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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

<스승의 날>에 생각나는 일

2016. 5. 10. by 현강

                        I.

  1997년으로 기억된다. 그러니 벌써 19년 전 얘기다. 당시 나는 김영삼 문민정부에서 교육부 장관을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대통령께서 <스승의 날>에 옛 스승 들을 모시고 점심을 하는데 장관도 합석하라는 전갈이었다. 참석자는 김 대통령의 서울대학교 문리대 철학과 스승이셨던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과 고형곤 박사, 그리고 이름이 기억되지 않는 경남고 스승 한 분, 그리고 대통령과 나, 다섯 명이었다.

 

                       II.

  당시 안호상(1902-1999) 박사님은 95세의 고령이셨다. 초대 문교부 장관 재직 중, ‘한 백성(일민)주의’를 주창하고 한국의 교육이념으로 ‘홍익인간’을 정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민족사상 연구가로 기개 높고 깐깐한 성품이셨다. 기존 역사학계를 식민사학으로 비판하고 기회 있을 때마다 고집스럽게 <통일신라 국경 북경설>을 주장하셨던 재야사학계의 거목이셨다. 일찍이 1920년대에 독일 유학을 하셨고, 이광수의 중매로 한 때 <렌의 애가>의 모윤숙 시인과 결혼해 유명세를 타셨지만, 결국 두 분의 사랑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훔볼트 재단 모임 등에서 몇 번 뵈었는데, 언제나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시고, 엄숙한 표정이 인상적이셨다. 악력이 대단하셔서 악수할 때 손이 아플 정도였다.

 

  한편 고형곤(1906-2004) 박사님은 한 때 전북대학교 총장과 국회의원도 지내셨는데, 특히 선(禪)에 대한 심오한 연구로 이름난 한국 철학계의 원로이셨다. 고건 전 총리의 부친으로도 널리 알려지셨는데, 당시 아흔이라는 연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하셨다.

  또 한 분, 김영삼 대통령의 경남고등학교 은사이셨던 선생님은 여든을 갓 넘으셨을 연배였는데, 90줄의 두 어른과 함께 계시니 상대적으로 젊어 보였다. 쾌활한 성격으로 말씀을 좋아하시는 느낌이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세는 나이로 70이셨고, 나는 57세였다. 그러니 그 자리에는 90대 두 분, 80대, 70대, 그리고 50대가 함께 하고 있었다. 나는 대통령의 스승 되시는 한국 철학계의 전설적인 두 어른과 함께 하는 쉽지 않은 기회이어서 얼마간 들떠 있었다. 어른들 말씀에 내가 끼어들 것도 아니고, 그냥 <옵서버>로 앉아 당대의 큰 어른들 말씀에 귀 기울이며 소중한 기억이나 챙기고 인생 공부만 하면 되는 자리이니 얼마나 기막힌 계제인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장관 일정에 이런 모처럼의 기회는 오랜 가뭄 뒤에 한 차례 빗줄기 처럼 청량했다. 그런데...

 

                     

                             III.

  김영삼 대통령의 간략한 사은(謝恩)의 말씀에 이어 식사가 시작되었다. 칼국수나 소찬은 아니었으나 그리 풍성한 식단은 아니었던 기억이다. 딱히 화기애애하지는 않았으나, 대화 분위기는 좋은 편이었다. 김 대통령은 워낙 말 수가 적은 분이시기도 하지만 은사들 앞이니 시종 다소곳한 편이셨고, 고형곤 박사님도 하실 말만 골라서 하셨다. 시종 좌중을 압도하며 분위기를 주도한 이는 역시 안호상 박사님이셨다. 자신의 박람강기(博覽強記)를 뽐내시듯, 주제를 바꿔가며 종횡무진 말씀을 많이 하셨다. 그런데 안 박사님 말씀 사이사이에 틈새를 자주 비집고 들어가, 때로는 안 박사님의 말씀을 거들고, 때로는 자신의 생각을 곁들어가면서,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셨던 분이 김 대통령의 경남고 은사셨다. 그 분은 안 박사님이 주도하는 판세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일인 독주는 용인하지 않으시겠다는

듯, 가끔 견제구를 던져가며, 나름 자신의 몫을 톡톡히 했다.

 

  그런데 식사가 종반으로 들어갈 무렵, 예상치 않은 사달이 났다. 그 이름 모를 김 대통령 경남고 은사께서 말씀 도중 느닷없이 안호상 박사님을 향해

  “선생님, 백수(白壽)는 하셔야 지요”라고 말씀 하시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나는 ‘아차’했다. 물론 덕담으로 드린 말씀이지만, 안 박사님 성품에 그 말을 그냥 넘기시지 않을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 이어 안 박사님이 목청을 크게 높이시며 역정을 내셨다.

 

“아니, 이 양반아. 내가 지금 아흔 다섯이고 이처럼 건강한데, 몇 년 만 더 살고 가라는 얘기요”. 이에

크게 당황한 대통령의 옛 은사는 손사래까지 처가며,

“아니, 그 말씀이 아니라...” 하며, 극구 변명을 했지만, 안 박사님의 노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다른 이들도 곤혹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가운데, 점심식사는 파장을 맞았다.

 

 

                              IV.

  그날 ‘백수’ 하시라는 말씀에 크게 화를 내셨던 안호상 박사님은 그 후 두 해 뒤인 1999년 아흔 일곱에 저 세상으로 가셨다. 고형곤 박사님은 더 장수하셔서 2004년 아흔 아홉 연세에 서거하셨다. 평생 타고난 건강을 자랑하셨던 김영삼 대통령도 작년에 구십 문턱을 넘기시지 못하고 별세하셨다. 그 날, 점심 마지막 무렵 판을 깨셨던 김 대통령의 경남고 은사의 생사는 알 수가 없으나 그 분의 낙천적 성격으로 보아 꽤 오래 사셨을(아니면 살고 계실)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지난 20년 동안 우리나라의 고령화는 세계에 유례없이 빠르게 진행되어, 최근의 통계에 따르면 전국에 100세 이상 노인의 수가 1만 5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놀라운 얘기다. 안호상 박사님이 요사이 사셨다면 아마 호기 있게 120세는 장담하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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