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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황당 이제(二題)

2016. 4. 8. by 현강

                   I.

  이곳 속초/고성에 살면서 좋은 점 중의 하나는 가까이에 좋은 온천이 많다는 것이다. 서울사람들은 속초하면, 으레 척산온천을 떠 올리지만, 그곳 외에도 주변 콘도 등지에 쾌적하고 물 좋은 양질의 온천이 많이 있다. 대체로 시설도 좋고 경치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온천 값도 무척 싸서 한 몫에 사면 9만원이면 30장을 내 준다. 그런데 정말 좋은 것은 탕에 손님이 별로 없어 북적이지 않는 다는 점이다. 주말을 피해 조금 한가한 시간에 가면, 거짓말처럼 홀로 <황제목욕>을 즐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서울에 살 때 보다 훨씬 자주 목욕탕을 찾는다. 적어도 온천욕에 관한 한 이곳에서 대단한 호사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지난 주 조금 황당한 일이 있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H 콘도 온천에 갔는데, 그날도 마침 욕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 오늘도 황제목욕이구나 싶었는데, 왠걸 10분도 안돠어 장대한 몸집의 등 뒤에는 용트림 문신을 한 40대의 거한이 들어왔다. 조금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는 곧 욕장을 휘저으며 분탕질(?)을 하는데 정말 가관이었다. 욕탕에서 큰 소리로 흥얼거리는 것은 물론이고, 별로 크지 않은 냉탕에 둘어가서는 풍덩거리며 개헤엄을 쳐서 온통 주위에 물바다를 만드는가 하면, 비누 묻은 수건을 아무데나 내 팽개치는 등 하는 행동거지가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나는 급히 샤워를 하고 욕탕에서 나왔다.

 

 

                         II.

  바로 그날 오후,

 

오랜만에 속초에 나갔다가 내 처가 느닷없이 “오랜 만인데, 영화나 보러갈까” 해서 나도 ‘좋지’하고, 여러 영화를 동시에 상영하는 <메가박스>를 찾았다. 대체로 영화를 보러 갈 때는, 영화 내용, 영화평도 점검하고, 인기도 참조하여, 말하자면 나름 생각해서 미리 영화를 정하고 가는데, 그 날은 가서 정할 요량으로 무작정 영화관으로 향했다. 가서 보니 별로 신통한 게 없었다. 그런데, 마침 그럴 사한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마이 디어 그랜파>라는 영화였다. 상영시간이 임박해서 이것저것 따질 형편도 못돼 그냥 그것을 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제목으로 미루어 볼 때 할아버지와 손자 간에 빚어지는 정겹고, 따스한 얘깃거리가 틀림없고, 얼마간 감동이 일렁이고, 어쩌면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장면도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무엇보다 주연이 명품 연기자인 <로버트 드 니로> 이니 수준 이하의 작품은 아닐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매표소 아가씨에게 영화제목을 얘기했더니, 그녀가 입가에 살짝 미묘한 웃음을 보이며, “좌석을 정하세요. 관객은 두 분뿐이십니다”라며 좌석표를 내 보였다. 뭔가 찜찜했다. 매표원의 살짝 웃음도 그렇거니와 관객이 단 두 명이라니. 이건 좀 너무 한 게 아닌가 싶었다.  텅 빈 방안 정중앙에 둘이 앉으니, 너무 호젓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온천탕에서 혼자 목욕을 할 느끼는 충만한 기분과는 거리가 멀었다. 뭔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 같아 심기가 불편했다.

 

  그런데 그 불안한 예감이 적중했다. 상영 10분 쯤 지나자 “아뿔싸, 이거 잘못 들어 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인 즉, 72세의 특수부대 출신의 엽기적 할아버지와 변호사 연수 중인 고지직한 ‘범생이’ 손자 두 사람이 플로리다 여행을 하면서 펼치는 좌충우돌 로드무비인데, 인생 황혼기 남성의 과격한 욕망과 외설스런 욕설이 영화 전편에 여과 없이 투사되는 저질의 블랙 코미디였다. 지나쳤다 싶었던지, 영화는 말미에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그랜파가 세상의 성공공식만을 쫓는 외눈박이 손자에게 보다 넓고, 다양한 세계를 보여 주기 위한 속 깊은 인생수업이었다는 식의 무리한 의미 부여를 꾀한다. 그러나 영화가 이미 더럽고 음습한 웅덩이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허우적거렸기 때문에, 그러한 반전이나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내재적 소스와 잠재력을 모두 소진해 버렸다. 한마디로 어이없는 실소(失笑)만 자아내는 저급한 3류 미국 영화였다. 나는 영화가 끝나기 무섭게 자리를 떴다.

 

  나오면서 비로소 포스터를 살펴보니, 영화의 원제목이 ‘더티 그랜파’ (Dirty Granpa)가 아닌가. 그러면 그렇지, 내용도 모르고 즉흥적으로 영화관에 들어갔으니 나의 불찰이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이 영화가 올 초에 미국에서 개봉 당시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차지했고, 그에 앞서 개최되었던 아메리칸 마켓 모니터링 시사회에서 9.3이라는 경이적인 평점을 받았던 수작이라는 것이다. 그걸 보며, 나는 참 미국 사람들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비교해 볼 때, 멍청이 우리 부부를 빼면 저질 영화를 위해 한자리도 배려하지 않은 속초의 관객 수준이 그 보다 훨씬 높은 게 아닐까.

 

여하튼 그 날 나는 조금 황당한 일을 거푸 두 번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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