을 것”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익히 보던 탄탄대로가 아니었다.

“필자들에게 ‘정말 부끄럽고 죄송한데, 고료가 없다’는 말을 할 때는 힘들었죠.” 그러나 5명의 기자들에게 얄팍한 봉투를 월급이라며 줄 때보다는 힘이 덜 들었다고 한다. 당시 그들을 부르는 대학신문의 광고는 이러했다. ‘20대 보수와 50대 진보가 만나는 공간, 업코리아에서 용기가 있으면서도 균형 잡힌 젊은이를 찾습니다.’ 이 같은 광고에 젊은 인재들은 150명이나 몰려 들어 그를 난감케 했다.

‘50대 진보주의자’인 선생은 나이를 잊고 산다. 환갑이 지났지만 같은 목표 아래 20대와 머리를 맞댈 수 있는 것은 단순과 소박 덕택이다. 바로 그 덕택에 선생은 많은 사람들과의 공유 면적이 넓다는 얘기다. 흔한 골프도 안 치는 선생의 낙이라면 등산이 전부. 북한산은 1주일에 한 번, 연희동 집 근처의 산에는 수시로 간다. 그리고 학교와 인터넷 신문이다. 그러나 선생을 기억할 때, 적잖은 사람들이 정치 현장과 언론의 칼럼을 먼저 떠 올리게 되는 것도 탓할 바는 못 된다.

선생이 명쾌하고 균형 잡힌 칼럼으로서 세인의 입에 올랐던 것은 1980년대. 혼돈의 민주화 과정에서 도하 신문들은 선생의 생각이 필요했다. 일방적 주장이 난무하던 때, ‘건강한 민주화’를 지향하는 선생의 글은 더욱 돋보였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를 주로 소개한 80년대는 나를 가리켜 중도 도는 중좌라고들 했는데, 최근 들어서는 위장된 보수라고까지 하는 사람이 더러 있더군요.”

선생은 우리 사회가 진보니 보수니 하면서 상대의 존재를 왜곡하는 일에 너무 익숙하다며 그 같은 구분법에 강한 거부감을 표했다. “이념을 앞세우는 자의 속내는 헤게모니와 권력 장악에 놓여 있을 가능성이 높죠.” 한국은 선명성을 앞세워 쟁점이 급격히 양극화되는 사회라 중도적 수렴이 난망하다는 것. 이 대목에서 선생은 “여론 조사의 결과로는 많은 사람들이 중도적 입장인데, 언론은 거꾸로 간다”며 이 같은 추세를 부추기는 한국 언론의 흑백논리에 강한 거부감을 표했다.

좌우의 대립이 순치돼 온 서구 사회의 경험에서 우리는 배우려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유럽사는 중도 우파가 극우를, 중도 좌파가 극좌를 투쟁의 장에서 배제해 왔다”며 “상호 작용속에서 생산적 결과를 이끌어 내려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선생은 문제를 하나 냈다.

“누군가가 남북 관계에는 신중한데 우리 사회의 약자에 대해서 많은 배려를 한다면 이건 진봅니까, 보숩니까?”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규정이 몸에 굳어 버린 한국 사회는 저 질문에 어떤 답을 들려줄 것인가? 아니면 침묵할 것인가? 바로 저 같이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를 업코리아는 생생히 담아 내고자 한다. 선생이 보여 준 폭넓은 행보가 그 과정에서 큰 지분을 담당할 것이다.


관료사회, 성장지상주의서 벗어나야

YS 정권의 이수성ㆍ고건 총리 시절, 교육부 장관을 역임해 온 경험이 그것이다. “나와서 다시 학문하는 데 꽤 도움이 됐죠. 역동적 갈등관계 등 관료주의의 실체에 다가섰으니까요.” 그래서 선생이 관료사회나 정책에 대해 제시하는 조언은 ‘실체적 진실’을 담보하고 있다.

선생은 “우리나라의 관료 사회는 아직도 지난 시절의 성장주의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며 “그러나 발전국가의 여정으로 보자면 국가의 저력으로 기능했던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선생은 다분히 양면적인 관료적 권위주의는 현재 극복 과정을 겪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21세기는 그것을 넘어서, 세계화와 민주화라는 두 개의 거대한 패러다임으로 작동되는 시대다. 거기서 최대의 지분은 영미식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이라고 선생은 규정했다. 유럽형 복지국가라는 모델도 세계화 바람앞에는 수정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민주화, 그리고 조정된 시장 경제(co-ordinated market economy)를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야 할 것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세계화에 주체적으로 참여, 그 열매를 고르게 나눌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를 실현한 뒤에 세계화를 맞은 서양과 달리, 민주화의 한 가운데서 세계화의 도전을 받고 있는 한국은 모든 것이 헝클어져 힘들다는 지적이다.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는 세계화를 거부할 수 없어요. 우리는 지식ㆍ정보 사회에 대한 적응력이 강하므로 유리한 면이 있어요.” 그러므로 인적 자원에 대한 투자와 함께 사회적 안전망을 견고하게 하는 데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것. 이 대목에서 선생은 세계화 과정에서의 탈락자와 낙오자를 위한 복지에도 주력해 줄 것을 정부에 당부했다.

‘우리의 운명을 좋은 쪽으로 돌리자는/그런 간절한 마음들이 만드는/매체의탄생은/축하할 만한 일이 아닌가!’ 친구로서 예전부터 그를 쭉 지켜봐 온 정현종 시인이 헌정한 창간사가 옳다면, 21세기의 한국은 ‘맹목적인 증오와 광신적 믿음속에서 바르게 생각하고 말하고 우리의 운명을 좋은 쪽으로 돌리자는 간절한 마음들이 만드는 매체’ 하나를 갖게 된 셈이다.


침묵하던 중도의 제목소리 내기

그러나 지금은 걸음마를 가르치는 부모의 심정이다. 이전에 걸었던 큰길과는 분명 다른, 곁길이 될 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애착이 간다. 선생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어렵게 본 이 늦둥이가 빨리 제몫을 하기를 기대하는 심정이리라. “형편이 조금 나아지면 고료를 지급할 생각이다. 뒤늦게 보상할 생각도 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업코리아의 원고 청탁을 받은 지식인 중 ‘고료 없음’이라는 말에 언짢아 할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얼마전까지 당대의 칼럼니스트였던 선생은 업코리아 일에 쫓겨, 요즘도 심심찮게 들어 오는 원고 청탁은 일절 고사하고 있다.

방학이지만 매일 업코리아로 출근해 젊은 기자들과 부대끼는 선생은 잠시 나가더니 주스를 손수 컵에 담아 왔다. “우리는 모두 셀프예요.” 골프는 못 치지만 젊은이들과의 생활을 택한 선생은 이렇게 말을 맺는다. “단순, 소박하니 내 나이는 잊고 살죠.” 가지런한 치열 사이로 미소가 번져 나왔다.

침묵하던 중도가 함께 웃는다. 
  
장병욱 차장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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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영 (전 교육부총리,연세대 교수)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2006/4/20

I. 일반적인 질문들

다음은 귀하가 장관에 임명된 직후 장관직을 수행하기 시작하면서 부딪혔을 것으로 예상되는 몇 가지 상황을 중심으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1.먼저 어떤 과정을 통하여 장관으로 발탁되셨으며 어떤 미션(mission)을 가지고 부처에 취임을 하셨습니까?

제가 처음 교육부장관에 임명된 것은 1995년 말, 문민정부 때였고, 두 번째는 2003년 말 현 참여정부 때였습니다. 두 경우를 따로 설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제가 장관에 발탁된 것은 나나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한마디로 전혀 의외의 일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한번도 장관을 꿈꿔 본 적이 없었고, 정치권 근처에서 맴 돌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YS 대통령과도 일면식이 없었습니다. 혹 정치와 연관이 있다면, 내가 광의의 정치학자이고 당시 10 여 년간 꽤 자주 신문 등에 정치평론을 써 왔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과거 권위주의 정권 이래 역대 정권과 현실 정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습니다. 그런데 그해 12 20일 개각발표 예정시간인 11시에 한 시간 여 앞서서 청와대로부터 전화를 받았고, 김영삼 대통령이 직접 장관직을 청하였습니다. 해라, 못 하겠다 한동안 승강이를 거쳐 제가 장관직 수락을 한 것은 10시가 넘어서였습니다. 당시 TV화면에는 11시 가까이까지 교육부장관 예정자로 이명현 교수 이름이 뜨다가, 발표 직전에 제 이름이 올랐습니다.

훗날 들으니, 청와대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신임 이수성총리가 교육부장관 경질문제와 연관해서 이견이 있었던 듯 합니다. 이수성 총리는 강력하게 경질을 요구했고, 김 대통령은 유임을 주장하다가 마지막에 김 대통령이 총리의 뜻을 수용했다는 것입니다. 경질로 결판이 나자 김 대통령이 제가 어떻겠느냐고 물었고 이 총리가 좋다고 대답했다는 후일담입니다. 그런데 흥미 있는 일은 대통령이 어떤 경로로 나를 발탁했는지 그것은 불분명합니다. 어떤 이도 내가 당신을 대통령에게 추천했노라 나선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 가지 그럴 사한 설명은, 전임 박영식 장관이 각료 중 유일한 연세대 출신인데, 그 분이 떠나면 연대 출신이 한 사람도 없게 되어, 연세대 출신 중에서 후임 장관을 찾지 않았겠냐는 얘기입니다. 그러다가 제가 그 쪽 캠프와는 무관하지만, 그런대로 개혁적인 인사라고 판단해서 불러 들였을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여하튼 저의 장관 임용은 미리 예정되었던 일이 아니라 상황이 빚어 낸 <사건>, <사고>애 가까웠지 않나 싶습니다.

그 때문에 당시 저는 전혀 준비된 장관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수행할 미션에 대한 뚜렷한 인식이나 의지도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렴풋이 같은 해 5 31일 교육개혁위원회가 발표한 < 1차 교육개혁방안>을 착실하게 프로그램화 하는 일이 내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취임 기자회견 때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임명 되자마자, 저는 마치 입시 준비하는 학생처럼 열심히 공부 했습니다. 그러면서 세계화, 민주화의 시대정신을 담은 교육개혁방안이 기존의 교육제도와 관행과 비교할 때 <패러다임적 변화>를 추구하는 일대 혁신안이라는 사실을 알고 제가 엄청난 개혁 전도가가 되어야 하겠다는 결의를 다졌습니다. 1차 교육개혁안에 이어, 제 임기 중, 2, 3 및 제4차 교육개혁안이 발표되었고, 그 과정에서 교육부는 더욱 바뻐졌습니다. 이들 교육개혁방안은 당시 풍미했던 세계화와 민주화라는 두 사조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저는 청와대가 주도하는 자유주의적 교육개혁의 흐름과 별도로, 제도권교육의 그늘진 곳을 치유하기 위해 교육복지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것이 1996 12 <교육복지 종합대책> 으로 문서화 되었는데, 그 내용인즉, 1) 특수교육발전방안, 2) 학교중도탈락자 예방 종합대책, 3) 학습부진아 대책, 4) 귀국자녀 교육대책, 5) 유아교육 발전방안의 5가지 정책방안이었습니다. 그 중, 학교중도탈락자 대책은 곧 대안학교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련된 교육복지 종합대책은 당시 교육부에서 <장관 프로젝트>라고 불려졌고, 이후 <교육복지>라는 개념이 점차 보편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해, 저는 청와대 주연, 교육부 조연의 1-4차 교육개혁사업을 정책화하는 일과 이른바 장관 프로젝트인 교육복지 사업을 실천하는 일을 핵심 미션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교육개혁과제는 무려120개나 되고, 이를 정책화 하는 데는 엄청난 시간, 인력, 예산을 소요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우선순위 매김과 선택과 집중 문제가 있었습니다. 수많은 정책을 입법화했고, 프로그램화 했습니다만, 그 중 가장 역점을 두었던 사업은 교육정보화사업, 초등영어교육 도입, 학교운영위원회 제도화였습니다. 다음 교육복지사업 중에는 대안학교 및 특수교육 지원사업에 가장 힘을 쏟았습니다.

그에 비하면 2003년 제가 다시 정부로 들어갈 때는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그때는 이미 교육부장관을 한번 역임했기에 정권 초기부터 교육부총리 하마평에 조금씩 오르곤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저는 중도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인터넷 신문 <업코리아>(지금은 성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의 대표로 그 일에 몰입이 되어 있었기에 다시 정부로 들어갈 가능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11월 하순 노무현 대통령이 저를 청와대 오찬에 저를 초청했습니다. 직접 대면해서 말씀을 나눈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오찬 내내 그 분은 나에게 교육에 관해서 많은 것을 물었고, 나는 나대로 내 생각을 전했습니다. 약 한달 후 그해 12월 이른바 <NEIS>문제로 교육부가 온통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되자, 개각과정에서 제가 다시 교육부 수장으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아마 11월 오찬 모임과 그 날의 대화가 저를 발탁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다시 정부에 들어간 것은 1997 8월 처음 장관을 그만 둔 후 6 4개월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그 동안 9명의 장관이 바뀌었습니다. 비록 저는 그동안 밖에 있는 몸이었으나, 한국교육의 흐름과 정책의 변화를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가 수행해야 할 미션을 처음처럼 생소하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제가 취임하자마자, 이미 준비 중이던 <사교육비 경감대책>을 정밀하게 다듬고, 그 핵심과제의 하나인 <EBS 수능강의 및 인터넷 서비스>의 출범을 준비했던 것도 그런 연고로 가능했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지난 8년간 진행된 교육개혁사업을 전반적으로 면밀히 검토하여 중장기적 관점에서 재조정하고, 재 조직화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강조해야 할 것은, 지난 10년여 동안 정권이 문민정부에서 국민의 정부, 그리고 현 참여정부로 바뀌었으나, 이 나라 교육정책의 기본골격은 아직도 문민정부의 <5.31 교육개혁안>에 준거하고 있었으며, 정권 고위층들도 그 점을 스스럼없이 인정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너무 자주 장관이 바뀌는 과정에서 교육개혁사업은 전체적 틀 속에서 유기적으로 전개되기 보다도, 그 때 그 때 필요에 따라 단기적, 대증적으로 추진되었고, 그러다보니 전체적 구성도 흐트러졌고, 중장기적 조망도 잃고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새 시대에 맞춰 교육개혁사업의 틀과 방향을 새롭게 조정할 필요가 절박했습니다. 저는 이 일을 하는 것이 제 미션이라고 인식했습니다. 아마 노 대통령이 저를 발탁한 것도 1996-7년 간 1 8개월 동안 <5.31 교육개혁안>의 초기 제도화 과정에 주역이었던 제가 이 일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 기간 중장기적 조망의 교육개혁체계를 다시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만, 그 중 가장 핵심적인 미션으로 생각했던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그 하나는 e-러닝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원개혁이었습니다. 한국은 이미 교육정보화에 관한 세계 최첨단의 선진 국가이기 때문에 EBS 인터넷 서비스의 성공을 계기로, e-러닝의 열풍을 유아교육부터 평생교육까지 확산시켜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교원평가를 주축으로, 교원승진, 교원연수 등을 아우르는 대규모 교원개혁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교육개혁이 한 차원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교육의 주체인 교원이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중적 연구와 토론을 통해 안은 마련되었으나, 실천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2.
장관으로 취임하시면서 핵심 미션을 어떤 방식으로 구체화하고 실천해 나갔습니까?

첫 번째 장관 임기 중에는, 저는 이미 말씀드린바와 같이, 120개의 교육개혁사업과 이른바 장관 프로젝트 등 상상하기 어려운 과부하(過負荷)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기획 차원에서는 두루 관여를 하였으나, 시간, 인력, 예산 등을 고려할 때, 부처 내적으로 우선순위를 정하고 얼마간 집중과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장관은 특히 공론화와 입법화가 필요한 정책안에 대해 집중적으로 관여했고, 이들 막중한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 부처의 직제 개편, 인력의 정예화, 예산확보에 큰 정성을 쏟았습니다.

교육부내에 교육개혁추진단을 창설하고 여기를 중심으로 주요 교육개혁사업의 우선순위를 정해 프로그램화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하였습니다. 입법화가 필요한 의제는 장관 주도하에 일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개혁을 위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대규모의 직제개편과 인사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뒤에 자세히 설명).


3.
장관으로 취임할 때와 퇴임할 당시 겪었던 인수인계 절차과정에서 대해서 말씀하여 주십시오.

처음 장관으로 취임할 때는 장관간의 공식적 인수인계 절차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전임 장관님들과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취임식 날은 박영식 전임 장관과, 그 다음날은 김숙희 그 전 장관과 점심을 같이하며, 주요한 정책의 진행상황과 교육부의 내적 관리에 필요한 정보를 소상히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비공식적으로 인수인계를 한 셈입니다. 퇴임할 때는 당일 오후 2 40분 경, 고건총리를 통해 통고를 받고 퇴임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3시 뉴스에 이미 개각내용이 발표되었고, 오후 5시 퇴임식을 하고 청사를 나왔습니다. 퇴임 후, 다음 장관인 이명현 장관과 역시 점심을 같이 하며 내용상의 인수인계를 하였습니다.

지난번은 상황이 달랐습니다. 대통령과 전임 장관과 자리를 같이 했고, 국무총리실에서 정식으로 인수인계 절차도 거쳤습니다. 장관간의 인수인계가 제도화되었습니다. 이번에도 퇴임 시는 사전에 통고를 받지 못했고, 당일 아침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을 통해 정식으로 통고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물러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이미 마음의 준비를 끝냈을 때였습니다. 후임 이기준 부총리의 경우, 임용직후부터 소용돌이에 휘말렸기 때문에 예정된 인수인계 절차를 진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4. 귀하가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가장 큰 장애요인으로 어떤 것을 들 수 있습니까?

교육정책의 형성 및 관리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의 큰 원천은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하고 있는 이념적 갈등입니다. 얼핏 보기에 교육문제는 탈() 이념적 영역인 듯하나, 실은 거기에 이념적 갈등이 첨예하게 도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념의 여울에 빠지게 되면, 만사를 정()과 사()의 문제로 인식하게 됩니다. 따라서 문제해결에 나서면 나설수록 사회적 갈등의 수렁에 깊이 빠져들기가 일수입니다. 대부분의 교육정책의 경우, 여론이 반반으로 갈라지는 경우가 많고, 그 때문에 사회적 합의를 일궈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고교평준화, 3()정책이나 고교등급제,교육개방, 사립학교법이 모두 그런 예입니다.

정책에 대한 가치정향의 차이는 같은 정부안에도 존재합니다. 경제부처는 정권과 별 관계없이 시장주의적 관점을 고수하고, 교육문제도 가능한 한 시장과 경쟁에 맡길 것을 권합니다. 그 때문에 인적자원의 고른 개발과 사회통합 문제를 고려해야 할 교육인적자원부와 잦은 갈등이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장관이 된 후, 경제부총리에게 청하여 재경부 전 직원에게 1시간 교육문제에 대해 특강을 하고, 실국장들과 오찬을 함께 하면서 주요 쟁점에 관해 생각을 나눈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5. 귀하가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가장 도움(어려울 때 원군이 되었던)이 되었던 요소는 무엇입니까?

내 경우에는 교육인적자원부 직원들이 언제나 가장 큰 원군이었습니다. 두 번 임기 중 제가 주요 정책문제에 관한 한 내적 이견이나 갈등 때문에 고민한 적이 거의 없고, 주요 쟁점에 관한 한 부처 내부는 항상 잘 결속했습니다. 힘들 때 한마음으로 더 열심히 단합했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밖에 있다가도 부처로 돌아오면,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느꼈습니다.


II. 귀하가 장관으로 재직하시면서 경험하셨던 정책입안과 추진에 관한 질문입니다.

 구체적인 정책사례를 중심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구체적인 정책사례로 2004 4 1일부터 실시된 <EBS 수능방송. 인터넷강의>를 들겠습니다. 이 사례는 방송과 통신을 결합한 세계초유의 e-러닝 모델이자, 적극적 의미의 ‘교육기회의 평등’을 실현하고자 한 최초의 국가적 시도였습니다.
이 사업은 당초에 교육인적자원부의 <2.17 사교육비 경감대책>의 핵심사업으로 실시된 것으로, 그 연원을 따지면, 실제로 1977년부터 실시된 EBS‘위성교육 방송’을 모태로 하여 8 년 만에 재탄생 한 것으로, 두 차례 전부 제 임기 중에 시도된 것입니다. EBS의 플러스 1 채널 하나가 수능강의 전문 채널로 특화하여 24시간 전문 방송을 하는 한편, EBS 인터넷을 통해 중..고 급의 다양한 수준별 콘텐츠가 모든 영역의 과목으로 서비스됩니다. 무엇 보다, VOD(Video on Demand) 동영상 정보를 10 만명이 동시에 접속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역사적 시도는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지역간. 소득간 격차, 디지털 디바이드를 해소할 대표적 교육복지 프로그램으로 각광을 받았습니다. 더 나아가 이 개혁사업은 쌍방향성 자기 주도적 학습을 통한 e-러닝 시대를 개막, 한국의 교육 패러다임을 바꾸는 역사적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2004 8월 국무총리 국무 조정실은 참여정부의 정책사례를 분석한 결과, <EBS 수능 강의. 인터넷 방송> 2004 전반기 참여정부의 대표적 정책 성공사례로
뽑았습니다. 이 개혁사업은 카노이와 레빈의 분류에 따르면, 전체 교육 체제의 변화를 겨냥하면서 동시에 기술적 성격을 강하게 띤다는 점에서 <거시적.기술적 교육개혁> 사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거시적. 정치적 교육개혁>사례를 선택하려 했으나, 실제로 교육에 관한 우리사회의 이념적 갈등 때문에 적절한 사례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1. 본 정책에 대한 문제정의와 해결방안에 대한 접근방식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EBS 수능강의. 인터넷 서비스>의 핵심은 인터넷이라는 뉴미디어를 통해 국가가 앞장서서 과외를 실시함으로써 대입 준비과정에서 사교육비를 경감하고, 특히 소외지역이나 계층에게 더 낳은 교육기회를 제공하자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2004년 이를 실시하게 된 배후에는, 그동안 한국이 이른바 IT강국으로 크게 발 돋음 했다는 사실, 특히 우리나라의 교육정보화 수준이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의 수준에서 세계 굴지라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또 구체적으로는 EBS가 오랜 동안 위성을 통한 수능방송을 통해 이 방면에 엄청난 경험과 실행능력을 쌓았다는데 있습니다.

주지되듯이, <EBS 수능강의. 인터넷 서비스>의 연원은 ‘과열 과외 완화 대책’으로 1997년 전격적으로 실시된 ‘위성교육방송’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교육부장관으로서 이미 1996년 여름부터 박흥수 EBS 사장과 더불어 EBS 위성방송을 면밀하게 준비해 왔습니다. 그러나 1997년 여름 오랜 산고 끝에 EBS 위성방송이 막 그 고고의 성을 올렸을 때 저는 장관직을 사직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위성을 통한 EBS 수능방송은 지속되었으나, 이에 대한 정부의 관심을 크게 퇴조했고, 점차 그 교육적 성과에 대해서도 회의적 시각이 늘어갔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EBS를 잘 활용해서 수능시험 등에서 엄청난 효과를 본 많은 고등학교 들이 적지 않았으니, 대구 영신고, 광주 진흥고 등 이른바 EBS 수능명문들이 그런 학교들이었습니다. EBS는 적잖은 역경 속에서도 시간과 더불어 많은 콘텐츠를 개발했고 높은 수준의 방송기술도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2003년 말, 교육부총리에 취임하자마자 서둘러서 비교적 방대한 <사교육비 경감대책>을 집대성했고, 그 핵심 사업으로 e-러닝을 내 세웠는데 그 중 초점은 역시 <EBS 인터넷 서비스>였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인터넷 서비스를 통해 초, , 고급의 수준별 교육을 할 수 있다는 데 크게 흥분했습니다. 그러나 이 큰 사업을 위한 준비는 크게 미흡했습니다. EBS와 의논하여 개통일자를 4 1일로 잡았는데 따지고 보면 매우 무리한 일정이었습니다. 저는 취임직후 담당국장과 과장을 경질해서, 이 방면에 경험이 많은 박경재 국장과 배성근 과장을 담당 국. 과장으로 보임했습니다. 흥미있는 일은 1997년 위성방송 출범 당시 그 주역들이 고건(총리)-안병영(장관)-서삼용(국장)-박경재(과장)이고, EBS 측은 박흥수(EBS 사장)-배종대(담당책임자) 였는데, 이번에도 고건-안병영이 총리와 장관으로 관여했고, 서삼용(전산원장), 박경제(주무 국장)-배종대(EBS 뉴미디어 국장)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더 하여 적극성과 열정, 그리고 전문성을 두루 갖춘 고석만(EBS 사장)이 참여했습니다. 거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 출범이 눈앞에 닥쳤는데 우선 힘들었던 게 단기간 안에 대규모 사용자를 위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사업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초기 동시접속량이라는 미지수와 싸우는 일이 난사(難事)였습니다. 그런데 초기 접속 폭주 상황도 문제려니와, 동시에 안정화 단계에 들어선 이후에 합리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적정선을 찾는 것도 어렵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업 자체가 사상 초유의 실험이기 때문에 시뮤레이션이 불가능했고, 전문가 마다 예상 접속량이 달랐습니다. 결국 논란 끝에 EBS에 최대 10만명을 동시에 동영상으로 서비스할 수 있는 서버(Server)의 구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서버를 시간 내에 구입, 장착하기에 시간이 너무 절박했습니다. 실제로 장비가 우여곡절 끝에 인천공항을 통과한 것이 3 30일 새벽이었습니다.

그밖에도 ‘인터넷 대란’의 악몽은 곳곳에 있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KT나 하나로 통신을 비롯한 주요 초고속 인터넷 사업자들이 수능강의 실시 발표후 인터넷 백본망 증설, 기간망 증설, 부하분산, 가입자망 점검 등의 작업을 서둘러 진행해 인터넷 대란에 대비했으나, 특정시간대에 수능강의의 접속이 폭주했을 때 해당 서버와 회선에 무리가 갈 위험은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터넷 서비스의 교육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서둘러서 모든 고등학교에 위성방송 수신기 및 안테나를 설치하고, 각 학교의 인터넷 통신속도 및 학내망 속도를 증속하는 일, 저성능 PC를 교체 또는 업그레이드 하는 작업 등 끝이 없었습니다. 아울러 산간. 오지 및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EBS 서비스를 고르게 제공하기 위해, 이들 소외지역 학생들에게 위성방송 수신기를 지원하고, 케이블 TV 시청료 인하를 추진하며, PC 및 인터넷통신비 지원을 추진하는 등에도 소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웠던 일의 하나는, 그해 4 15일에 국회의원선거가 예정되어있어, 4 1 EBS 개통의 성패는 총선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 불문가지(不問可知) 였습니다.

여기서 교육인적자원부는 EBS와 더불어 유관기관간의 협력체제를 구축하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EBS, 정보통신부, 전산원, KT, 두루넷 등 11개 유관기관 전문가로 구성된 <대책반>을 구축(3 11일부터)하여, EBS에 구축되는 인터넷 시스템의 설계 및 구축을 점검, 지원하고, 국가망, 상용망 등 통신 네트워크 차원에서 예상되는 제반 문제점을 점검하고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아울러 동시접속자 폭증을 막기 위해 각 학교에게 가능한 한 위성방속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인터넷 강의는 미리 ‘다운로드’ 받은 후 학내망을 통해 활용하며, 개별 접속을 자제해 줄 것을 권고했습니다.

마지막 15일을 남기고는 교육인적자원부에는 장관실을 비롯한 모든 방에 <D-15>이라는 상황판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하루하루 날짜가 줄어들면서 일은 폭주하고 긴장은 고조되었습니다. 장관을 비롯해 거의 전 직원이 밤을 밝히며 ‘올인’에 돌입했습니다. 전국 2,100여개 고등학교별 추진상황 모니터링 시스템이 구축되었으며, 홍보를 위해 언론사별 전담요원이 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홍보를 위해 교직단체, 학부모 단체, 각급 학교 정보 부장회의, 교육방송연구회, 교사동호회 등을 활용하였습니다. EBS도 마찬가지로 마지막 점검에 나섰습니다. 언론은 개통초기 동시 접속자 폭증으로 인한 서버다운, 끊김 현상, 접속지연 등 다양한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는 지적과 함께 ‘인터넷 대란’이 마치 필지의 사실인양 보도하기 까지 했습니다.

저는 개통 사흘 전에 기자회견을 자청했습니다. 아직 서버의 구축이 완결되지 않은 상황이지만, 프로그램과 콘텐츠와 네트워크의 품질, 그리고 유관기관의 대응 등을 총 점검한 결과 얼마간 자신이 섰습니다. 그래서 기자들에게 ‘인터넷 대란은 없다’라는 메시지를 자신 있게 발표했습니다. 기자들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습니다.

3 31, 저는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과 함께 <e-러닝 시대 개막에 즈음하여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제하의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늘에 맡기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4 1일 새벽 2시 개통에 앞서 저는 EBS 상황실에서 진대제 장관과 고석만 EBS 사장과 더불어 야전사령관처럼 e-러닝의 연착륙을 진두지휘했습니다. 그날 아침 모든 언론은 EBS 수능-인터넷 강의가 성공했음을 일제히 보도했습니다.

그로부터 100일 후, 7 9일 오후 4시에 EBSi는 드디어 회원가입 100만 시대에 돌입했습니다.

2. 대통령, 청와대 비서진, 국회 및 정당, 이익집단, 시민단체, 언론, 그리고 유관부처간 이해갈등이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EBS 인터넷 강의에 대한 대통령과 청와대, 그리고 총리실의 관심은 지대한 편이었는데, 대체적인 분위기는 매우 ‘우려스럽다’는 입장이었습니다. 3 2일 교육부 종합대책을 통해 정식으로 보고를 받은 노무현 대통령은 깊은 우려를 표명하면서 ‘인터넷 대란 대비책을 철저하게 강구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대통령은 실제로 그 전날(3 1) 이미 민정비서실로부터 “시스템 구축에 소요되는 기간(통상 2개월)을 감안할 때, 4 1일 인터넷 동영상 서비스는 불가‘ 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은 바 있었기에 회의가 더 컷을 것입니다. 청와대뿐만 아니라, 정작 전문부처인 정보통신부조차도 4 1일 개통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총리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건 총리는 비상합동상황실의 가동과 3개월간의 시험기간 설정을 권고했습니다. 교육인적자원부가 당초에 예상되는 동영상 최대 동시접속자수를 5만명으로 산정했다가 10만명으로 늘린 것도 바로 이러한 주위의 분위기와 권고에 따른 것입니다.

위에서 밝혔듯이, 이 사업은 <거시적, 기술적> 교육개혁 사업이므로 교육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지대하지만 주된 관심이 그 기술적 성패에 집중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사업을 둘러 싼 여야나, 교직단체들 간에 첨예한 정치적, 가치론적 갈등은 별로 없었습니다. 야당도 명분상으로는 이 국가적 사업의 성공을 빌어야 하는 입장이었으므로, 모든 관심은 이른바 ‘인터넷 대란’여부에 모였습니다.

정작 EBS 인터넷 서비스가 개통되던 시점에는 대통령은 탄핵으로 직무정지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성공직후 그의 대응은 접할 수 없었습니다. 총선을 두 주 앞서고 있었기 때문에 국회도 사실상 쉬고 있을 때였습니다. 고건 총리는 다음 주, 국무회의에서 치하의 말씀을 했습니다. 성공이후, 언론도 비교적 호의적인 반향을 보였습니다.

위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EBS 인터넷 강의는 우리나라 e-러닝의 출발점이 아닌가 합니다. 다행인 것은 정작 언론을 비롯한 외부의 회의적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교육인적자원부와 EBS 양측은 성공에 대한 확신 속에 굳게 결속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3.
정책성공에 필요한 중요 요인들(대통령의 신임, 청와대 스탭진의 지원, 정책타이밍, 언론 및 여론의 반응, 국회나 정당의 지원 등)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이들의 충족 정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정책형성과정에서 대통령의 신임과 정책적 지원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대통령의 인격적 연장인 청와대 스텝진의 지원도 무척 중요한 게 사실입니다. 기본적으로 대통령은 사교육비 경감대책의 일환으로 진행된 <EBS 수능. 인터넷 서비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나, 지나치게 단기간에 급속히 진행되는 데 대해 매우 우려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청와대 스텝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언론과 여론도 회의적인 면이 없지 않았고요. 역시 많은 우려를 했습니다만, 총리실이 전 과정에 동참하며 우군으로 많이 도왔습니다.

그러나 이 사안 자체가 <기술적>성격이 강했기 때문에 정치적 갈등이 별로 없었고, 어느 누구도 일을 방해하는 쪽으로 부정적 개입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주위의 회의적 눈초리가 일하는 사람들을 외롭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EBS와의 굳은 결속을 바탕으로, 이 사업에 정통부, 한국전산원, ISP(인터넷 서비스 제공업체) 관계자, 시스템 구축 책임을 맡은 LG CNS등을 깊이 끌어들여, 네트워크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였고, 실패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4.
성공적인 정책수행을 위해 귀하가 사용한 정치관리 (political management)분야에 관한 질문입니다. 예를 들면, 귀하는 대통령, 대통령비서실장, 청와대 수석비서관들, 다른 행정부처 및 자치단체장, 국회, 언론 그리고 이익집단들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하여 어떤 종류의 정치적 기술이나 전략들을 사용하셨는지 말씀하여 주십시오.

저는 명색이 정치학자이고 세상 돌아가는데 그리 둔감하지 않아 정치적 감수성은 별로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 때, 그때 역동적으로 변하는 정책환경이나, 정책과정에 대한 인지능력이나, 대통령, 청와대, 국회, 언론 등 다양한 정치적 actor들에게 어떻게 접근하여 어떤 방식으로 이들을 설득하는 것이 효율적인지에 대한 전략적 사고도 제법 할 줄 안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저는 정책성공을 위해 전통적 스타일의 정치관리 기술을 구사하는 데는 그리 능숙한 편이 못됩니다. 특히 지연, 학연과 같은 다양한 연고나 인연을 한껏 동원한다든가, 잦은 골프모임이나 술자리 등을 통해 친숙한 관계를 형성하는 전통적인 정치기술은 낙제점에 속합니다. 터놓고 말해서, 저는 기본적으로 일은 일의 관계로 해결해야지 끈끈한 사람관계로 해결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고, 그 때문에 <인적, 정서적 접근>은 삼가는 편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나라의 큰일을 위해서는 본인이 얼마간 망가지드라도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데, 저는 재임 중, 제 본업이 학자이고, 또 깨끗한 모습으로 연구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살아 왔기 때문에, 아예 처음부터 전통적 정치관리기술을 구사하는 일은 금기시 하였습니다. 청와대든, 국회든, 언론 쪽이든 마찬가지였고, 특히 권력이 큰 동네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 때문에 일하면서 외로울 때가 많았습니다.

1) 정치적 협상전술이나 설득력 있는 전략(정치적 감각이나 노하우)

정책결정과정에는 실로 많은 참여자들이 관여하며, 장관들은 그들 간의 상충하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균형 있게 조정해야 합니다. 여기에 정치적 감수성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신뢰구축이 필요합니다. 장관은 정책쟁점에 따라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접촉하게 되는데, 가능하면 이들과의 기술적 차원의 이해관계 조정이나 교환관계를 넘어, 깊은 교감을 통한 규범적 공감대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쉬운 일이 아니나 한번 신뢰관계가 형성되면 그 관계는 오래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관은 단순한 이해관계의 조정자가 아닌, 개혁의 주도역 내지 실천자로서 얼마간 자신의 규범적 입지를 분명히 하고 결의 있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해관계의 조정을 위해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유연한 자세를 견지할 필요가 있고, 교조적, 독선적 접근은 금물입니다. 장기적 관점에서 주요 개혁과제를 중심으로 장관주도하에 조직적으로 느슨하나, 규범적으로 상호 공감하고 연대하는 다양한 주체를 네트워크로 묶을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편의상 이를 <규범적 개혁공동체>라고 불렀고, 이들과 꾸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2) 유관 정치집단들과의 개별적 친분관계(학연, 지연 등 네트워크)의 활용

개별적 친분관계가 있으면 설득과 이해가 용이하기 때문에 이를 전혀 활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여기에 매달리지는 않았습니다.

3) 여론이나 언론의 효과적인 활용전략

저는 소극적으로 보도자료 제공차원의 수동적인 부처 홍보에는 식상했습니다. 단발 이슈에 대응하는 일회성 홍보나 대증요법, 상투적 접근은 실효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중. 장기적 관점에서 교육정책 전반을 기획, 조정하는 전략적인 홍보개념을 도입했고, 정책입안 단계부터 홍보전략수립을 의무화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EBS수능. 인터넷 서비스>의 경우도, 초기부터 언론기관 대상 정책사안 설명, 이메일 통한 홍보자료 수시 제공, 교육부 출입기자단과 수시 간담회를 계속했고, 장관 TV 출연, Q & A 자료 제공, 광고 등을 통한 대 국민 홍보도 지속적으로 시행했습니다.

참고로 교육인적자원부는 2004 1년간 정책고객과 핵심고객 들에게 이메일을 통해 교육정책에 관한 정보를 상시 제공하는 틀을 만들었습니다. 제가 직접 관여한 것은 이른바 <부총리 서한>인데, 3월부터 년말 까지 매번 약 20 만명에게 31차례 보냈습니다. 그 중 <K형에게>,<대안학교 이야기>, <우리교육에는 희망이 있습니다>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5.
본 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가장 아쉬웠던 점들에 대하여 말씀해주십시오.

그리 아쉬웠던 점이 없었습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에 크게 고무되었습니다. 주위의 우려와 회의는 얼마간 우리를 외롭게 만들었지만,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더 철저하게 준비하도록 압박했기에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교육복지에 관심이 큰 저로서는 EBS 수능방송. 인터넷 서비스가 사교육의 혜택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소외지역의 학생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는 사실과 이의 성공을 통하여 우리나라의 e-러닝이 그 첫 단추를 꼈다는 데 크게 만족합니다.


III.
관리 및 리더십 분야 (management and leadership skills)에 관한 질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말씀을 해 주십시오.

부처관리 사례

김영삼 정부시절 장관 부임 후 반년이 조금 지난 1996 7 8, 오랜 산고 끝에 교육부 는 대규모의 직제개편을 하고, 이를 계기로 교육부 역사상 유례없는 최대 규모의 인사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교육개혁을 성공적으로 실천하기 위 해서는 무엇보다 일과 사람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 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관리개혁을 통해 교육부는 혁신 역량을 크게 높여 교육개혁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위의 사례를 직제개편과 인사개혁으로 나누어 좀더 설명하려고 합니다.

1) 직제개편

<작은 정부>구현이라는 국가시책에 따라 기구와 정원을 늘리지 않는 범위내에서 개편을 단행했습니다. 몇 가지 두드러진 변화를 살펴보면, 단순관리 기능을 최소화하고 정책기획 및 개발기능을 대폭 강화하여, <교육정책기획국>을 신설하고, 21세기 정보화사회에 발맞추어 <교육정보관리국>, 그리고 평생학습사회에 대비하여 <평생교육국>을 신설하였습니다. 또 그동안 교육부의 정책기능이 고등교육분야에 편중되어있었으나, <.중등교육실>을 신설하여 국민기초교육, 인성교육 강화의지를 천명하는 한편, 그간 소홀히 취급되어 온 유아교육과 특수교육을 각각 과로 승격하여 독자적 체계를 세웠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직제는 해방 후 50년 동안 지속되어 온 기존의 교육부의 전통적인 조직을 앞으로 50년을 바라보며, 새롭게 미래지향적으로 개편한 것으로 지식, 정보사회를 선도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의미하는 획기적 조직개편이었습니다.

2) 인사개혁

대규모의 직제개편에 따라 교육부는 총 535(일반직 379, 전문직 156)에 대한 역사상 유례없는 인사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전문성과 개혁성을 가진 외부 전문가를 대폭 영입(고등교육실장, 교육정보관리국장, 교육행정전산담당관, 교육정보자료담당관, 국제교육협력담당관)하는 한편, 젊고 유능한 인재를 과감히 발탁하여 관료조직의 활성화를 도모하고 행정의 전문성 향상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그 결과 직급별 평균연령이 현저히 낮아지고, 임용구분별로도 행정고시출신 공무원이 기존의 39.8%에서 53%로 크게 높아졌습니다. 그간 다수의 유능한 행정고시출신 공무원들이 장기간 지방으로 전전하며 본부진출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들을 과감히 발탁하여 <새 피>를 주입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원출신의 교육전문직 인사제도를 개선하기 위해 큰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기존의 교육전문직제도가 안고 있는 고질적 병폐의 근원은, 이들 주 많은 이들이 일을 위해 교육부에 들어오기보다, 일신상 필요에 의해 교육부로 왔다가 또 필요에 따라 나간다는 사실입니다. 즉 일선에서 20년 이상 교사로 재직하던 장기 경력자들이 나이가 많이 들어 연구사나 장학사로 교육부에 들어왔다가 몇 년 지나 상위자격을 취득하여 교감, 교장으로 다시 나가거나, 그냥 있으면 정년(당시 65) 이전에 교장중임임기(8)이 끝나게 될 사람들이 본부로 들어와 일정기간 머물다가 교장으로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므로, 교육전문직 제도의 취지가 퇴색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교육행정업무에 필요한 행. 재정지식이나 정책기획 경험이 전혀 없어 교육부에 들어 온 후 이들에게 기대했던 역할을 수행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교육행정 전문가를 제도적으로 구분해서 양성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에 따라 교육공무원인사관리규정을 개정하여 획기적인 개선방안을 확정했습니다.

오랜 궁리 끝에 종전까지 시행되던 시. 도 교육청과의 1:1 교류에 의한 인사를 중단하고, 전국교사를 대상으로 공개전형을 실시하여 동기가 투철한 우수인력을 전문직으로 임용하기로 하였습니다. 응시자격은 교육경력 6년 이상, 36세 이하인 국. . 사립학교 교원을 대상으로 하였습니다. 이들 합격자들은 앞으로 집중적인 교육과 연수를 통해 명실공한 교육전문직으로 의무 복무케 한 후 이들 중 업무추진능력이 검증된 이사를 상위직위에 승진. 임용토록 조처하였습니다. 이후 이들은 교육인적자원부의 전문엘리트로 급성장하여, 현재 본부실국에 근무 중인 교육전문직 84명 중, 2/3 56명이 바로 이들 공채출신 교육전문직인 것이다.

1) 귀하는 부처에서 발생하는 주요 현안문제들을 어떻게 인지하셨습니까? 누가 여기에 필요한 정보와 관련된 지식을 주로 제공해 주었습니까?

부처에서 발생하는 주요 현안문제들은 여러 소스로부터 인지합니다. 우선 실국장회의와 같은 공식적 보고경로를 통하는 경우가 있는 가하면, 차관, 장관비서실, 정책보좌관실 및 실국장, 혹은 과장들과의 비공식적 접촉을 통해 인지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기타 부처내 정책토론회, 관계자회의를 통해, 혹은 간혹 열리는 하위직급 직원들과의 간담회 등을 통합니다. 그런가 하면, 적지 않은 직원들은 내 이메일주소로 갖가지 정보와 대안들을 보내오고, 간혹 편지를 보내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부처내의 개방적 의사소통구조의 존부(存否)가 부처 내 지식과 정보의 양을 결정한다는 사실입니다. 장관은 언제나 귀를 열어 놓아야 합니다.

간혹 기자들이 귀띔하는 경우도 있고, 드물게는 부처 밖으로부터 듣는 는 경우도 없지 않았습니다.

2) 부처의 인사관리(인사 이동 및 배치)에 관한 노하우를 말씀해주십시오.

저는 재임 중 줄곧 <인물연구>를 계속했습니다. 자주 인사파일을 들춰 보았고, 사람 정보를 꾸준히 모았습니다. 보고 및 결재 과정에서 40여명의 과장급 중견간부들과 가능한 한 길게 사안에 대해 얘기를 나누면서 밀도 있는 접촉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처음 부임 후 세 달쯤 지난 후에는 부처 내 중견이상 간부는 비교적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과장 자리 하나도 그 업무영역에 관한 한 전국을 관리하는 중요한 자리이므로 새로 임명하거나 자리를 옮길 때는 꽤 고심하며 깊이 생각했습니다. 차관과 자주 생각을 나누었고, 어떤 때는 두루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다면평가 결과도 중시했습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은 지언(至言)입니다. 인사만 바르게 하면 직원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연고주의에서 벗어나 능력과 적재적소에 맞춰 사람을 써야 합니다. 그러나 인사과정에서 그 부처의 구조적 속성을 전혀 감안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 탈() 연고주의적 관점에서 구체적 인사안()을 만든 후, 지역적 구성 등을 고려해 최소한의 조정을 했습니다.

장관이 되자마자 대규모의 인사를 하는 것은 신중히 생각해 볼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실제에 있어서는 차관이나 총무과장에게 인사를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 장관이 된 후, 초기에 소규모의 파격적 인사를 단행하여 새로운 인사의 방향을 알린 후, 반년이 지나 사람연구가 끝난 후 대규모의 인사를 단행 했습니다. 두 번째 장관이 되었을 때에는 이미 중견이상 간부들에 관해서는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정이 달랐습니다.

대규모 인사에는 전()인사를 꽤 뚫는 원칙을 선보여야 합니다. 그냥 자리바꿈이어서는 부처 안에 새로운 기풍을 진작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1996 7월 대규모 인사에서 <능력위주> 원칙을 앞세웠고, 그 결과 부처내에 지각변동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수차 인사 청탁을 받으면, 당사자에게 불이익을 준다고 엄포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두 번 재임 중, 저는 거의 인사청탁을 받지 않았습니다. 다른 장관들은 정. 관계로부터의 인사 청탁 때문에 골치를 썩였는데 제 경우에는 그 때문에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몇 번의 차관 임명과정에서도 청와대는 제 의견을 존중했기 때문에 불편한 일이 없었습니다.

3) 부처 간부회의를 얼마나 자주 개최하였습니까? 간부회의에서 부처의 주요현안에 대한 의견수렴과 장관의 의사전달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공식적으로 매 주 한번씩 실· 국장회의를 하고, . 차관, 차관보 및 2실장의 5인 회의도 매주 한 차례씩 했습니다. 그리고 수시로 사안이 있을 경우, 유관 간부들을 모아 숙의를 하였습니다. 간부회의를 가능한 한 의례적이 아닌 열린 토론과정으로 진행하려고 노력했습니다만, 위계적 관료사회의 풍토와 시간의 압박 때문에 공식적 보고· 지시의 연쇄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비공식적 접촉을 자주 가졌고, 주요 사안에 관해서는 소규모 비공식회의, 정책토론 등을 통해 의사소통과 의견수렴을 많이 했습니다. 시간절약을 위해 이메일을 통한 의사소통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새벽 형>이고, 항상 시간에 쫓기기 때문에, 새벽 6시 반경 국장들에게 전화를 걸어 지시를 하거나 의견을 묻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6시 반을 조심해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4) 부처의 주요 현안과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예산을 어떤 방식으로 확보하고자 하였습니까?

모든 과제는 이미 확보된 예산의 한계 내에서 시행되었습니다. 예견되는 다음 해 주요 사업을 위해서는 예산편성과정에서 집중적인 관심을 표명했습니다.

5) 귀하가 의사결정을 할 때 주로 어떤 사람의 의견을 주의 깊게 고려하였습니까? 중요도에 따라 순서대로 말씀을 몇 가지만 말씀해주십시오.

우선 장관은 차관, 비서실장, 정책보좌관, 그리고 총무과장과 가장 많은 접촉을 합니다. 이들과는 <한 배를 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얼마간 가족과 같은 느낌을 주고받습니다. 그러나 사안에 따라 중요도가 달라집니다. 그 사안에 대해 잘 알고, 또 나와 같이 고민하는 사람들의 의견을 경청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토론과정을 통해 의견을 모았습니다.

6) 부처관리에 있어서 가장 아쉬웠던 점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행정학자이기 때문에 부처의 내부관리에 대해서는 남보다 더 전문가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직원들을 효율적으로 결속시키고 동기화(動機化)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경주하고 싶었습니다. 가능한 한 직원들이 행복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직원들이 일에 밀려 힘겨워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되어 항상 미안했었습니다. 그런데 워낙 시간에 쫓기고, 밖에 일이 많아 더 정밀하게 내부관리를 하지 못했고, 또 지나치게 일 관리에 매달리다 보니 부처를 보다 <인간화>하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IV.
장관의 자질과 덕목, 건강 및 일정관리, 퇴임관리 등에 관한 질문입니다.

1) 한국에서 효과적인 장관의 업무수행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자질과 덕목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래에 예시한 자질과 덕목은 모두 필요한 항목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순위를 매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마 정책사안에 따라 우선순위가 달라질듯 싶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볼 때, 가장 필요한 것은 <건전한 상식과 판단능력>일 듯 합니다.

(: 전문성, 공정성, 건전한 상식과 판단능력, 도덕성, 정치적 감각, 부처 미션에 대한 비전과 명확한 전략 등)

2) 장관 재직시 사용했던 효과적인 일정관리방법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일정관리는 일단 비서실에서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한 주 앞서 일정을 면밀히 살펴보고 조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가능한 한 의례적인 행사참여는 줄이고, 일 중심으로 일정을 짰습니다. 사적인 만남은 가능한 한 피하고, 일을 위해 필요한 차례로 우선순위를 정했습니다.

3) 장관재직시 사용했던 건강관리방법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제 유일한 취미가 산행이라, 주말에 시간이 되면 산에 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한달에 두 번가기가 어려웠습니다. 건강을 위해 토요일 오후 짬이 나면, 가까운 경복궁이나 창경궁에 가서 급히 한 시간쯤 걷기도 하였습니다. 가장 즐겼던 긴장완화 방법은, 일요일 늦은 오후 혼자 집 소파에 누워, 텔레비전을 켜 놓고, 비몽사몽으로, 보다 말다, 자다 깨다하는 것이었습니다. 항상 잠이 모자라, 차로 이동할 때는 잠시라고 눈을 부치곤 했습니다.

4) 마지막으로 후임장관이나 공직사회에 꼭 하시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공직에 있으면서, 항상 公心, 均心, 誠心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장시간 설문에 응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글쓴이 현강재 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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