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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신영복의 친구 N 이야기

2016. 1. 22. by 현강

 

 

                         

 

                                              I.

쇠귀 신영복 교수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나와 동갑내기 1941년생이고, 학교는 달라도 같은 해에 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둘 다 교수라는 직업에 오래 종사했다. 그러다 보니 내 친구와 친지 중에 그와 가깝게 교유했던 사람들이 제법 많다. 나는 그들로부터 그동안 신 교수에 관한 얘기는 자주 들었고, 또 그의 글을 읽으며 많은 공감을 했다. 그러나 인연이 닿지 않아 한 번도 생전에 그를 만난 적은 없다.

 

20여 년 전, 가까운 후배에게 “신영복 교수 글씨가 좋던데”라고 말했더니, 웬걸 얼마 후 그 후배가 신영복에게서 글을 하나 받아 내게 왔다. 내 얘기를 전하고 청을 해서 글을 받았다는 것이다. 무척 고마웠다. 대신 감사의 뜻을 전했으나, 직접 그에게 제대로 고마움을 표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낮 뜨거운 일인데, 그가 먼저 가니 미안함이 더 하다.

 

그 때 신영복은 “여럿이함께가면 험한길도즐거워라”라는 글귀를 써 주었다. 이 글을 담은 액자는 서울 집 서재 벽에 걸려 있다. 위, 아래 두 줄인데 띄어 쓰지 않고 이어 썼고, 첫 글자부터 앞으로 조금 기울어져서 마치 군중이 무리지어 앞으로 달려 나가는 역동적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나는 그 글씨를 접하고, 첫 눈에 고암 이응로의 <군상>을 연상했다. 후기 쇠귀 체에 비해 세련된 맛은 덜 하지만, 조금 거칠어서 오히려 원초적 느낌이 강하고. 조형적 감각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글 옆 귀퉁이에는 <辛未盛夏에 서울삼개에서 씀 쇠귀>라고 적혀있다. 신미년이니, 1991년 한 여름에 땀 흘리며 쓴 글씨로 여겨진다.

 

나는 신영복의 글을 바라보면, 항상 뇌리에 떠오르는 친구 한명이 있다. 이미 20여 년 전, 고인이 된 N이라는 옛 친구가 바로 그다. N은 신영복과 서울상대 동기로 그와 가까운 친구인데, 그 역시 통혁당 사건으로 꽃 같은 나이에 9년간 수형생활을 하며 보냈다. 출감 이후에도 실로 곤고(困苦)한 삶을 이어가다가 일찍 세상을 등졌다. 그를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아리다. 이야기가 또 길어질까 우려되나, 스토리 자체가 우리 세대가 몸소 겪은 살아있는 현대사의 한 단면이기에 기억을 더듬어 아래에 담아 본다.

                                                 

                                              II.

나는 1963년 3월,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입학해서 N을 그곳에서 처음 만났다. 큰 키에 건장한 체격, 시골풍의 순박한 얼굴이었는데, 영민한 머리에 언변이 좋았고, 친구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전북 정읍 출신인데, 집이 워낙 가난해서 집안에 공부한 사람이 없었는데, 자신은 천신만고 끝에 대학원까지 왔다고 말했다. 우리 집이 돈암동이고, 그가 성북동에서 입주 가정교사를 했기 때문에 자주 만나 어울렸다. 긴 얘기도 자주 나눴다.

 

그 때 N이 대화 속에 자주 신영복 이름을 올렸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친구인데, 독서회를 하며 꽤 자주 만난다는 얘기였다. 내가 무슨 책을 함께 읽느냐고 물었더니, “주로 사회과학 책들이지, 정치. 경제.... 가끔 불온서적도 돌려 읽고..” 라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내심 더 케어 보고 싶었지만 더 묻지 않고 거기서 그쳤던 기억이다. 그 당시 내 정신세계는 계속 <4.19>의 연장선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N은 그 보다 더 변혁적 세계를 꿈꾸고 있다는 직감이 있었기에 서로 논란을 피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또 언젠가 한 번은 N이 내게 “기회를 보아 영복이를 함께 만나자. 너희 두 놈이 잘 어울릴 것 같아”라고 말하기도 했다.

 

N은 1964년 행정대학원 2학년 때 퇴학을 당했다. 학교 정책에 앞장서서 반대했다는 게 대학원 측의 옹색한 퇴학조치 이유였다. 학교 측에 선처를 탄원했지만 받아 들여 지지 않았다. 그 해 가을, 몇몇 친구들이 주도해서 학교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동맹휴학을 결행했다. 물론 나도 함께 했다. 그러나 학교 측의 강경대응과 다수 학생들이 등을 돌리는 바람에 동맹휴학은 이틀 만에 무위로 끝났다. 지금 생각하면, 엄혹하기 짝이 없었던 박정희 집권 초기에 국립대학교에서 동맹휴학을 감행했으니 정말 무모하기 짝이 없었던 일이다.

 

N은 퇴학을 당한 후, 옛날 전주고등학교 1학년 때 합격했던 보통고시 자격증을 가지고 원자력위원회에 취직하여 그 곳에 다녔다. 나와는 계속 어울렸는데, N은 대화중에 신영복 이름을 전보다 더 자주 올렸다. 1965년 10월 초 내가 유학을 떠나기 사흘 전, 그가 나를 찾아 왔다. 그리고는 고향의 옛 초등학교 여자 동창 처녀와 결혼 언약을 했노라고 말했다. 가방끈은 짧지만 좋은 여자라고 부연했다.

 

나는 오스트리아에 유학 중에도 그와 두어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언제 부터인가 그와의 교신이 두절되었다. 1969년 초, 유학생활이 점차 막바지로 접어들 무렵, 하루는 가까운 선배 한분이 나를 찾아 와서, 한국대사관의 중앙정보부 파견 참사관이 공공연히 나를 지목하며, “사상이 의심스러워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 조만간 꼬리가 잡힐 것이다”라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후 나는 대사관에 의해 현대판 <요시찰인(要視察人)>으로 낙인찍혔고, 그 때문에 적지 않은 정신적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훗날 당시의 상황을 복기(復棋)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N이 1968년 신영복 등과 함께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다. 그런데 나는 당시 유학중이라 그 사실 조차 몰랐다. 그런데 아마도 수사과정에서 내가 N과 가까웠던 사실이 밝혀져 내 뒷조사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후에 안 일이지만, 당시 대사관의 진짜 실력자인, 그 정보부 참사관은 아예 프락치 한명을 고용하여 한동안 나를 추적. 감시하며 숨이 막히도록 옥죄었다. <동베르린 사건> 직후라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심경이었는데, 표적 관리 대상이 되니 삶 자체가 질곡이었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1970년 공부를 마치고 이듬해 귀국했다.

 

N은 1977년 영어생활 9년 만에 대구교도소에서 출감을 했다. 그가 세상에 나온 후 며칠 뒤 그와 반가운 해후를 했다. 조금 초췌해 졌지만, 목소리는 예전이나 다름없이 우렁차고 얼굴도 생각보다 밝았다. 그런데 그의 첫 언사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의 흥분된 말투와 놀란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 박정희, 그 사람 정말 대단한 사람이야. 나는 출감 후 대구에서 올라오면서 두 가지에 크게 놀랐네. 첫 째는 그 사이에 산림녹화 사업으로 전국에 벌거벗은 산이 온통 푸르게 변한 것이고, 둘째는 경부고속도로가 단기간 안에 완성되어 산업화를 위한 대동맥이 건설된 일이야. 산전벽해(桑田碧海), 경천동지(驚天動地) 라는 말이 이 럴 때 쓰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출감 후 그의 삶은 신산(辛酸)하기 짝이 없었다. 인생의 황금기를 감옥에서 보냈으니, 딱히 할 일이 마땅치 않았다. 오랫동안 한 재래시장의 상인조합 사무장을 맡았던 기억이다. 근근히 먹고는 산다고 말했다. 이사하면 경찰관이 한 번씩 찾아와 이것저것 캐묻는 것 말고는 몸으로 느끼는 다른 핍박은 없다고 답했다.

 

한참 못 보았다 싶으면, 그가 불쑥 노크도 없이 내 연구실 문을 열고 싱긋 웃으며 들어오곤 했다. 내가 연락하고 오지, 때 없이 왔냐고 나무라면, 으레 “사람은 보고 싶을 때 찾는 게 아닌가. 내게 오늘이 바로 그 날 일세” 하며 껄껄 웃었다. 세상 얘기, 사는 얘기, 친구소식을 주로 나눴던 기억이다. 그도 이젠 완연히 생활인이 되었다는 느낌이었다. 전에 그가 그토록 자주 입에 올렸던 신영복 얘기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대화에서 의식적으로 <사상>과 관계되는 화제는 피했던 것 같다. 그것은 우리에게 영원한 금기의 영역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의 입을 통해 지난 날 통혁당 사건에 관해 따로 들은바가 전혀 없었다.

 

1990년 쯤으로 기억하는데, N으로부터 딸 결혼식 청첩장을 받았다. 며칠 뒤 정동 성프란치스코 성당에서 혼례미사가 있었다. 조촐하게 치러졌지만, 매우 성스럽고 아름다운 예식이었다.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예쁜 따님과 훤칠한 모습의 사위가 무척 행복해 보였다. 나는 결혼하고 얼마 후 남편을 교도소로 보내고 길고 모진 세월 동안 딸아이를 혼자 키우며 남편을 애타게 기다렸던 N의 부인을 멀리서 바라보며 애잔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진심어린 축하와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가 혼배미사 내내 오열하듯 얼굴을 숙이고 있었고 미사가 끝나자 가까운 친지에 둘려 쌓여 시야에서 가려지는 바람에, 더 이상 다가가기가 어려워 머뭇머뭇 하다가 그냥 예식장을  빠져 나왔다.

 

1992년 내가 1년간 미국 씨라큐스 대학에 객원교수로 갔다가 이듬해 돌아 와보니 N은 이미 고인이 되어 있었다. 간경화로 고생하다가 결국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비관해서 술을 자주 들었던 것이 원인이었으리라는 추정이었다. 나는 좋은 자질을 고르게 갖췄으면서, 시대를 잘못만나 고생고생 하다가 불귀의 객이 된 그가 저승에서나마 영원한 안식을 취하기를 마음으로 간절히 빌었다. 그러면서 주마등처럼 이어지는 그와의 오랜 추억을 되새겼다.

 

                                                  III.

이제 N도 가고, 그 친구 신영복도 갔다. 그리고 그들과 같은 시대를 호흡했던 나는 아직 살아남아 그들을 추억하고 있다. 그들은 한 때 나와 다른 꿈을 꾸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모진 세월의 무게에 짓눌리면서 더 좋은 세상을 지향하며 한껏 고뇌하며 힘겹게 살아 온 인생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들과 동시대인으로서 끈끈한 동지적 연대를 느끼며, 그들과의 크고 작은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N 군! 훗날 저 세상에서 자네와 주저 주저하며 계속 미루어 두었던 <사상>얘기를 툭 털어 놓고 해 볼 생각 없나. 논쟁하는 부분이 더 많을까. 아니면 공감하는 부분이 더 많을까. 거기는 금단(禁斷)이 없는 세상이니 더 자유로울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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