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의 단상

겨울에 생각나는 의사 두 분

2015. 12. 13. by 현강

                           

                                           I .

내게는 겨울이면 생각나는 의사 선생님이 두 분 계시다. 한 분은 한국분이고, 또 한 분은 외국분이다. 첫 번째 분은 옛날 서울 돈암동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큰 길가에서 동네 의원을 개업하셨던 신 선생님이시다. 그 분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10대 초반까지 그곳에 계셨는데, 어질고 자상하신 초로(初老)의 의사 선생님이셨다. 키가 훤칠하게 크시고 얼굴이 아주 잘생기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집안에 누가 조금만 아파도 으레 그 분께 갔기에 신 선생님은 4대가 함께 살았던 우리 집 온 가족의 병력은 물론 가족관계를 낱낱이 잘 알고 계셨다. 요새 식으로 말하자면 전형적인 가정의셨다.

 

몸이 아파 찾아뵈면, 늘 친절하게 대해주시며 일일이 가족 안부를 물으셨다. 그래서 진찰시간이 언제나 길었다. 편안하고 따듯한 분이시지만 청진기를 가슴에 대실 때면 얼굴이 금세 진지해 지셔서 나도 덩달아 긴장하곤 했다. 그러나 청진기를 떼실 때면 얼굴 표정을 풀으시면서, “걱정마라. 곧 나을게다”라며 안심시켜 주셨다. 그 시절, 신 선생님은 우리 가족에게는 조선시대  명의 '허준' 같은 분이셨다. 내가 한 번은 “우리 식구는 신 선생님 얼굴만 뵈도 병이 다 나아”라고 말해 온 가족이 “맞네, 맞아”하며 맞장구를 쳤던 기억이 난다.

 

가끔 왕진도 오셨다. 한번은 눈이 쌓인 한 겨울이었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별안간 많이 편찮으셔서 내가 찾아 뵈웠더니 지체 없이 왕진채비를 하시고 대뜸 앞장을 스셨다. 검은 외투차림, 큰 걸음의 신 선생님을 쫓아 하얀 눈길을 따라 간호사 누나와 내가 종종 걸음으로 따라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세상이 온통 하얀 눈인데 그것이 신 선생님의 검은 외투와 어울려 <블랙-화이트>의 세련된 앙상블을 이뤘다. 그런데 그게 어린 소년의 눈에 꽤나 멋져 보였다.

 

신 선생님은 한참 앞서 가시다가 뒤를 돌아보시고는, 빙긋이 웃으시면서 “내 걸음이 너무 빨랐지” 하시며 걸음을 멈추시고 잠시 나를 기다리셨다. 내가 다가가자 내 손을 따듯하게 잡아 주셨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너 혹시 세브란스 의전을 아니” 라고 물으셨다. 나는 “잘은 몰라도 이름은 들어 봤어요”라고 어설픈 대답을 드렸다. 그랬더니 “내 아들이 거기 합격을 했다. 그래서 요즈음 내가 무척 기쁘다. 잘 하면 내 아들이 내 직업을 잇게 될 것 같구나”라며 웃으셨다. 그 장면이 인상깊게 내 뇌리에 남아있다.

 

내가 어렸을 때 겨울이면 서울에 눈이 자주 내렸던 기억이다. 사람도 적었기 때문이지 몰라도 눈이 오면 천하가 온통 눈 세상이었다. 요사이도 인적이 드믄 눈 내린 길을 걸을 때면 그 때, 그 장면이 생각이 난다. 신 선생님의 다사로운 눈빛과 손을 통해 전달되던 따듯한 체온, 그의 나지막한 음성, 그리고 옛날 그 시절에 고전적인 ‘착한 의사’의 영상이 그것이다.

.

                                                     II.

내가 기억하는 두 번째 의사 선생님은 1960년대 후반 내가 오스트리아 빈에 유학하고 있을 때 그곳에서 만난 포코르니 선생님이다. 당시 우리 가족은 나와 내 처, 그리고 갓난아기 딸 세 식구였고, 내 공부가 막바지에 있을 때였다. 빈 숲(Wienerwald) 근처 언덕배기에 작은 동네에 살았는데, 시골 마을처럼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어 몇 년 살다보니 온 동네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두루 가까이 지냈다. 포코르니 선생은 그 동네 유일의 가정의였는데, 풍모도 옆집 아저씨처럼 친근하게 생기셨고 천성이 착하고 따듯해서 온 마을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다. 우리도 어린 딸아이가 겨울에 자주 감기가 걸려 그를 단골로 찾았다. 한 겨울 담요로 아기를 겹겹이 쌓고 그의 <의원>집을 찾던 기억이 어제 같다. 그래서 그런지 내가 포코르니 선생을 찾았던 것은 언제나 눈 내리는 겨울로 추억된다.

 

포코르니 선생의 <의원>집은 참나무로 둘러쌓인 소박하고 자그마한 이층집이었는데, 일층에 진찰실과 환자들 대기실이 있었다. 그런데 대기실은 주로 할머니, 할아버지로 언제나 붐볐고, 그들의 왁자지껄하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말하자면 외로운 노인들의 만남의 장소, 요새로 따지면 동네 '마을회관' 같은 곳이었다. 내가 대기실에 들어서면 노인들은 으레, “베네딕트(내 세례명), 자네가 먼저 진찰받게나, 우리는 바쁘지 않으니까. 여기서 조금 더 떠들고 싶네” 라며, 내 등을 떠밀곤 했다. 그래서 내가 한번은 포코르니 선생에게 “의원이 온 동네 노인들 쉼터가 되었으니 힘드시겠어요”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무슨 얘기, 그게 사는 재미지, 저 분들은 몸이 아파서 오시는 줄 아나. 아니야. 마음이 헛헛해서 오시는 분들이지. 저 대기실에서 답답한 기운을 반쯤 푸시고, 나머지는 내 방에서 푸시네. 여기서 내가 하는 일은 별로 없네. 그냥 저분들 말씀을 성실히 들어 드리는 것 뿐이네. 그러면서 가끔 맞장구를 처 드리고”, 하시며 그의 필살기인 눈웃음을 곁들인 개구쟁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언제나 청진기로 세밀하게 진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에게서 주사를 맞거나 따로 약을 타 온 기억이 별로 없다. 그는 자주 허브차를 추천했는데, 단골 메뉴가 <카멜리온 차>였던 기억이다. 아니면 난로에 주전자를 올려놓아 방에 더운 수증기를 퍼지게 하라는 처방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많은 경우, “하루, 이틀이면 괜찮아 질 걸세. 옷이나 한 겹 더 껴 입히게나” 하는 정도였다. 그래도 그는 동네에서는 명의로 소문이 나 있었고, 우리 가족도 그곳만 다녀오면 웬만큼 병도 씻은 듯이 치유되었다. 그래서 한 겨울에도 그의 처방이 무엇일지 미리 다 알면서도, 조금만 몸이 시원찮아도 그를 찾아 나섰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는 몸의 병에 앞서 환자의 마음을 다스리면서  <힐링>의 참된 의미를 가장 잘 이해하고 계셨던 의사 선생님이 아닌가 싶다.

 

                                            III.

겨울이면 생각나는 위의 두 의사 선생님은 다 옛날 분들이시다. 지금 보다 시간이 훨씬 느리게 흐르고, 사람들도 덜 약삭발랐던 시절의 어른들이다. 내가 그들을 더 애틋하게 추억하고, 더 그립게 느끼는 것은 요사이 그런 분들이 드물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요즈음  조금 이름 있다는 큰 종합병원에 가면 진찰 시간이 불과 몇 분이다. 대체로 의사가 두어 마디 묻고, 곧  검사를 지시한다. 무슨 검사가 그리 많은지, 또 수술을 어찌 그리 쉽게 권하는지, 과잉의료가 눈에 보일 때가 많다. 그래서 매머드화, 비인간화 되는 큰 병원을 나올 때면, 고마운 마음보다 <당했다>라는 느낌을 갖을 때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의사 선생님과 환자 간의 교감이 예전 보다 크게 떨어졌다. 의료과정에서 필수적인 예열(豫熱) 단계, 즉 양자 간의 따듯한 눈빛의 교환과 진정성 있는 대화, 인간적인 설명과 이해의 단계가 거의 통째로 빠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환자는 곧장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의료 기술자가 주도하는 물리적 검사과정에 한낮 객체로 참여해서, 울화를 참아가며 의사가 처방, 지시하는 데로 묵묵히 따르게 된다. 그 과정에서 환자의 긴장과 불만이 증폭되고, 자칫 트라우마가 쌓이게 된다.

 

내가 아름답게 추억하는 두 분 의사 선생님은 말하자면 목가적(牧歌的), 고전적 의사상()의  전형이었다. 오늘 그들이 절실하게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보다 요즈음 대형 병원이 경쟁적으로 의료기술의 고도화, 장비의 첨단화, 그리고 상업화로 치닫으면서 인술(仁術)로서의 의술이 크게 퇴색하고 의술의 비인간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 그 뿐만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내가 늙어 가면서 옛 것에 대한 향수가 켜켜이 쌓이고, 복고적 심성이 더 짙어지는 것도 중요한 이유가 아닐지.

 

얼마 전 서울을 갔다가 감기가 걸려 평소에 잘아는 가정의 한분을 찾았다. 의사 선생님이 내 가슴놀이에 청진기를 대는데 나는 잔잔한  감동을 감추기 어려웠다. 청진기가 몸에 닿는 것도 실로 오랜 만의 일이었고, 이런 고전적 수작업을 통해 의사와 환자가 '인간적'으로 교감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마치 내가 타임머신을 타고 ‘좋았던 옛 시절’로 되돌아가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내 병은 적어도 심리적으로 이미 반쯤 치유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집에서 가까이, 인술을 제대로 터득한  착한 가정의 한 분을 갖는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나는 다시 그 옛날 두 분 의사선생님의 어진 영상을 뇌리에 떠올렸다.

'삶의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영복의 친구 N 이야기  (1) 2016.01.22
세모에 인사드립니다  (3) 2015.12.29
장기려, 그 사람  (0) 2015.11.18
산, 그 그윽한 품속  (0) 2015.09.18
가을의 문턱에서  (1) 2015.09.01

댓글